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으로서의 사랑

연재칼럼 지난칼럼
오소영
한일수
오클랜드 문학회
박명윤
수선재
천미란
성태용
명사칼럼
조기조
김성국
템플스테이
최성길
김도형
강승민
크리스틴 강
정동희
마이클 킴
에이다
골프&인생
이경자
Kevin Kim
정윤성
웬트워스
조성현
전정훈
Mystery
새움터
멜리사 리
휴람
김준
박기태
Timothy Cho
독자기고

‘사건’으로서의 사랑

0 개 1,625 명사칼럼

인천의 한 마트에서 사건이 일어났다. 34세 아버지와 12세 아들이 마트에서 물건을 훔치다 적발됐다. 그들이 훔친 것은 우유 2팩과 사과 6개, 그리고 몇 개의 마실 것, 현금으로 환산하면 1만원 내외의 먹을 것들이었다. 

 

경찰이 출동했고 아버지는 벌벌 떨고 땀을 흘리며 ‘배가 고파서’ 이런 일을 저질렀다며 잘못을 빌었다. 경찰이 사정을 물으니 이들은 벌써 두 끼를 굶었고, 아빠는 기초생활수급자였으며 당뇨와 갑상선 질환이 심해져 6개월째 일을 그만둔 상태였다고 했다. 이들은 임대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집에는 홀어머니와 7세의 어린 아들이 있었다.

 

진짜 ‘사건’은 이제부터 일어난다. 먼저, 마트 주인은 처벌을 원하기는커녕 앞으로 이들에게 쌀과 생필품을 공급하겠다고 했다. 경찰은 이들을 훈방 조치하기로 했다. 아버지에게는 행정복지센터에 연락해 일자리를 찾아주기로 했으며, 아들에게는 무료급식카드를 발급하기로 했다. 경찰은 “요즘 세상에 밥 굶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라고 울먹이며 이들에게 따뜻한 국밥을 사줬다.

 

바로 그때 회색 옷차림의 어떤 사람이 들어와 아무 말 없이 부자에게 흰 봉투를 내놓고 나갔다. 아들이 황급히 쫓아나갔으나 이 사람은 손사래를 치며 사라졌다. 그 봉투에는 현금 20만원이 들어 있었다. 그 사람은 마트에서 우연히 이 장면을 목격하고 현금을 인출한 후 경찰과 이들이 있던 식당을 다시 찾아와 그것을 건네고 간 것이었다. 경찰은 이 사람에게 감사장을 수여하기 위해 수소문을 했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존재와 사건』의 저자인 알랭 바디유는 ‘사건(event)’을 잠재적인 것, 아직 실현되지 않은 것을 드러내는 것이라 정의한다. 그것은 ‘반복되는 현재’ 와의 근본적인 ‘결별’이며 “존재의 강밀도(强密度)를 실제로 변화시키는 것” 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지금 불공정과 불공평이 ‘반복되는 현재’에 살고 있다. 일반 시민들에게 있어서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법칙은 ‘객관적 사실’이자 관행으로 여겨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라면 10개를 훔치고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받는가 하면, 70억원대의 횡령•배임으로 기소된 어떤 대기업 회장의 아들은 징역 3년을 선고받는다. LSD 등 마약을 대량 밀반입하다가 적발된 전 국회의원의 자식은 불구속 처리되고, 구속된 재벌 회장들이 얼마 지나지도 않아 마스크를 쓰고 휠체어에 앉아 유유히 풀려나는 모습은 얼마나 익숙한 풍경인가. 반란수괴죄로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전직 대통령이 며칠 전, 하필 반란 40주년이 되는 날에 반란의 측근들, 종교계의 원로와 1인당 20만원짜리 회식을 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는 수중에 29만원밖에 없다며 아직도 1000억원이 넘는 추징금을 갚지 않고 있다.

 

이제 우리 사회는 정직이나 사랑이 ‘사건’인 ‘희한한’ 시대에 살고 있다. 앞에 예로 든 일이 바디유적 의미의 ‘사건’일 수 있는 것은,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사악한 관습과 전혀 다른 방향의 ‘놀라운’ 일이, 게다가 집단적인 조합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사건’은 수많은 주체에게 선한 영향을 끼친다. 바디유가 ‘사건’을 “존재의 강밀도를 실제로 변화시키는 것” 이라고 정의한 것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사건’은 주체를 변화시키며,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진리를 구현한다. 이 과정을 바디유는 “진리 절차”라고 부른다. 바이유가 볼 때 진리 절차는 크게 네 가지 조건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예술•사랑•과학, 그리고 정치다. 그 중에서도 사랑은 바디유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진리 절차의 조건이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이름의 모든 행위가 다 ‘사건’은 아니다. 바디유는 사랑을 두 종류로 나눈다. 그 중 하나는 ‘위기(위험)’나 손실을 스스로 감수하는 사랑이며, 다른 하나는 ‘위기 관리’ 차원의 사랑이다. 후자는 그 흔해 빠진 ‘러브’ 일지는 모르나 ‘사건’은 아니며, ‘비즈니스’다. 그것은 위기나 손해를 절대적으로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에서 보여준 ‘사건’으로서의 사랑의 주인공들은 (위기까지는 아닐지라도) 손실을 스스로 감행한다. 자기 주머니를 털어 가난한 부자에게 따뜻한 국밥을 사주는 경찰, 신분을 밝히지 않으며 현금을 건넨 행인, 처벌은커녕 생필품을 대주겠다는 마트의 주인은 ‘사건’의 주체들이고, 새로운 진리를 만드는 사람들이며, 이미 그 진리 절차에 돌입한 주체들이다. 누가 뭐래도 사랑이 진리다. 모든 예술과 과학과 정치는 사랑에 복종해야 한다.

