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헝그리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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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헝그리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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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개 1,949 이정현

최근 무심코 켜놓은 TV에서 배우 서우림 씨가 인터뷰하는 것을 보게 됐다. 퇴근 후 그저 습관처럼 켜놓고 집중해서 보지도 않는 TV에 왜 그날따라 눈길이 갔는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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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우림 씨의 인터뷰 내용은 이랬다. 미국에서 오래 살다 한국으로 돌아온 서우림 씨의 아들이 한국 직장생활에 적응을 못하고 힘들어하다가 결국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것. 직장에 입사해도 적응하는 데 힘들어서 이직하고, 또 이직하고, 결국은 어느 날 모든 걸 포기하고 떠났다는 내용이었다. 너무 안타까웠다. 나도 한국 생활을 하면서 어렵다고 느꼈던 부분이 바로 한국 직장 내 조직문화다. 


한국의 조직문화는 이해 안 되는 부분이 많은 게 사실이다. 영어학원과 같이 직원들의 모든 호칭이 “선생님”으로 통일되는 곳은 그나마 좀 낫지만 “회장님, 대표님, 사장님, 전무님, 이사님, 팀장님, 실장님, 차장님, 과장님, 대리님”과 같이 직급이 분명한 직장에는 수직적 상하관계가 존재한다. 그리고 모든 문제는 바로 이 상하관계에서 발생한다. 그 어떤 나라보다 심한 상명하복(上命下服)의 군대식의 문화. 속칭 말하는 “까라면 까”는 그냥 우스갯소리가 아니었다. 내 업무가 끝났다 해도 상사가 퇴근을 안 했으면 난 자리를 지켜야 한다. 그냥 자리만 지키는 게 다가 아니다. 자리를 지키면서 상사의 업무도 도와야 하고, 때로는 상사의 커피도 타주며 예의상 “피곤하시죠?”라는 말을 건네는 것이 ‘야근의 정석’이다. 직장생활 초반에 내가 이런 것을 알았을 리 없지 않은가. 아무도 나한테는 말해주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신입사원들은 다들 이런 것을 어디서 배우는 건지 궁금하기도 하다. 한국 대학에서는 이런 것도 가르치나? 아니면 교과서에 상사가 퇴근하기 전엔 퇴근할 생각도 하지 말라고 써있는 걸까? 나는 당연히 내 업무가 끝나고 퇴근 시간이 되면 너무도 당당히 짐을 챙겨서 1등으로 퇴근했고, 주변에서 동료들이 “정현 씨는 참 용감하네” “승진 욕심 없나봐?” “어쩌려고 그래?” 라는 말을 종종 들었으나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결국 나는 상사의 호출을 받았다. 그때까지도 뭐가 잘못된 건지 영문을 몰랐고, 그랬기에 더더욱 “정현 씨는 가만 보면 헝그리 정신이 부족한 거 같아”라고 돌려 말한 상사의 말에 너무도 해맑게 “저는 헝그리하지 않은데요?!”라고 답할 수 있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상황이었다. 


나는 여전히 한국 직장에 팽배한 헝그리 정신이 조금 불편하다. 늘 굶주린 듯이 살아야 잘 사는 것처럼 인식된 한국 사회도 불편했지만, 남들보다 더 일찍 출근하고 더 늦게 퇴근하는 것이 직장인이 마땅히 갖춰야할 헝그리 정신이라고 치부하는 것이 더 불편했다. 야근은 미덕이 아니라 제시간에 제 일을 끝내지 못한 무능함이 맞다. 대체 업무시간에 무엇을 했길래 밤 10~11시가 되도록 자기 업무 하나 끝내지 못했을까. 결국 상사는 또다시 나를 불러 로마에 왔으면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는 말로 나를 설득시키려고 했지만 “저는 그럼 로마에서 안 살래요” 라는 말을 끝으로 퇴사했다. 그 이후 구직 면접에서는 아예 처음부터 나는 야근을 하고 싶지 않으니 야근이 필수라면 날 채용하지 말라고 말했다. 이것이 한국 조직 생활을 하며 내가 선택한 방식이다. 익숙지 않은 한국 조직문화에 어설프게 맞추며 겉도는 사회생활을 할 바에야 그냥 처음부터 “꼴통” “돌아이” “괴짜” 등의 낙인이 찍힌채 내 소신대로 직장생활을 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대부분의 직장 내에서 워라벨(‘일과 삶의 균형’ 이라는 의미인 ‘Work-life Balance’의 준말) 문화가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야근을 강요하는 회사 문화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 추세다. 아울러 많은 기업이 수평적 조직문화를 위해 전통적인 호칭인 “사장님, 상무님, 팀장님” 등의 호칭을 버리고 회사 직급에 상관없이 ‘님’ 이나 ‘매니저’ 라고 부르는 호칭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배우 서우림 씨의 아들 이야기가 더 안타깝게 다가왔던 이유도 이런 긍정적인 변화의 바람 때문이다. 한국 조직문화에 무조건 적응하려던 노력 대신, 그냥 “배째!” 식으로 버티며 시간이 흘러가기를 기다렸다면 어땠을까. 물론 한국에 깊이 뿌리박힌 수직적인 기업 문화가 완전히 사라지려면 아직도 갈 길이 멀지만, 그래도 우리 같은 한국인도 아니면서 외국인도 아닌 사람(?)이 좀 더 수월하게 숨 쉬며 직장 생활을 할 수 있는 환경이 돼 가는 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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