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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오는 봄을 받아들이고 물러갈 만도 한데, 비는 잊을만 하면 오고, 곳곳에 이미 봄꽃들도 흐드러지게 피었건만 항복할 줄 모르고 때론 등골이 오싹하도록 한기까지 곁들인다. 오늘 아침도 “뒷뜰에 있습니다” 라는 글귀를 현관에 던져두고 흙놀이 하다가 흩뿌리는 성근 비에 쫓겨 들어왔다. 따끈한 찻잔을 두손으로 감싸쥐고 버리고 들어온 뒷뜰을 내려다 보고 있다가 서울 사는 친구의 카톡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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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얘 기억나니?” 하고 어떤 할머니의 사진을 보냈다. 나는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 사진을 세로로 늘려보고 가로로도 최대한 늘려 보아도 도대체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으로 “모르겠는데…누구야?” 친구는 ㅋㅋㅋ대며 웃더니 “분이 생각 안나?” “걔야 잘 알지만…” 그래도 전혀 겹쳐지지 않는 육십년 전 옛날의 그녀…사람의 몸이 얼마나 늘어날 수 있는지를 시험이라도 하는 듯 뽀얗고 날씬하던, 이지적이었던 그녀는 어디로 출장보내고 이렇게 변해 버렸을까? 억지로 기억을 뒤적여 옛날의 그녀를 떠올려 본다.
“아-하. 그렇군 근데 분이는 지금 어디에 산대?” “우리가 어디라면 알겠냐? 미국 테네시 주라던데…엘비스 프레스리 고향이랴.” “아! 거기?” 친구가 사는 동네 이름은 못 외워도 흘러간 가수의 고향은 기억하는 우린 중 고등학교 동창 친구들이다. 분이는 그 곳에서 해외 선교사업에 열심이란다. 그럴만 하다. 어릴 때도 교회 일에 열심이었었으니까…그리곤 함께 따라 올라온 사진 한 장. 사진이라면 사진관에서만 찍을 수 밖에 없었던 그 시절. 다섯 친구들이 모여서 한 컷을 남겼었다. 아마도 재이가 서독 간호사로 출발 직전에 포즈잡고 입술에 침바르고 찍었던 사진으로 기억한다.
화장기 없이 순수하고, 그렇지만 어딘지 허술하지 않은 이쁜 결기로 뭉친 표정의 앳된 숙녀들, 나는 재이가 파독되어 있던 그 시절 그녀의 아버지와 같은 회사에서 근무했었다. 그 분은 회사 내에서 무섭기로 소문난 어르신이셨다. 하지만 어쩌다 나를 만나면 한없이 온화한 얼굴이 되셔서 이것 저것 물어보시곤 하셨다. 그 때 이미 정년을 얼마 남기지 않으셨을 연세셨다. 딸 보고픈 마음에 금방 머리라도 쓰다듬어 줄 것 같은 표정으로 귀여워해 주셨었다. 그러나 수년전 재이가 많이 아프다는 소식 이후 그녀의 거취를 아는 친구를 찾을 수 없지만 어딘가 꼭 있어야할 자리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을 것을 나는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이렇게 사진을 보내 동창들의 소식을 알려주고 안부 톡을 나누는 사랑스런 여인 선이. 아직도 그녀는 집에서 장을 담근다. 생각보다 그 양이 만만치 않은데 그때마다 동생들도 줘야 하고 또, 누구누구도 줘야 한다며 매년 담근다. 메주를 띄운 항아리에 빨간 고추와 숯을 덧 띄운 후 사진을 찍어 보내곤 며칠씩 앓아 눕는다. 계절이 바뀔 때면 그 때의 사진, 겨울이면 장독대 항아리 뚜껑마다 소복히 쌓인 눈사진을, 혹은 빨간 홍시가 나무에 달린 채 눈을 맞고 있는 사진등을 찍어 보내며 고국의 반대편에 사는 친구에게 계절을 일깨운다.
언젠가는 막 바느질 끝낸 고운 차렵이불 여러채를 쌓아놓고 사진을 찍어 보내기도 했었다. 그림처럼 고왔다. 삼식이인 남편의 식사 때문에 내가 잠시 귀국했을 때에도 그녀의 스케쥴을 참조했어야만 했었다. 남편 밥상엔 같은 반찬을 두 번 올리지 않고 한여름에도 남편 좋아하는 곰국을 끓여대는 그녀를 나는 이조부인이라 부른다. 보는 이들 맘 같지 않게 불평이 없고 행복해 보인다. 엊그제는 내가 좋아하는 재래종 먹포도를 사왔다면서 갖다 먹으라 농을 한다. 수박 한 통이 칠만원이네, 배추는 또 얼마고…고물가로 불평을 하여도 내가 듣기에 귀엽게 들린다. 선이 그녀는 살림꾼이다. K-살림꾼. 그녀의 꿈은 발레리나 였었다. 건강이 감당치 못했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도 그 발레 후유증(?) 으로 약간 팔자걸음을 걷지만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 더 건강해 진 듯 한데 그래도 자주 아프단 소식이 묻어와 안타깝다.
