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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Google Gemini AI
1994년 뉴질랜드 이민을 준비하면서 마침 딸의 권고로 뉴질랜드 영화 ‘피아노(The Piano)’를 감상하였다. 1993년에 개봉되어 칸느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차지한 작품으로 여류감독 제인 캠피온이 각본, 연출을 한 영화인데 한국에서도 상연되어 나에게도 뉴질랜드에 대한 강한 인상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제인 캠피온은 1990년에도 ‘내 책상 위의 천사’로 베니스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획득한 바 있는 재원이다.
스코틀랜드태생인 주인공 벙어리 아다는 미혼모로서 9살짜리 딸 플로라와 생명의 분신인 피아노를 대동하고 뉴질랜드까지 시집을 오게 되었다. 그러나 남편은 개척 이민자로서 원주민 촌에서 오로지 토지 매입과 개척에만 매달린 사람이었다. 따라서 피아노 같은 것은 아예 관심도 없었으며, 피아노는 해변에 방치되고 만다. 피아노를 잊고 살 수 없는 아다는 남편의 원주민 친구에게 요청하여 피아노 해변으로 안내되었다. 이때 기쁨에 넘쳐 열정적으로 건반 위를 누비던 아다의 피아노 연주와 딸 플로라가 펼치는 환희의 춤은 관객의 영혼을 뒤흔들고 만다.
그 장면에서 연주한 곡이 마이클 니만(Michael Nyman)이 작곡한 영화의 주제곡인 ‘The Heart Asks Pleasure First(마음은 먼저 기쁨을 구한다).’이다. 이민 온 후 ‘Natural History Club’에 가입하여 영화의 촬영지를 답사하는 ‘Piano Track’을 체험하게 되었는데 피아노가 연주되었던 카레카레 비치(Karekare Beach)를 잊을 수가 없다.
영화 ‘피아노’에서 주인공 아다는 말로서 표현하지는 못하나 침묵 속의 그녀는 피아노를 통해 세상과 대화한다. 피아노는 그녀의 목소리였다. 거친 바람, 검은 모래, 텅 빈 바다, 그 외로움의 풍경 속에서 흐르는 ‘The Heart Asks Pleasure First’는 기교를 과시하지 않고 있으나 절박함이 담겨 있기에 우리의 가슴을 울리고 만다. 말을 잃은 인간이 음악으로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장면에서 영혼의 울림을 체험하게 된 것이다.
인간은 단순히 생존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를 표현하려는 존재이다. 울음, 노래, 그림, 시, 춤 등을 표현하지 못하면 인간은 점점 사라지고 말 것이다.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아다는 피아노 연주를 통해 자신의 감정과 욕망, 분노와 사랑을 토해낸 것이다. 여기서 피아노는 단순한 물체가 아니라 그녀의 ‘존재 증명서’였던 것이다.
우리는 흔히 영혼을 얘기하는데 영(靈)과 혼(魂)은 다르므로 이를 개념적으로 구분해서 사용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유일하게 영혼을 지니고 있으나 동물에게는 혼은 있으나 영은 없다고 한다. 영은 영성(靈性)이라는 말에서 유추하듯이 하늘에서 부여받은 근원적 생명성이며 도덕성·양심·초월성·깨달음과의 관계에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본질로 하늘과 통하는 차원이라 말할 수 있다.
반면 혼은 정신·의식·감정·기억과 관련, 살아 있을 때 활동하는 정신적 기능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느끼는 능력을 말한다. 짐승에게도 감정과 기억은 있으니 ‘혼’의 기능은 있다고 볼 수 있으나 도덕적 지각과 초월적 성찰의 차원 즉 ‘영’의 차원은 인간 고유의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아름다운 영혼을 지닌 사람은 조용히 남을 배려하고, 약한 이를 돌아보며, 스스로의 양심을 속이지 않는다. 남보다 앞서기보다 함께 가기를 원하고, 이기기보다 이해하기를 선택한다.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아도 그의 말에는 따뜻함이 묻어나고, 그의 눈빛에는 맑은 빛이 흐른다.
AI 시대가 되어 인간의 기능을 AI가 대행할 수는 있어도 인간만이 지니고 있는 영적 영역은 대신해 줄 수가 없다. 기계가 아무리 완벽한 곡을 작곡해도, 유명한 작곡가의 곡을 정확히 연주한다 해도 인생의 고락을 체험해 본 사람의 감성적인 연주와는 차원이 다를 것이다. AI 시대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인간 사회는 인간다움을 더 깊이 자각하고 인간다운 대처 방안을 모색해나가야 할 것이다.
즉 영성의 강화, 인간관계의 회복, 도덕적 책임성 확립의 길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몫을 담당하는 대안이 예술을 통한 교감을 활성화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AI가 곡을 완벽하게 재현할 수는 있겠지만 연주자가 처한 상황에서 말로 다할 수 없는 영혼의 떨림을 표현하지는 못할 것이다.
피아노 앞에 앉은 두 존재를 상상해 본다. 한쪽은 최첨단 AI가 작곡한 완벽한 악보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평생의 기쁨과 상실을 딛고 90대 노인이 된 피아니스트가 앉아 있다. AI의 연주는 정확하다. 박자도 강약도 화음도 흠이 없다. 그러나 인생의 굴곡을 지나온 노 연주자는 어떤 음에서 잠시 숨을 고르거나 어떤 화음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떨림이 묻어나온다. 그 떨림은 계산된 것이 아니라 살아낸 시간에서 배어 나온 것이다. 예술은 기술의 산물이기 이전에 존재의 고백이기 때문인 것이다.
AI는 혼의 기능을 빠르게 대신하고 있다. 기억, 계산, 분석, 작곡까지도 인간의 능력을 훨씬 뛰어넘어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으로 남아야 할까? 영으로 남아야 한다. 즉 고통을 통과한 공감, 눈물 속에서 길어 올린 음 하나, 옳고 그름을 묻는 양심, 사랑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용기를 말함이다. AI는 우리가 살아가는데 유용한 도구이지만 우리는 더 많이 사색하고, 더 많이 사랑하고, 더욱 진실하게 연주해야 할 것이다. 피아노 앞에 앉는다는 것은 단순히 건반을 누르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생을 고백하는 일인 것이다. 혼은 음을 만드나 영은 의미를 만든다. AI 시대는 인간의 능력을 시험하는 시대가 아니라 인간의 깊이를 묻는 시대인 것이다.
달빛이 흐르는 찬란한 밤, 어느 눈먼 소녀를 호숫가에 안내하고 싶다. 은빛 물결이 잔잔히 일렁이고, 바람은 물 위를 스치며 낮은 숨결을 남기고 있다. 가까운 이웃들을 초대한 가운데 그 소녀를 위해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No.14 1악장 월광곡을 연주해 주고 싶다. 소녀에게 달빛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호수에 비친 달밤의 숨결을 함께 나누고 싶을 뿐이다. 피아노의 낮은음이 호수의 깊은 곳을 두드리고, 높은음은 물결 위를 스치는 은빛처럼 가늘게 번져갈 때, 그 소녀가 호수에 비친 달빛의 아름다운 밤을 영혼 속에 간직하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