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세를 떠나는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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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세를 떠나는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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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산 법주사-상환암-복천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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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캄한 새벽, 눈을 뜨자마자 집을 나섰다. 속리산(俗離山)! 속세를 훌쩍 벗어난 산이라니, 왠지 불길이 치솟는 건물에서 ‘비상구(非常口)’라도 찾은 기분이다.


부처님께서는 『법화경』에서 “이 세상은 불 난 집과 같다.”고 하셨다. 실로 그렇다. 속세의 삶은 치열한 생존경쟁의 장이고, 보잘것없는 생존마저 위협하는 온갖 위험과 재난이 곳곳에 도사린 곳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불난 집에서 빨리 탈출하라고 말씀하셨다. 불안과 공포를 벗어난 평화로운 열반의 땅은 과연 어디일까?


영원한 평화와 안락이 보장되는 열반의 세계는 아니더라도 잠시 불길과 연기를 피할 곳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속리산이 혹 그런 피난처가 아닐까?


어둠이 걷히고 날이 밝을 무렵, 고속도로를 벗어나 시골길로 접어들었다. 한적한 길을 한참 달리고도 다시 산굽이를 돌고 또 돌아야 했다.


선경(仙境)이란 이런 것인가? 빽빽한 소나무 숲 사이로 불쑥불쑥 치솟은 바위들,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시원한 바람에 개울 소리만 가득하다. 장안면 우당고택, 계곡 옆 작은 버스 정류장, 서원리 소나무, 눈길을 사로잡는 한가로운 풍경에 가다 서다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두고 온 세상이 아득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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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친김에 하판리, 중판리까지 한 바퀴 두르고 상판리로 오르자 작은 들 한가운데 정이품송이 보였다. 600여 년의 세월이 빚은 단정하면서도 당당한 품새, ‘쩡쩡하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가 보다. 굳이 다시 차를 세우고 소나무 주위를 한바퀴 맴돌았다. 온갖 풍상 다 겪고도 기상이 빳빳한 선비를 뵙는 듯, 빛나는 지혜를 속으로 감추고 무던히 웃기만 하는 선사를 뵙는 듯, 그 앞에서는 절로 숙연해진다.


법주사(法住寺)에 도착하니, 산행을 함께 할 동료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부랴부랴 배낭을 메고 길을 나서자 초행길이 염려되셨는지 포교국장 스님께서 안내를 자처하셨다. 산길은 걷기 좋게 잘 정비되어 있고, 초입에 ‘세조길’이란 이름이 붙어있었다. 조카인 단종을 폐하고 즉위한 탓에 유생들에게는 세조가 패악 군주로 악명이 자자하지만, 그에 대한 불교도의 평가는 다르다. 세조는 스스로 호불(好佛) 군주라 선언할 정도로 불교를 숭상하였고,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애쓴 개혁 군주였다. 그런 세조가 재위 시절 법주사 복천암(福泉庵)을 다녀갔기에 이를 기념해 붙여진 이름인 듯싶다. 


걷다 보니 오른쪽으로 ‘목욕소’가 보였다. 세조가 몸을 씻고 악창이 나았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욕창이 그득한 몸으로 한양에서 깊은 산골까지 찾아왔을 땐, 몸도 마음도 아마 만신창이였을 것이다. 맑은 물이 가득한 그곳이 왠지 씁쓸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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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알 수 없는 게 인간이다. 왕실과 조정의 신망을 한 몸에 받던 그가 만인의 손가락질 속에서 조카에게 사약을 내릴 줄 누가 알았을까?


그는 왕자 시절 한글 창제에 동참해 집현전 학사들과 숙박을 함께 동고동락했었다. 그랬던 그가 성삼문의 목을 벨 줄 누가 알았을까?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돌아보면 후회와 미련만 가득한 것이 나만의 일일까? 부와 권력을 좇아 몰려든 사람들이 사방을 에워쌌지만, 세조도 아마 외로웠을 것이다. 다들 허리를 굽히고 달콤한 말로 비위를 맞췄지만, 세조도 아마 친구가 그리웠을 것이다. 그래서 이 먼 곳까지 찾아왔을 것이다.


