먼길

연재칼럼 지난칼럼
오소영
한일수
오클랜드 문학회
박명윤
수선재
천미란
성태용
조기조
김성국
템플스테이
최성길
김도형
강승민
크리스틴 강
정동희
마이클 킴
에이다
골프&인생
이경자
Kevin Kim
정윤성
웬트워스
조성현
전정훈
Mystery
커넥터
Roy Kim
차자명
새움터
멜리사 리
휴람
김준
박기태

먼길

dovejoanna
0 개 1,486 수필기행

■ 노 혜숙


나는 물과 불처럼 서로 다른 부모님 사이에서 맏이로 태어났다. 아버지를 닮아 지극히 내성적이었고, 어머니를 닮아 감성이 넘쳤다. 밴댕이처럼 좁은 속은 아니었으나 하해처럼 넓은 속도 아니었다. 부모님은 농사일로 바빴고 나는 외딴 밭 옥수수처럼 제풀에 자랐다.


내가 부쩍 외로움을 타기 시작한 것은 엉덩이에 뿔이 돋을 무렵이었다. 이른 저녁을 먹고 건초 더미에 누워 있으면 왠지 동산 위에 반쪽자리 달처럼 허기가 졌다. 어둑해지도록 안방에는 불이 켜지지 않았다. 올해도 흉년이 들어 조합 빚을 다 갚지 못할 거라는 아버지의 한숨 섞인 말소리만 간간이 들려왔다.


친구들이 밤톨만 한 젖가슴을 내놓고 멱을 감을 때 나는 나무 그늘에 앉아 책을 읽었다. 그때 일찌감치 알아챘다. 인생은 불공평하다는 것과, 내가 책 속의 주인공처럼 화려한 삶을 살 수 없으리라는 것을. 감수성 예민한 시기에 가난은 부끄러움이었다. 내가 책에 탐닉하게 된 것도 어쩌면 그것만이 자존감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참 발랄해야 할 나이에 책에 갇혀 외골수가 되었고, 놀 줄도 모르는 민숭민숭한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소심하고 신중한 탓에 삶의 거친 급류를 겪진 않았으나 확 트인 전망도 누리지 못한 채 중년을 맞았다.



이십 년 넘게 살던 도시를 떠나 시골 마을로 이사를 했다. 가까이서 보는 농촌의 생활은 고달팠으나 사는 맛이 났다. 촌로들은 새벽이슬을 맞으며 논둑의 물꼬를 트고, 잡초를 제거하고, 약을 치고, 뙤약볕 아래 저물도록 밭을 맸다. 등은 굽고 허리는 휘었으나 표정엔 번뇌가 없었다. 유월이면 촌로의 광엔 황토밭에서 캔 붉은 감자가 쌓이고, 시렁엔 아기 주먹만 한 마늘이 내걸렸다. 주말에는 아들 내외가 내려와 일손을 거들고, 마당에 내걸린 가마솥에선 구수한 삼계탕이 끓었다. 칠순이 훌쩍 넘은 촌로 부부는 종일 말 한 자락 나누지 않으면서도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다.


들녘엔 철마다 야생화가 흐드러졌다. 버찌며 오디, 산딸기도 지천에 열렸다. 야생의 맛은 시거나 떫거나 달착지근하거나 분명한 제 맛을 지니고 있었다. 한철 피었다 질망정 피고 짐에 순서가 있었고 영역의 한계가 분명했다. 애초기 톱날에 뎅겅 목이 잘리고 농약이 골수에 스미어 누렇게 말라죽어도 이듬해엔 영락없이 파릇파릇 잎을 밀어 올리는 야생초들. 장마통 비바람에 반쯤 꺾여서도 환하게 웃었다. 그 강인한 생명력으로 개별성은 보존되고 들녘은 해마다 강성한 것이리. 저들이 나고난 본성을 부정하고 시절을 탓하며 처지를 비관했다면 세상의 초록은 모두 사라지고 말았을 터. 야생초처럼 비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밀고 나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존재를 세우는 근본적 힘이라는 걸 왜 몰랐을까.