* [출처: 중앙일보]

 

=========

■ 오 민석 시인·단국대 영문과 교수 


충남 공주 출생.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이며 현재 단국대학교 영미인문학과 교수로 문학 이론, 현대사상, 대중문화론 등을 가르치고 있다. 1990년 월간 <<한길문학>> 창간기념 신인상에 시가 당선되어 시인으로 등단하였으며,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이 당선되며 평론활동을 시작하였다. 

시집 <<굿모닝, 에브리원>>,  <<그리운 명륜여인숙>>,  <<기차는 오늘밤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다>>,   문학이론서 <<현대문학이론의 길잡이>>, <<정치적 비평의 미래를 위하여>>, 문학연구서 <<저항의 방식:캐나다 현대 원주민 문학의 지평>>, 대중문학 연구서 송해 평전 <<나는 딴따라다>>, <<밥 딜런, 그의 나라에는 누가 사는가>>, 시 해설 서 <<아침 시:나를 깨우는 매일 오 분>>, 산문집 <<경계에서의 글쓰기>>, <<개기는 인생도 괜찮다>>, 번역서 바스코 포파 시집 <<절름발이 늑대에게 경의를>> 등을 냈다. <단국문학상>, <부석 평론상> 등을 수상하였다.

 

857b4af401b1e0388db981035e908a50_1580165297_0239.jpg
 

심전도(心電圖) 검사

댓글 0 | 조회 210 | 1일전
최근 어느 모임에서 만난 지인이 부정맥(不整脈)이 있어 심전도(心電圖) 검사를 받았다고 말했다. 고령사회로 접어들면서 심혈관 질환이 증가하고 있으므로 고령자는 정… 더보기

가족 및 자원 봉사 간병인을 위한 정부 실행 계획

댓글 0 | 조회 569 | 9일전
Consultation on Action Plan to Support Carers 사회개발부(Ministry of Social Development, MSD)는 … 더보기

타마키 마카우라우 경찰 소수민족 서비스팀 수상 안전 실시

댓글 0 | 조회 304 | 10일전
지난 11월 22일, 타마키 마카우라우 경찰 소수민족 서비스팀은 피하의 바넷 홀에서 소수민족 공동체 지도자들과 함께 수상 안전 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번 세미나에서… 더보기

위험한 감정의 계절: 도박과 멘탈헬스 이야기

댓글 0 | 조회 192 | 2025.12.10
12월은 흔히 ‘축제의 달’로 불린다. 거리의 불빛은 화려하고, 사람들은 마치 잠시 현실을 잊은 듯 들뜬 기운을 뿜어낸다. 그러나 그 화려한 분위기 뒤에는 또 다… 더보기

에델바이스(Edelweiss)의 추억

댓글 0 | 조회 204 | 2025.12.10
음악은 개인적, 사회적 차원에서 감정 표현, 미적 즐거움, 소통, 그리고 심리적 및 신체적 치유 등 다양한 기능을 발휘한다. 또한 집단 정체성 확립, 사회통합, … 더보기

18. 루아페후의 고독한 지혜

댓글 0 | 조회 144 | 2025.12.10
# 산 속의 침묵루아페후 산은 뉴질랜드 북섬에서 가장 높은 화산이다. 높고 험하며 사계절 내내 눈이 덮인 이 산은 항상 침묵 속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모… 더보기

뉴질랜드 학생들이 국내 대학과 해외 대학 중 어느 곳에서 공부하는 것이 더 비용 …

댓글 0 | 조회 532 | 2025.12.10
비용 효율성과 미래 발전에 대한 종합적인 비교 - 2지난호에 이어서 계속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3. 영국 및 미국 대학 유학하버드 대학교미국과 영국은 뉴질랜드 유… 더보기

그 해 여름은

댓글 0 | 조회 142 | 2025.12.10
터키의 국기처럼 큰 별 하나를 옆에 둔 상현달이 초저녁 하늘에 떠 있고, 검푸른 하늘엔 뱃전에 부딪혀 흩어지는 하얀 포말처럼 은하수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 그… 더보기

어둠은 자세히 봐도 역시 어둡다

댓글 0 | 조회 137 | 2025.12.10
시인 오 규원1어둠이 내 코 앞, 내 귀 앞, 내 눈 앞에 있다어둠은 역시 자세히 봐도 어둡다 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말장난이라고 나를 욕한다그러나 어둠은 자세히 … 더보기