대학 시절, 서울에서 혼자 야간버스를 타고 내려와 설악산에 오른 적이 있다. 그때는 고독이 낭만인 줄 알았다. 어디서 왔을지 모를 몇몇 사람의 말소리를 이정표 삼아 안개가 자욱한 산을 올랐다. 그러다 그만 길을 잃었다. 희끗한 어둠 속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렇게 헐레벌떡 사방을 헤집다가 제풀에 지쳐 철퍼덕 주저앉았을 때였다. 문득 사람이 그리웠다. 돌아보니, 친구도 나이 따라 달라졌다. ‘코찔찔이’ 시절에는 같이 놀아주는 친구가 좋고, 성인이 되어서는 잘나고 능력 있는 친구가 좋았다. 이제는 주저앉고 싶을 때 곁에 있어 주는 사람, 그런 친구가 그립다.


가파른 산길 끝 암자, 상환암


아득한 옛일을 더듬다 보니, 세심정(洗心亭)이라는 푯말이 보였다. 마음을 씻는 정자, 이름이 참 멋들어졌다. 커다란 바위를 통째로 파서 만든 절구가 있고, 그 옆에 지게가 보였다. 요즘은 보기 드문 물건이라 호기심이 생겼다. 그래서 동행한 스님께 물었다.


“스님, 이 지게는 어디에 씁니까?”


“그거요, 찻길 없는 산내 암자에 일용품을 나를 때사용합니다.”


“찻길이 없는 암자가 있습니까?”


“그럼요, 저기 오른쪽 길이 상환암, 상구암으로 가는 길입니다. 태조 이성계가 상환암에서 기도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래서 세조도 복천암 가는 길에 선조의 자취를 따라 상환암에 먼저 참배했다고 합니다. 우리도 상환암을 먼저 들렀다 갈까요?”


손길을 따라 눈을 돌리니, 가파른 계단이 보였다. 언뜻 보아도 힘든 길이었다. 속으로 ‘어휴, 거길 언제 다녀와?’ 싶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좋지요, 스님.”


예상대로 길은 험하고 가팔랐다. 그런데 참 신기했다. 비지땀을 흘리며 굽이굽이 산길을 걷다 보니, 몸도 마음도 절로 가벼워졌다. 그리고 어느새 상환암(上歡庵)에 도착하였다. 삼면을 에워싼 절벽아래 축대를 쌓고 손바닥만 한 터를 닦아 만든 암자였다. 샘물 한 바가지를 들이키자, 속이 다 시원했다. 법당에 참배하고 뒤를 보니, 산신각이 깎아지른 절벽에 제비집처럼 붙어있었다. 철계단을 따라 산신각에 오르자, 탁 트인 경관에 눈이 다 시원하다.


“최상의 기쁨[上歡]이란 이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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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결처럼 흘러내린 속리산 줄기가 사방을 겹겹이 휘감고 있었다. 어머니 품에 안긴 듯 포근하고 편안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맑은 하늘에 푸른 소나무뿐이고, 들리는 것이라고는 물소리에 새소리뿐이었다. 그 아름다운 풍경을 넋 놓고 바라보다 곁에 계신 스님께 물었다.


“옛날 스님들은 왜 이렇게 외진 곳에 터를 잡았을까요?”


스님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사람의 욕심이라는 게 쉽게 사라집니까? 하나를 가지면 둘을 가지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지요. 부처님께서 ‘작은 것에 만족하고 스스로 절제하며 살라’ 하셨지만 그게 어디 쉽게 됩니까? 저도 출가한 지 벌써 30년이 넘었습니다. 하지만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고 손 닿는 곳에 좋은 것이 있으면 욕심이 생깁니다. 그러니 수행이 웬만큼 익어지기 전에는 아예 멀리 떨어지는 것이 상책이지요.”


