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3] 일탈(逸脫)의 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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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3] 일탈(逸脫)의 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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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고 긴 여름 가뭄에 늦더위가 기승이더니 모처럼 귀한 비가 밤새 제법 많이 내린 어느 날이다. 메말랐던 세상이 한껏 물끼를 머금고 생동감으로 넘치는데 그쳤는가 했더니 아직도 낮게 내려 앉은 회색 하늘에선 잔뜩 물먹은 풍선이 터지듯 한바탕씩 쏟아 내리곤 한다.

  그 비때문에 철부지처럼 들떠 나섰던 밤줍기 나드리가 무산되고 시티까지 나온 발길이 갑자기 갈 곳을 잃은 나그네가 되어 허둥대었다. 허전하게 되돌아서는 순간 번개처럼 마음이 바뀐 것은 나드리 대신으로 마신 뜻밖의 미안(?) 커피 한 잔의 카페인이 장난을 친 짓이었을까?

  잠재웠던 역마살에 발동이 걸린 듯 나도 모르게 발길이 퀸스트리트를 내려가고 있는게 아닌가 브리토마트를 향하여......(그래 그걸 타 보는거야 오늘 하루 방황하는 짚시가 되어보자) 두, 세칸짜리 앙증맞은 기차가 지나가는 길목을 매일 건너 다니면서 그걸 한 번 타보고 싶다는 어린애 같은 장난끼를 꽤 오래 전부터 눌러 앉히곤 했었다.

  말이 안된다는 핑계보다 나이 무게에 짓눌려 혼자서는 엄두를 못 내고 겁쟁이로 움츠리며 살았던 게 사실이다.

  십 년 전만해도 배낭하나 걸머 쥐면 못 갈데 없이 잘도 쏘다녔는데...... 늘 같은 꼴에서 한 발짝쯤 옆으로 벗어나 보려는 것 뿐인데 참 별 생각이 다 드는구나 싶어 쓴 웃음을 흘린다.
시도 때도 없이 사람들을 무더기로 쏟아 내는 지하철역을 생각하니 브리토마토 플렛폼은 너무도 조용하고 한산해서 심심하기까지 하다. 마음 내키는 대로 행선지를 택해 차에 올랐다. 미지를 향해 먼 곳을 떠나는 들뜬 기분으로.... 산뜻하게 깔끔한 차안에 듬성듬성 대 여섯명이나 탔을까?

  편해서 좋음보다 미안한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은 인파에 부대끼며 살았던 때문이리라.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피부 까만 남자가 두툼한 '티켓 북'을 들고 다니며 요금을 받는 모양이다. 시니어 카드를 내보이니 회색빛 손가락만한 쪽지에 쿡 구멍을 찍어서 건네준다. 구간별 형태별로 칼라가 다른 모양이다.

  요즘같은 시대에 아직도 이런 구식방법이 남아 있다는게 너무나 신기하다. 옛날에 뚝섬 가려고 기동차 타던 생각이 떠오르고 한편 기차놀이 하는 애들 장난 같아 재미도 있다.  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마자 오늘 참 기특한 생각을 해냈음에 자찬이 절로 나왔다.

  좌측 길 건너 미션베이는 늘 보던 대로인데 그 곳을 비끼면서 도는가 하는 순간 어머 어떤 호수야?

  양 옆으로 아득하게 출렁거리는 물결을 가르듯이 둑길을 조심스럽게 구부러져 도는데 그것은 달린다기 보다 천천히 움직일 뿐이다. 호수가 아니고 홉슨베이의 바닷물이 깊숙히 들어와 호수를 흉내 낸 것을 나중에 알게 되지만 어쨌든 기차에서 만이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것이었기에 신비로웠다.(바로 이런거야)

  그 물길이 끝나는가 싶은 지점의 정거장이 커피를 마시러 몇 차례 와 보았던 낯익은 화원 앞이라는 걸 알고 그 생소함이 또 재미를 더해준다. 오목한 골짜기 양편에 횐 수염을 길게 흔들며 수런거리는 갈대들의 수다스러움도 이야기로 들리는 듯하고 제법 한참을 빠져 나가는 터널도 나왔다.

  유로를 타고 해저터널을 횡단하던 때 수학여행중의 학생들처럼 들떠서 떠들어대던 친구들 얼굴이 어른거린다.

  오랫동안 묻혀 있던 추억을 되살려 주는 이 짧은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가. 문뜩 눈꼬리가 축축해짐을 깨닫는다.

  현실이란 각박한 굴레를 벗어나 몽롱한 꿈속을 더듬듯 잠시 미아가 되어 방황하는 특별한 경험. 낯선 곳으로 떠나 보고 싶다는 여행에의 유혹은 아마 그런 것이리라.

  일상의 찌든 영혼을 맑게 하고 다시 거친 세상 속으로 뛰어 드는게 아닐까? 또 다시 비가 쏟아진다. 강한 바람속을 사선을 그으며 내리는 물줄기 속에 어디쯤일까? 광야를 가르듯 허허지 벌판도 나왔다. 드디어 종착역, 쓸쓸하기 이를데 없는 곳에 발을 놓는다. 목적도 없이 연고나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 그 빗속을 총총히 걸어 나간다. 아랫도리가 사정없이 젖어오는데도 쌕 안에 준비한 비옷조차 꺼내 입을 생각을 않는다. 세상에선 가뭄에 단비이지만 나는 낭만의 선물로 흠뻑 젖어보고 싶었는가 보다. 비에 젖으며 낭만에 취해서 쓰러질지언정 맹목적으로 보낸 이 하루가 또 먼 훗날 틀림없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것이기에 발길 닿는 대로 기분 되는 대로 맘껏 취해보는 것이리....

  그러나 내 둥지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귀소본능의 자극, 포근히 감싸 주는 내 집의 그리움, 여행의 답은 분명 그것일 것이다. 돌아오는 마음이 바빠진다. 중간쯤인 지점에서 버스로 집 앞까지 바로 갈 수 있는 행로를 알기에 내리려고 했지만 사나운 빗발이 방해를 한다. 하는 수 없이 차장을 불러 $1.50 연장 요금을 내밀었더니 웬 일일까? 그 돈을 다시 내손에 쥐어 주며 되었다고 눈인사를 하는 것 같다.

  무슨 뜻인지 알 수는 없지만 아직도 사람냄새가 싱그러운 곳이라는 걸 실감하게 되어 오늘의 의미를 더욱 값지게 한다.

  여행이 고플 때 김포공항에 나가 오가는 사람들 구경하며 서로를 달래 주던 친구는 요즈음 외국여행만 다닌다고 자랑인데 영원한 여행지에서 소박한 꿈으로 살아가는 내 기분을 어찌 알까? 삶이 지치도록 짜증나고 고단할 때 또 $10짜리 여행을 떠나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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