삽자루를 둘러멘 촌로를 따라 돌아오는 저녁, 어둑해져서야 집으로 돌아오는 아버지를 떠올렸다. 부모님은 농투성이였지만 그 토대 위에서 굳건히 삶을 일으켰고, 큰 부자는 아니었지만 나름 떳떳한 삶을 살았다. 몸으로 체득한 진리는 정직하고 단순했다. 책의 이론처럼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 아니었다. 땅이 심은 대로 보상하듯 땀 흘린 만큼 풍요로운 건 삶의 진리였다.


행복은 지극히 일상적이고 소박한 것들임을 깨달은 것도 그 무렵이었다. 큰 욕망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소소한 행복들이 눈에 띄었다. 만족한 삶이 행복한 순간들의 합이라면, 얼마나 크게 행복하냐가 아니라 얼마나 자주 행복하냐가 더 중요하단 말은 옳을 터였다. 큰 욕망을 내려놓자 작은 행복들이 일상 속에 꽃처럼 피어났다. 삶은 여전히 궂은 날, 갠 날을 시계추처럼 오갔지만 그 사이의 긴장을 견디게 하는 건 바로 작은 행복들이 주는 내성이었다.


8973e4b57fa35d3f745e9e772b8c24ff_1637634071_3422.png
 

경쟁과 속도를 벗어난 자연의 느린 호흡 속에서 평범한 일상의 행복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깨닫는다. 무성한 욕망과 미혹, 화려한 이정표와 갈림길 앞에서 나는 얼마나 오래 헤매었던가. 이제야 정작 나를 가난하게 한 것이 내 안의 열등감, 패배의식임을 알겠다. 끊임없이 비교하면서 내 것이 아닌 것을 구하려는 욕심, 기쁨만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결핍과 좌절의 원인이었던 것이다.


살면서 어찌 한 점 그늘이 없으랴. 그만하면 나도 무난하게 살아왔거늘. 진정한 행복이란 촌로처럼 야생초처럼 상처와 결핍마저 끌어안고 묵묵히 제 노래를 부르는 것이리. 만물에 자기 자리가 있듯이 저다운 삶의 방법을 찾는 것은 결국 각자의 몫일 테다. ‘그래, 이만하면 괜찮다.’ 가파르게 오르내리던 욕망을 다독인다. 열세 살 소녀의 왜곡된 자존감이 제자리를 찾기까지 너무 먼 길을 돌아온 셈이었다.


■ 노 혜숙 

2006년 ‘수필과 비평’으로 등단 후

<<조르바의 춤>>, <<생생, 기척을 내다>>, <<비밀번호>>를 펴냈다.

2014년 계간 <<에세이 포레>> ‘올해의 작품상’과

2015년 월간 <<수필과 비평>> ‘황의순문학상’을 수상했다.


매력만점의 은퇴부모 투자이민

댓글 0 | 조회 333 | 4시간전
COVID-19 팬데믹으로 말미암아 탄생한 특별 영주권제도를 통하여 영주권을 받게 된 분들로부터 근래 들어 자주 듣게 되는 질문이 있습니다.“제가 코로나로 영주권… 더보기

호주 뉴질랜드 의대 합격의 분기점: 지금 점검해야 할 시기

댓글 0 | 조회 201 | 4시간전
▲ 이미지 출처: Google Gemini AI안녕하세요? 뉴질랜드, 호주 의치약대 유학, 입시 및 중고등학교 내신관리 전문 컨설턴트 크리스틴입니다. 현재 유학생… 더보기

연주 씨의 카드

댓글 0 | 조회 120 | 4시간전
갈보리십자가교회 김성국지적 장애를 가진 연주 씨는 부모와 함께예배에 한 번도 빠짐이 없는 아가씨입니다연주 씨네 집이 이사하여 심방예배를 드리러 갔습니다성탄절이 가… 더보기

