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 코스트 → 하스트(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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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 코스트 → 하스트(Ⅲ)

0 개 1,988 NZ코리아포스트
태즈먼 해에서 불과 20킬로미터 밖에 떨어지지 않은 폭스 빙하는 해발 3000미터에서 시작해 250미터 선에서 끝나는데, 남섬의 국도 옆에서 엎어지면 코가 닿을 만한 곳에 있다. 게다가 빙하 주변에는 각종 온대 식물군이 자라고 있는데, 접근이 쉽고 매력적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하지만 빙하의 아랫부분이 높은 기온에 노출되어 있고, 전체 빙하의 경사가 매우 심해 완벽하게 안전한 빙하라고는 할 수 없다. 거대한 용이 꿈틀거리며 내려오는 듯한 형상의 이 어마어마한 빙하는 경사가 심한 곳은 얼음이 갈라져 비늘을 곧추세운 것처럼 보이고, 경사가 약한 구간은 물 흐르듯 유동적인 모습으로 10킬로미터 남짓 내리달리고 있다.

이 빙하 근처에는 눈을 의심케 할 만큼 아름다운 매서슨 호수(Lake Matheson)가 있다. 매서슨 호수로 유입되는 물은 근처의 지하 토탄층(매몰 기간이 오래지 않아 탄화작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석탄층)을 지나면서 탄닌 색소가 녹아들어 진한 홍차색이 난다. 이 물에는 주위 풍경이 거의 원색 그대로 되비치는데,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깊은 숲이 어지간한 바람을 모두 차단해 수면은 마치 거울 같은 평정을 유지한다. 이 수면 위에 뉴질랜드의 최고봉 마운트 쿡과 둘째 가는 마운트 태즈먼이 비쳐서 ‘풍경 중의 풍경’을 연출한다.

폭스 빙하 마을(지명 자체가 Fox Glacier라서 폭스 빙하 마을이라고 부른다)에서 폭스 빙하 쪽으로 15분 정도 캠퍼밴으로 이동하니 빙하가 녹아 밝은 회색을 띠는 강이 보인다. 빙하로 향하는 트랙의 입구에는 넓은 주차장이 있는데, 그 주위로 빙하가 깎은 절벽이 좌우에 위협적으로 버티고 서 있다. 이곳에서부터 트랙이 시작된다. 빙하가 녹은 회색 물이 곳곳에 작은 연못들을 이루었는데, 맑은 물이 엷은 파란색을 띠어 신비로운 느낌을 준다. 빙하 쪽을 향해 강 좌측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는데, 산기슭에서 강 옆까지 무너진 돌무더기들이 가득 차 있다. 허영만 화백과 봉주 형님은 한기가 든다고 몸을 부르르 떤다. 폭우가 내리면 작은 개울의 수량이 불어나서 돌들이 함께 쓸려 내려오므로 개울을 건널 때는 발목을 다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빙하 끝부분에 도착하자 왼쪽으로 숲이 보인다. 빙하 최하단보다 더 높은 고도에 이와 같이 온대림이 있는 곳은 세계적으로 매우 희귀하다. 지구 온난화의 결과로 새로 생긴 이 숲은 약 40~50년 밖에 되지 않아 아름드리 나무는 없지만 숲 전체에 이끼가 끼어 있고, 나뭇잎들은 모두 건강한 연녹색을 띠고 있다.

빙하 표면에 굴이나 구멍들이 만들어진 원인을 알게 되면 재미 있다. 흰 얼음 위에 떨어진 나뭇잎이나 굴러 떨어진 작은 돌 하나가 햇빛을 모아 깊이 1m나 되는 동굴이 되기도 하고, 빙하를 수직으로 뚫어 무시무시한 깔때기 모양의 배수구를 만들기도 한다. 나뭇잎의 진한 색이 주변의 얼음에 비해 더 많은 빛을 흡수해서 더 빨리 녹게 한 것이다. 이처럼 작은 원인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큰 결과를 낳는 것을 보면 우리네 삶의 습관들과 비슷한 면이 있다.

이 빙하 얼음 속에는 여러 가지 역사가 함께 묻혀 있다. 1800년대의 화산활동으로 검은색 재가 섞인 얼음, 1990년대의 자연 발화로 생긴 오렌지색 얼음층도 보인다. 그 외에도 빙하가 바위를 깎아 만든 고운 진흙이 눈에 띄는데, 이 진흙은 여성들의 피부 미용에 큰 효과가 있다.

수백 미터 위쪽의 경사가 가장 심한 곳은 얼음이 톱날처럼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다. 이 구간은 폭스 빙하 전체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움직이며, 가장 불안정한 지역이기 때문에 진입이 완전히 통제되어 있다. 빙하 쪽에서 간간이 아주 낮은 저음이 들리는데, 빙하가 무너지는 소리가 얼음을 진동시켜 전해오는 것이다. 그 소리는 거대한 공룡의 으르렁거림처럼 낮지만 위엄 있고 두려움이 일게 만든다. 허영만 화백은 우리가 말리는데도 안전표지 안쪽으로 가서 기어코 빙하를 만지고 온다.

빙하를 본 후에 우리는 하스트(Haast)에서 하루를 묵기로 했다. 북섬에서 했던 빨래를 마지막으로 옷을 계속 입어 꾀죄죄한 모습인데도 시간을 줄일 목적으로 개의치 않았는데, 오늘 흠뻑 맞은 비가 결정타 역할을 했다. 역겨운 구정물 냄새가 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스트 홀리데이파크의 빨래방에서 빨래를 다 벗어놓고 보니 세탁기 뚜껑이 닫히지 않을 정도로 꽉 찼다. 세탁기에 빨래 한 번 하는 데에는 2달러, 건조는 2~3달러 정도 들어간다. 세탁기가 엄청난 빨래를 하는 동안 우리는 홀리데이파크 바로 뒤편의 바다를 향해 걸었다. 9시가 다 되어서야 일몰이 시작되는 뉴질랜드 서해 바다가 붉은 노을에 적셔지자 왠지 모를 나른함에 취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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