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칼럼 | 지난칼럼 |
지난 칼럼에서도 언급했듯 나는 뉴질랜드에서의 학교생활을 참 좋아했다. 물론 초반에는 누가 말만 시키면 “pardon?”만 백만 번 외쳐야 했던 언어의 장벽이나 하루종일 달려야 하는 크로스컨트리 때문에 고생도 했지만, 그래도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을 꼽으라고 하면 주저없이 뉴질랜드에서 학교를 다녔던 시절을 꼽을 것이다.
하지만 난 뉴질랜드에서 대학을 미처 마치지 못한 상황에서 한국행을 택해야 했다. 한국으로 온 뒤, 부모님의 반대 때문이기도 했지만 나 역시 한국 생활에 적응하느라 시간이 어찌 흐르는지도 모른 채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했고, 사회생활을 시작해 돈을 버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깨달을 때쯤 뉴질랜드로 휴가를 갈 수 있는 돈과 시간적인 여유가 생겼다. 20대 초반에 떠나온 뉴질랜드를 20대 후반이 돼서야 다시 돌아간 것이다. 내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뉴질랜드는 딱 내가 그리워했던 그대로였다. 내가 다녔던 학교도, 내가 자주 갔던 미션베이의 카페도, 도서관도 내 기억 속 그대로여서 너무 다행이었고 좋았다. 그런데 사회인이 된 내 눈에 새롭게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학생의 신분으로 뉴질랜드에서 살 때에는 마냥 행복해서 미처 살피지 못했던 것, 바로 웃음기 없는 한국 어른들의 표정이었다. 한국 학생들은 내가 그 나이 때 그랬듯 잘 웃고, 밝고,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그 학생들의 부모님들 표정은 달랐다. 조금은 지쳐 보이는 모습이었다.
‘난 뉴질랜드 생활이 마냥 좋기만 했는데, 엄마, 아버지는 뉴질랜드 생활이 힘드셨겠구나.’
사실 생각해보면 뉴질랜드에 계신 어른들의 삶은 고단할 수밖에 없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과목을 전공했고, 내가 일하고 싶은 분야에서 일하는데도 가끔은 너무 힘이 드는데 우리 부모님을 포함해 현재 뉴질랜드에 계신 많은 부모님들은 스스로의 행복보다는 자식들을 위해 택한 나라에서, 먹고 사는 문제를 책임져야 하니 얼마나 힘들고 고단하실까. 직업 선택에 있어서도 적지 않은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한국에서 하셨던 일을 계속 뉴질랜드에서도 이어서 하고 계신 분이 과연 몇 분이나 계실까. 낯선 땅에서 동양인 할 수 있는 일은 매우 제한적이다. 홈스테이, 가디언, 장사, 재봉일, 배관작업, 공사, 잔디깎는일 정도가 아닐까?
우리 부모님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국에서 피아노 선생님이라는 타이틀로 오래 생활하며 화려한 피아노 발표회도 제법 여러 차례 개최했던 엄마와 궂은일이라고는 해본 적 없는 소위 화이트칼라 직종에서 종사했던 아버지 역시 자식 교육 하나 위해 뉴질랜드에 와서 새벽 5시에 오픈하는 카페를 운영하셨다. 그때는 미처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 아버지의 표정에도 웃음기는 없었던 것 같다.
매년 엄마, 아버지와 뉴질랜드로 휴가를 가면 내가 부모님께 항상 하는 말이 있다.
“아빠, 엄마 참 열심히 살았어. 난 아빠, 엄마가 내 학창시절을 뉴질랜드에서 보내게 해줘서 너무 좋고 항상 감사해. 나중에 내 자식한테도 꼭 그건 해주고 싶어.”
내가 매년 뉴질랜드로 휴가를 가는 이유는 뉴질랜드가 그리워서이기도 하지만 갈 때마다 늘 새로운 것, 뉴질랜드에 살때는 놓치고 살았던 것들을 발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현재 자식들을 위해 뉴질랜드에 계신 많은 부모님들이 이것은 꼭 아셨으면 좋겠다. 부모님들 덕분에 자식들은 살면서 좋을 때나 힘들 때나 두고두고 꺼내 볼 수 있는 행복한 기억을 만들어 주고 계시다는 것을. 그리고 자식들은 살아가면서 큰 행복과 감사를 느낄 것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