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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 보이지 않는 들판이 연둣빛으로 번져 온다. 여기 저기서 논 갈고 밭가는 경운기 소리가 활기차게 들린다. 일철이 온 것이다. 아침부터 뽑는 풀이 겨우 한 이랑이다. 이것도 일일까만 흙내를 맡으니 생기가 난다. 털퍼덕 주저앉아 뽑다가 쉬고, 쉬다가 뽑는 잡초들, 그 사이로 미풍이 손사래를 친다.
지난 일요일에 서울에서 내려왔다. 지구의 온난화 현상으로 한동안 봄 더위가 와서 철 이른 반팔 옷을 입게도 하더니 평년 기온을 되찾자 중국대륙에서 황사가 불어 왔다. 눈이 뻑뻑했다.
닦고 보아도 침침하고 감고 있어도 뻐근했다. 병원은 감기 환자로 연일 만원이고 한번 걸리면 한 두달을 앓아야 낫는 감기를 나도 줄창 달고 살았다. 꽃철이라고는 하나 아직은 일교차가 심해서 산골짜기 시골집에서 지내기가 불편하지만 맑은 공기, 푸른 하늘을 믿고 내려온 것이다.
농촌에서는 일손이 바빠지고 있다. 비닐 온상에서 고추모가 자라고 수도전에는 볍씨를 물에 담가 놓았다. 담배를 심고 마늘밭을 매는 집도 있다. 우리도 어제는 감자 씨를 놓고 장에 가서 밤나무 묘목을 사다 심었다. 우루과이라운드가 어떻고 북한 핵이 어떻고 심지어는 불바다가 유행어가 되어도 씨 뿌리는 사람들은 씨를 뿌리고 아기를 낳고 해는 떠오른다.
밭에는 냉이, 빌금다지, 엉겅퀴, 쑥들이 부산하게 돋아난다. 지칭개는 너름새 좋게, 달래와 씀바귀도 지천이다. 풀을 뽑으며 나물을 가려 놓는다.
아직은 꽃에 피지 않은 잡초 속에 잔잔하게 흔들리는 노란빛이 있다. 있는 듯 마는 듯 싶게 여리디 여린 것들이 땅에 붙어서 꽃대를 밀어 올린다. 꽃다지 꽃이다. 바람결에 따라 쓰러질 듯 흔들리다 바로 서는 천진스러운 얼굴들. 호미를 놓고 바라본다. 이쁘지도 않은 것이 어째서 가슴을 흔드는가. 풀꽃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강물 같은 평화가 넘친다. 서울이라는 대하에서 부초처럼 부유하던 내가 양지 한 뼘 얻어서 내려앉은 기분이랄까.
내친김에 밭고랑에 엎드려 본다. 딴 세상이다. 위에서 내려다보던 꽃은 미미하고 자잘하다고 느꼈는데 엎드려 보는 꽃들은 의젓하고 출중하다. 그래, 사람이 땅처럼 겸손하다면 세상 모두가 은혜를 베풀고 있음을 알겠구나.
세상에는 크지 않아도 아름다운 삶이 있고, 힘세지 않아도 지혜로운 사람들이 이으며 연약해도 착한 일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크고 화려한 것만, 잘나고 높은 것만 찾아 헤매니 고달플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나는 지금 이쁘진 않지만 사랑스럽기 짝이 없는 풀꽃 속에서 새로운 우주가 열리고 있음을 보고 있다.
출처: 반숙자 수필선 <<이쁘지도 않은 것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