2026년 통과된 고용관계법 개정안

댓글 0 | 조회 249 | 7시간전
고용시장의 유연성을 증가시키고 피고용인들에게 유리하게 작동하는 고용분쟁 시스템 구조를 더 공정하게 만들고, 피고용인들의 부적절한 행동을 억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 더보기

‘취미’와 ‘문제’의 경계선

댓글 0 | 조회 106 | 7시간전
- 갬블링 위험 신호 점검뉴질랜드에 거주하는 한인들에게 갬블링은 생각보다 가까운 여가 활동이다. 주말에 친구들과 스포츠 결과를 예측하거나 여행 중 카지노를 방문하… 더보기

개똥걱정 말똥걱정

댓글 0 | 조회 90 | 7시간전
1898년 뉴욕에서 세계 최초의 국제 도시계획 회의가 열렸다. 하지만 전 세계의 전문가들이 모였음에도 답을 찾지 못했다. 산업이 발달하고 물동량이 늘어나자 말(馬… 더보기

6편 – MH370: 사라진 하늘

댓글 0 | 조회 97 | 7시간전
“비행기는 사라졌지만, 그 안에 있던 ‘어떤 것’은… 여전히 살아 있다.”프롤로그 - 2014년 3월 8일, 새벽 1시 21분쿠알라룸푸르 관제탑.레이더 화면에서 … 더보기

오클랜드대 각 의료계열 최신 입시 정보 및 선발기준 (의대, 약대, 검안대, 영상…

댓글 0 | 조회 176 | 12시간전
이번 칼럼에서는 오클랜드대 각 의료계열 최신 입시 정보에 대해 다뤄보고자 합니다. 아래는 2026년 오클랜드 의료계열 입시 기준 Dean’s Determinati… 더보기

병보다 무서운 간병비

댓글 0 | 조회 772 | 4일전
고려 말기의 명장인 이성계(李成桂)가 1392년 조선(朝鮮)을 건국한 이래 1910년 멸망할 때까지 518년 동안 조선은 총 27명의 왕을 배출했다. 조선 시대 … 더보기

오클랜드대 의료계열 입시 통계 총정리 (의대 약대 검안대 등)

댓글 0 | 조회 429 | 5일전
이번 칼럼에서는 최근 2년 (2025년, 2026년) 오클랜드대 의료계열 입시 통계를 요약해보고자 한다. 2026년 입시는 2025년 지원한 학생들을 뜻하며 20… 더보기

약 처방, 이제는 12개월분까지 처방 받을 수 있다

댓글 0 | 조회 978 | 8일전

올해부터 바뀌는 오클랜드대 의료계열 MMI 면접방식 (의대,약대,검안대 등)

댓글 0 | 조회 801 | 2026.03.12
의료계열 (메디컬) 입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는 ‘최신 정보’를 알고 정확하게 준비를 하는것이다. 필자는 매년 면접관과 입학사정관을 만나며 최신정보를 수… 더보기

피아노의 영혼

댓글 0 | 조회 243 | 2026.03.11
▲ 이미지 출처: Google Gemini AI1994년 뉴질랜드 이민을 준비하면서 마침 딸의 권고로 뉴질랜드 영화 ‘피아노(The Piano)’를 감상하였다. … 더보기

인간의 본질적 문제

댓글 0 | 조회 205 | 2026.03.11
저는 불교의 윤회설을 문자 그대로 믿지 않습니다. 윤회할 주체인 “나”라는 게 일단 본질적 의미에 존재하지 않으며, “나”라는, 인간의 뇌가 만들어내는 인식이 죽… 더보기