아주 오래된 공동체

댓글 0 | 조회 177 | 2025.12.10
처서가 지나면 물에 들어가지 말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올해는 처서가 지났는데도 더위는 꺾이지 않고 도심과 해안을 중심으로 열대야 현상이 계속되었다. ‘습식 사우… 더보기

이삿짐을 싸며

댓글 0 | 조회 573 | 2025.12.09
갈보리십자가교회 김성국하루에 조금씩만이삿짐을 꾸렸습니다그래야 헤어짐이늦게 올 것 같았습니다차곡차곡 넣고구석구석 채웠습니다그래야 천천히 올 것 같았습니다짐 드러낸 … 더보기

뉴질랜드 학생에게 독서가 특별히 중요한 이유

댓글 0 | 조회 534 | 2025.12.09
우리는 뉴질랜드라는 다문화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아이들은 영어로 배우고 말하고 평가받지만, 단순한 영어 실력만으로는 뉴질랜드 교육에서 깊이 있는 성취를 보… 더보기

깔끔하게 요약해 본 파트너쉽 비자

댓글 0 | 조회 343 | 2025.12.09
뉴질랜드에서 배우자 또는 파트너로 체류하는 방법은 크게 2가지가 있습니다. 사실혼(파트너쉽) 관계를 바탕으로 하여 신청할 수 있는 영주권 비자와 비영주권 비자가 … 더보기

2026 의대 진학을 위한 연말 전략: 지금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댓글 0 | 조회 235 | 2025.12.09
▲ 이미지 출처: Google Gemini안녕하세요? 뉴질랜드, 호주 의치약대 입시 및 고등학교 내신관리 전문 컨설턴트 크리스틴입니다. 2026년 뉴질랜드 및 호… 더보기

시큰둥 심드렁

댓글 0 | 조회 111 | 2025.12.09
어떤 사람이 SNS에 적은 글에 뜨끔한 적이 있었다. “눈팅만 말고 ‘좋아요’ 좀 누르면 안 되나요?” 마치 눈팅만 했던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발이 저려서… 더보기

언론가처분, 신상 정보 공개 금지 및 국민들의 알 권리

댓글 0 | 조회 228 | 2025.12.09
지난 9월 8월, 본인의 자녀들을 수년간 납치해서 숨어 살았던 톰 필립스 (Tom Phillips)가 경찰에 발견되었고 결국 총격전 끝에 사망했습니다. 그 소식 … 더보기

고대 수메르 문명은 왜 사라졌는가

댓글 0 | 조회 149 | 2025.12.09
메소포타미아 사막 위로 붉은 해가 떠오를 때면, 거친 바람은 먼지를 일으키며 과거의 귓속말을 실어 나른다. 그 속삭임은 무너진 벽돌과 부서진 신전 기둥 사이를 스… 더보기

스코어카드와 인생의 기록 – 결과보다 중요한 것은 과정

댓글 0 | 조회 116 | 2025.12.09
골프를 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스코어카드를 손에 쥐고 라운드를 시작한다. 한 홀 한 홀마다 몇 타에 공을 넣었는지를 적어 내려가며, 18홀을 돌고 나면 총합이 자… 더보기

나도 의대 들어갈 수 있을까 : 의대 경쟁률 10:1 그 진실은?

댓글 0 | 조회 319 | 2025.12.07
출처: https://www.istockphoto.com/kr/%EC%9D%BC%EB%9F%AC%EC%8A%A4%ED%8A% B8/%EC%9D%98%EA%B3%B… 더보기

‘인공 방광’이란

댓글 0 | 조회 289 | 2025.12.06
국민보험공단이 발표한 ‘2024 지역별 의료 이용 통계 연보’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병원에서 진료받은 6대 주요 암 환자 중 유방암 환자가 인구 10만명당 52… 더보기

수공하는 법

댓글 0 | 조회 167 | 2025.12.06
수공(收功)은 기운을 거두어들이는 동작으로서, 명상을 하면서 자신의 주변에 형성된 기운을 거두어 단전으로 끌어내리는 것이다.명상 중 급한 용무로 명상을 멈추어야 … 더보기

AI 시대의 독서: 넘쳐나는 정보 속에서 독서가 필요한 이유

댓글 0 | 조회 624 | 2025.12.01
공자는 논어 첫 문장에서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고 했다. 배움 자체가 인생의 의미가 되던 시대의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더보기

AI 시대의 새로운 교육 방향: AI와 함께 생각하는 힘

댓글 0 | 조회 562 | 2025.11.28
기술의 발전은 언제나 교육의 변화를 이끌어 왔다. 그러나 인공지능(AI)의 등장은 그 속도와 영향력에서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전환점을 만들어 내고 있… 더보기

무료 유방암 검진 연령 확대

댓글 0 | 조회 334 | 2025.11.26
무료 유방암 검진 연령이 74세까지 전면 확대된다.

에이전시 (대리인) 관련 법

댓글 0 | 조회 231 | 2025.11.26
우리는 어려서부터 누군가를 ‘대신’ 해주는 걸 자연스럽게 배우면서 자랍니다. 친구가 멀리 던진 공으로부터 내가 더 가까우면 친구 대신 공을 주워서 던져주기도 하는…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