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으로서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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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으로서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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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한 마트에서 사건이 일어났다. 34세 아버지와 12세 아들이 마트에서 물건을 훔치다 적발됐다. 그들이 훔친 것은 우유 2팩과 사과 6개, 그리고 몇 개의 마실 것, 현금으로 환산하면 1만원 내외의 먹을 것들이었다. 

 

경찰이 출동했고 아버지는 벌벌 떨고 땀을 흘리며 ‘배가 고파서’ 이런 일을 저질렀다며 잘못을 빌었다. 경찰이 사정을 물으니 이들은 벌써 두 끼를 굶었고, 아빠는 기초생활수급자였으며 당뇨와 갑상선 질환이 심해져 6개월째 일을 그만둔 상태였다고 했다. 이들은 임대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집에는 홀어머니와 7세의 어린 아들이 있었다.

 

진짜 ‘사건’은 이제부터 일어난다. 먼저, 마트 주인은 처벌을 원하기는커녕 앞으로 이들에게 쌀과 생필품을 공급하겠다고 했다. 경찰은 이들을 훈방 조치하기로 했다. 아버지에게는 행정복지센터에 연락해 일자리를 찾아주기로 했으며, 아들에게는 무료급식카드를 발급하기로 했다. 경찰은 “요즘 세상에 밥 굶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라고 울먹이며 이들에게 따뜻한 국밥을 사줬다.

 

바로 그때 회색 옷차림의 어떤 사람이 들어와 아무 말 없이 부자에게 흰 봉투를 내놓고 나갔다. 아들이 황급히 쫓아나갔으나 이 사람은 손사래를 치며 사라졌다. 그 봉투에는 현금 20만원이 들어 있었다. 그 사람은 마트에서 우연히 이 장면을 목격하고 현금을 인출한 후 경찰과 이들이 있던 식당을 다시 찾아와 그것을 건네고 간 것이었다. 경찰은 이 사람에게 감사장을 수여하기 위해 수소문을 했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존재와 사건』의 저자인 알랭 바디유는 ‘사건(event)’을 잠재적인 것, 아직 실현되지 않은 것을 드러내는 것이라 정의한다. 그것은 ‘반복되는 현재’ 와의 근본적인 ‘결별’이며 “존재의 강밀도(强密度)를 실제로 변화시키는 것” 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지금 불공정과 불공평이 ‘반복되는 현재’에 살고 있다. 일반 시민들에게 있어서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법칙은 ‘객관적 사실’이자 관행으로 여겨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라면 10개를 훔치고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받는가 하면, 70억원대의 횡령•배임으로 기소된 어떤 대기업 회장의 아들은 징역 3년을 선고받는다. LSD 등 마약을 대량 밀반입하다가 적발된 전 국회의원의 자식은 불구속 처리되고, 구속된 재벌 회장들이 얼마 지나지도 않아 마스크를 쓰고 휠체어에 앉아 유유히 풀려나는 모습은 얼마나 익숙한 풍경인가. 반란수괴죄로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전직 대통령이 며칠 전, 하필 반란 40주년이 되는 날에 반란의 측근들, 종교계의 원로와 1인당 20만원짜리 회식을 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는 수중에 29만원밖에 없다며 아직도 1000억원이 넘는 추징금을 갚지 않고 있다.

 

이제 우리 사회는 정직이나 사랑이 ‘사건’인 ‘희한한’ 시대에 살고 있다. 앞에 예로 든 일이 바디유적 의미의 ‘사건’일 수 있는 것은,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사악한 관습과 전혀 다른 방향의 ‘놀라운’ 일이, 게다가 집단적인 조합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사건’은 수많은 주체에게 선한 영향을 끼친다. 바디유가 ‘사건’을 “존재의 강밀도를 실제로 변화시키는 것” 이라고 정의한 것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사건’은 주체를 변화시키며,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진리를 구현한다. 이 과정을 바디유는 “진리 절차”라고 부른다. 바이유가 볼 때 진리 절차는 크게 네 가지 조건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예술•사랑•과학, 그리고 정치다. 그 중에서도 사랑은 바디유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진리 절차의 조건이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이름의 모든 행위가 다 ‘사건’은 아니다. 바디유는 사랑을 두 종류로 나눈다. 그 중 하나는 ‘위기(위험)’나 손실을 스스로 감수하는 사랑이며, 다른 하나는 ‘위기 관리’ 차원의 사랑이다. 후자는 그 흔해 빠진 ‘러브’ 일지는 모르나 ‘사건’은 아니며, ‘비즈니스’다. 그것은 위기나 손해를 절대적으로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에서 보여준 ‘사건’으로서의 사랑의 주인공들은 (위기까지는 아닐지라도) 손실을 스스로 감행한다. 자기 주머니를 털어 가난한 부자에게 따뜻한 국밥을 사주는 경찰, 신분을 밝히지 않으며 현금을 건넨 행인, 처벌은커녕 생필품을 대주겠다는 마트의 주인은 ‘사건’의 주체들이고, 새로운 진리를 만드는 사람들이며, 이미 그 진리 절차에 돌입한 주체들이다. 누가 뭐래도 사랑이 진리다. 모든 예술과 과학과 정치는 사랑에 복종해야 한다.

* [출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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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 민석 시인·단국대 영문과 교수 


충남 공주 출생.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이며 현재 단국대학교 영미인문학과 교수로 문학 이론, 현대사상, 대중문화론 등을 가르치고 있다. 1990년 월간 <<한길문학>> 창간기념 신인상에 시가 당선되어 시인으로 등단하였으며,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이 당선되며 평론활동을 시작하였다. 

시집 <<굿모닝, 에브리원>>,  <<그리운 명륜여인숙>>,  <<기차는 오늘밤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다>>,   문학이론서 <<현대문학이론의 길잡이>>, <<정치적 비평의 미래를 위하여>>, 문학연구서 <<저항의 방식:캐나다 현대 원주민 문학의 지평>>, 대중문학 연구서 송해 평전 <<나는 딴따라다>>, <<밥 딜런, 그의 나라에는 누가 사는가>>, 시 해설 서 <<아침 시:나를 깨우는 매일 오 분>>, 산문집 <<경계에서의 글쓰기>>, <<개기는 인생도 괜찮다>>, 번역서 바스코 포파 시집 <<절름발이 늑대에게 경의를>> 등을 냈다. <단국문학상>, <부석 평론상> 등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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