히말라야의 그림자 빅풋과 예티는 존재하는가

댓글 0 | 조회 168 | 2026.03.11
어느 겨울밤, 히말라야의 깊은 산속에서 바람이 눈 위를 스쳐 지나간다. 그때 누군가 발자국을 발견한다. 사람의 것보다 훨씬 크고, 그러나 분명 두 발로 걸어간 흔… 더보기

나만의 등불 밝혀 내 마음 찾는 여정

댓글 0 | 조회 141 | 2026.03.11
강진 무위사의 ‘보름달 명상 템플스테이’어둠이 존재함으로 우리는 비로소 빛을 만난다. 추석 보름을 앞두고 차오르던 달빛도 구름에 모습을 감춘 날, 가로등조차 없는… 더보기

뉴질랜드 부동산 등기부등본 (Certificate of Title)은 공신력이 …

댓글 0 | 조회 723 | 2026.03.11
한동안 한국에서는 대규모 전세사기로 인해 뉴스가 떠뜰썩 했었지요. 그것과 관련해서, 혹은 집 구매와 관련하여 사기를 당한 뉴스에서도, ‘한국의 부동산 등기부등본은… 더보기

준다는 것

댓글 0 | 조회 170 | 2026.03.11
시인 안 도현이 지상에서 우리가 가진 것이빈손밖에 없다 할지라도우리가 서로 바라보는 동안은나 무엇 하나부러운 것이 없습니다그대 손등 위에 처음으로떨리는 내 손을 … 더보기

뉴질랜드•호주 의대 입시, 구조적 변화의 흐름

댓글 0 | 조회 340 | 2026.03.11
▲ 이미지 출처: Google Gemini AI안녕하세요? 뉴질랜드, 호주 의치약대 유학, 입시 및 중고등학교 내신관리 전문 컨설턴트 크리스틴입니다. 뉴질랜드에서… 더보기

24. 와이아타푸 – 네이피어 바다에 잠든 정령

댓글 0 | 조회 145 | 2026.03.11
* 바다가 노래하던 시절아주 오래전, 지금의 네이피어 해안은 하늘과 바다가 맞닿는 신성한 울림의 장소로 여겨졌다. 그곳에는 사람의 귀로는 들을 수 없지만, 마음으… 더보기

결격 사유를 '면제'로 바꾸는 기록의 재해석 - Waiver

댓글 0 | 조회 370 | 2026.03.10
뉴질랜드에 오래 머물기를 원한다면, 건강 상태와 신원에 대한 확인은 이민 심사의 기본 요건입니다. 대체로 1년을 넘는 체류를 계획하는 경우에는 신체검사가 요청되는… 더보기

그 해 여름

댓글 0 | 조회 173 | 2026.03.10
오래 전 한국에서의 어느 봄, 나는 야트막한 언덕에 집을 짓고 있었다. 그 땐 꽤 외진 곳으로 주변엔 박석처럼 인분이 말라붙어 있는 시금치 밭과, 여러 종류의 채… 더보기

5편 – MK-울트라의 아이들

댓글 0 | 조회 203 | 2026.03.10
“지워진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새로운 주인을 기다릴 뿐이다.”프롤로그 - 2030년 3월 1일, 네바다 사막 ‘구(舊) 블랙사이트’모래폭풍이 지나가자 … 더보기

SMC 문턱이 나를 위해 낮아지나?

댓글 0 | 조회 616 | 2026.03.10
(부제 : 8월, 신규 영주권 카테고리 도입과 중간시급 완화 대환영)뉴질랜드 이민부는 지난해부터 드문드문 소식을 전하면서 2026년 8월 시행될 SMC기술이민에 … 더보기

오늘 해야 할 일

댓글 0 | 조회 272 | 2026.03.10
갈보리십자가교회 김성국점심은 누룽지 섞인 쌀 밥에찬물 말아 오이지 한 조각씩밥 숟가락에 얹어 먹을 수 있기를아내 손끝으로잘 펴서 널어놓은 청바지 걷어 입고햇볕에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