스님의 진솔함에 가슴까지 시원했다. 상환암을 뒤로 하고 다시 복천암으로 향했다. 가을 햇살에 파삭해진 흙 내음이 향기로웠다. 스님이 말씀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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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숲에 쓰러진 아름드리 나무들을 보십시오. 조용히 썩어가지 않습니까? 덕분에 새로운 나무들이 건강하게 자라지요. 자연에 배워야 합니다. 사람도 때가 되면 조용히 물러나 뒷사람에게 자리를 내어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 인간은 너무도 당연한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고 산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돌아보면, 머리가 복잡하고 속이 답답한 것이 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해서 생긴 병들이다. 단순명쾌한 스님의 말씀을 듣다 보니 어느새 복천암에 닿았다.


복천암은 신라 성덕왕 시절 창건된 유서 깊은 사찰이다. 세조가 복천암을 찾아온 까닭은 신미대사(信眉大師)와 학열(學悅) 학조(學祖) 스님을 보기 위해서였다. 세조는 왕자 시절 아버지 세종을 도와 한글 창제에 앞장서고, 어머니 소헌왕후(昭憲王后)가 돌아가셨을 때는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부처님 일대기를 한글로 쓴 『석보상절(釋譜詳節)』을 편찬하였다. 그리고 즉위한 뒤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여 많은 불서를 한글로 번역하였다. 그때 그에게 큰 도움을 준 분이 신미대사와 그의 제자들이다. 그러니 세조에게 신미대사는 스승이요, 학열과 학조 스님은 뜻을 같이한 친구인 셈이다.


『조선왕조실록』은 그날의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세조 10년(1464) 2월 28일에 임금께서 속리사에 행차하고, 또 복천사에 행차하였다. 복천사에 쌀 300석, 노비(奴婢) 30명, 전지(田地) 200결(結)을 하사하고, 속리사에 쌀과 콩 30석을 하사하고, 신시(申時)에 행궁(行宮)으로 돌아왔다.”


1결은 지금 1ha 즉 3,000평에 해당한다. 그러니 복천암에 60만 평의 농지를 보시한 셈이다. 여러차례 화재로 중건한 탓에 지금은 그리 화려하지 않은 암자지만 당시에는 사세가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암자 뒤 바위에는 오랜 세월에 푸르스름한 이끼가 낀 ‘복천(福泉)’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그 바위틈에서 샘물이 끊임없이 솟고 있었다. 복천, 실로 수많은 사람을 행복의 나라로 인도한 샘물이다. 그 옛날 신미대사와 학조대사, 그리고 근래에는 경허, 만공, 효봉, 성철, 관응 스님 등 수많은 고승들께서 이 샘물을 마셨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저절로 경건해졌다. 샘물을 한 바가지 떠 두 손으로 받들고 조심스레 마셨다. 그리고 소원을 빌었다.


“이 물로 지혜가 무럭무럭 자라나 행복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오른쪽 산등성에 모셔진 신미대사와 학조대사의 부도에 참배하고, 호숫가를 돌아 천천히 법주사로 내려왔다. 도량에 들어서자, 어디선가 달콤한 카라멜 향기가 났다. 걸음을 멈추고 사방을 살피자, 동행한 하 선생이 눈치채고 웃으며 말했다.


“계수나무 향기입니다. 저 나무가 계수나무입니다.”


향기를 좇아 계수나무 아래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올려다보니, 가을 햇살에 노랗게 물든 타원형 잎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그 빛깔과 향기가 너무 좋아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행복이 별건가? 이게 행복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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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은 법주사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법주사로 405

043-543-3615 l http://www.beopjusa.org/


■ 출처: 한국불교문화사업단 

템플스테이 매거진(vol.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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