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 심은데 콩 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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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 심은데 콩 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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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 숙자


미명(未明)이다. 가만히 뜨락을 내려 밭으로 나선다. 우리집 과수원은 뽀얀 안개 숲을 헤엄쳐 나오느라 수런수런하고 있다. 가슴을 펴고 폐부 깊숙이 싱그러운 공기를 마신다. 달콤하고 풋풋하다. 생기가 온몸으로 퍼진다.


줄지어 서있는 파수병들, 20년생 사과나무들이 밤톨만한 열매를 달고 늠름하다. 자세히 살펴 보면 어느 한 나무 성한 것이 없이 상처 투성이다. 요 근래에 부쩍 심해진 부란병으로 팔뚝을 잘리고 허리가 끊어지고 어깨 살이 허옇게 드러났으면서도 상처 속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튼실하게 자라고 있다.


건너편 고추 밭에 벌써부터 풀 뽑는 사람들이 나와 있다. 이제는 농촌 여자들은 농촌의 주역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논일 밭일 가사에 겹쳐 산후(産後)에도 곧바로 일을 나서야 하기 때문에 각종 질병에 시달리면서도 병원문을 두드릴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없다. 이런 이웃들과 함께 살면서 여권(女權)이니 평등이니 하는 말 한마디 들어보지 못함은 그네들이 못나서 일까.


벌써 한 달이 넘도록 계속되는 가뭄 탓에 지금쯤이면 넌출넌출 해야 할 옥수수 이파리가 노랗게 말라가더니 이제는 잎을 돌돌 말아 올리며 목이 탄다. 토마토는 처음에는 생육이 좋아서 엄마 젖꼭지 만큼씩 맺힌 게 보름이 넘는데 크지를 못하고 노상 고시늉이다.


안타깝다. 요새는 밥을 먹어도 목에 넘어 가지가 않는다. 다만 이 가뭄 속에 시들시들한 덩굴사이 오이 몇 개씩 자란 것을 보니 가슴이 뭉클하다. 얼마나 힘겨운 투쟁이었을까. 오이 덩굴을 보고 있으면 자식들 뒷 바라지에 주름만 깊어진 촌로(村老)들이 생각난다.


배실배실 말라가며 그래도 생명 하나는 부둥켜 안고 놓지 않는 삶이 근질긴 의욕을 가뭄 타는 작물을 통해 바라보며 인간들의 나약한 의지가 부끄러워진다. 내가 유난스레 정이 헤픈 것은 이런 연유에서이다. 내 손끝에 만져지는 모든 것이 생명이 있어 애정이 교류 되기 때문이다. 농사를 지어보면 콩 심은 데 콩 나는 원리원칙이 가장 많이 통하는 곳이 아직은 농촌인성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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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농민이 열심히 농사 지어 먹고 입고 자녀교육을 시키는 최소 한도의 생활보장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공무원이나 기업에서는 근무하는 횟수가 늘수록 봉급과 퇴직금이 늘어가는데 농민은 평생을 일해도 남는 것은 병들고 찌든 노후 뿐이다. 일년내내 고달프게 농사지어야 가을이면 농협 채무 갚기에 바쁘고 그러니 정든 농촌을 버리고 떠나는 사람들이 늘 수 밖에.


그들의 심정을 나는 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참아보자고 애소하고 싶다. 가파른 언덕이 있으면 골짜기가 있는 법, 하루 속히 농산물의 적정가가 이루어지고 복지 농촌이 이룩되어 노력한 만큼의 보람을 얻는 그런 날이 오기를 간절히 고대 한다.


텃밭에 채소를 파랗게 가꾸며 일년 내내 채소만 먹는 시골사람은 식물성이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하루 한 끼라도 육식을 못하면 금방 영양실조에 걸릴 것처럼 법석을 떠는 사람들에 비하면 안 죽고 살아남은 것만도 기적이다. 허지만 시골은 해를 먹고 산다. 빌딩 숲속에 잠깐 내려 앉는 창백한 햇빛이 아니라 거칠 것 없이 중천에 떠서 온종일 빛나는 빛의 축복 바로 그그것이다.



무량으로 대어주는 신선한 공기, 눈 두는 곳마다 푸른 초원, 작은 풀꽃을 보고 겸허의 덕을 배우며 감사하며 사는 나는 분명 행복한 촌부(村婦)다. 비록 가진 것은 없어도 마음만은 항상 주고 싶은 빈자(貧者)의 포만감, 얼마나 소중한 은혜인가. 또한 온종일 들에서 시달려 눈뜰 기력조차 없어도 아름다운 농촌의 밤이 있기에 다시 소생하는 것이다. 전등을 끄고 유리창을 열어 젖히고 삼베 홑이불을 덮고 누우면 머리맡으로 쏟아져 내리는 맑은 별 빛, 아름답다.


먼데서 은밀한 계시가 있을 법한 밤이다. 방충망에 걸리지도 않고 속살까지 흔들어 씻는 상쾌한 바람, 무던히 착해지고 싶고 수없이 용서하고 싶고 여기 뿌리내린 어느 것 하나도 열렬히 사랑하고 싶은 이 밤은 내 영혼이 하늘나무 되어 이슬을 맞는 평화와 안식의 밤이다.


풍요의 결실을 가득 안고 성큼성큼 다가서는 가을의 발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것이 감사 뿐인 촌부의 나날이다.

 

- 출처 <서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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