우린 모두 해방동이들인데 그녀는 한 살이 어리다. 얼마전엔 나라에서 정해준 나이 셈법으로 따져도 이젠 따라 잡았다며 팔십됨을 자축해서 우릴 웃겼다. 그게 무슨 좋은 거라고 그렇게 부지런히 따라오냐며 놀려도 그냥 좋댄다. 같은 해방동이여도 나는 8.15 이전 출생과 이후로 나눈다. 농담으로 해방 전에 태어난 애들이 독립 운동 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너희들이 모를거다 너스레를 떨기도 한다.
또 한 아이. 들판의 가을걷이도 끝난 늦가을 그 운동장엔 운동회 흔적이 남아 있었다. 여중때 부터 단짝이었던 내 친구가 재직하고 있는 시골 초등학교, 그 곳엔 스산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버석거리며 바람에 밀려 다니던 낙엽들이 측백나무 울타리에 걸려 길게 띠 모양으로 쌓여 있었다. 키큰 미루나무 꼭대기엔 빨간 노을이 깃발처럼 걸려 있고 아이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간 그곳엔 수백마리의 참새떼가 지줄대며 적막함을 몰아내고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내 결혼식에 피아노 반주를 부탁하러 먼 이곳까지 내려온 길이었다. 잠깐 양호실에서 기다리라더니 텅 빈 그곳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을 기다렸을까? 사위가 어둑어둑해 지는데도 돌아오지 않는 그녀를 이제 찾으러 나가 볼까 하고 일어서려는데 그녀는 바알갛게 상기된 얼굴로 돌아와서 “나 곧 수녀원으로 들어가” 라고 말했었다. 잘못 들었나. 몇번이나 되물었다. 늘 조용하고 얼굴을 잘 붉히고 아주 생각이 맑고 건강한 친구였었다. 그 아이에 비하면 난 좀 덜렁대는 품으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우리 둘이 단짝 친구가 된 것에 선생님들 조차 신기한 듯 보셨으니까…
짧지만 너무 단호한 그 한마디에 나는 화르르 무너지며 쟤가 저렇게 말할 때는 모든 게 이미 번복할 수 없는 결정이었음을 간파하였기에 되묻지 않고 정신나간 사람같이 부스스 일어나 휘적휘적 온 길을 되곱쳐 나갔었다.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서울까지 오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멋내고 간 투피스의 앞자락이 부라우스와 함께 온통 젖었지만 결코 소리내어 울진 않았다. 그냥 뭔지 모르는 약간의 부끄러움과 오기로 “그래 인생이 꼭 한 길만 있는 건 아니니까, 나는 내 길에서 열심히, 너는 네가 선택한 그 길에서 열심히 잘 살아보렴.” 다짐이라도 하듯 운동장에 하이힐 굽을 꼭꼭 박으며 돌아오는 길엔 참새소리도 들리지 않고 깃발같던 노을도 보이지 않았다. 굵은 눈물만이 자욱자욱 떨어졌다.
걔네 집과 우리 집은 어머니들부터 형제들까지 오랜 세월을 가족같이 잘 알고 지냈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도록 나에겐 아무도 연락을 주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섭섭함이 오래 갔었다. 그 후 바람결에 들려오는 조각 소식중엔 뉴질랜드에 와서 나를 찾았었다는 것도 있었지만 나의 섭섭함과 야멸찬 마음을 돌릴 순 없었는데, 여러 해 후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할 즈음부터는 그 아이의 선택도 그닥 나쁜 선택은 아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가끔 들기는 했었다. 그리고 그 친구가 수녀원으로 떠나기 직전까지 가족 아무도 짐작조차 하지 못했었다는 얘길 한참 후에 듣게 됐었다.
얼마 전 우리 어머니의 병환으로 잠시 귀국했을 때 엄마, 언니와 함께 마지막일 듯한 고향방문을 했었다. 동창들이 세계 어느 구석에 있던 다 찾아준다는 동창회장을 만났다. 찢어진 청바지에 마음만은 아직 청춘인 그 할아버지는 숲 해설가로 아직은 재기 넘치는 화술로 좌중을 웃겼었다. 그의 활약으로 강원도에 있는 수녀님을 내가 묵고 있는 T 시로 불러 내렸다. 늦어도 갈테니 기다려 달라는 그 말에 식당에서 조차 내몰린 우리들은 캄캄한 길에서 기다리고 그리고 만났다. 오십년 만이다. 우린 서로 안고 바위에 짓눌린 짐승처럼 울었다. 비-잉 둘러선 이들 아무도 움직임이 없고 사찰의 풍경소리만이 울리던 그 밤. 나는 그녀의 제복입은 모습을 그날 처음 보았다.
어떤 경외심보단 옛날의 그 친구이고픈 마음에서일까? 실컷 울고 그녀의 귓가에 속삭인다. “독한 지지배.” 그녀가 말한다. 그 날 너는 운동장을 다 빠져나갈 때까지 어쩜 한 번도 뒤돌아 보지 않더란 오십년전 얘길 마치 어제 얘기처럼 해서 나는 울다가 웃었다. 지금 그녀는 은퇴수녀님들을 모신 동해안 수녀원에서 본인조차 은퇴수녀가 되어 일하고 있다. 아주 가끔 수녀님의 소식을 듣고 톡을 보낸다. 제발 답은 안해도 좋으니 읽기만이라도 해달라며 사정을 하다 이젠 밖에 있는 친구들이 그녀를 보호하기로 했다. 우리가 보내는 소식이 그녀에겐 먼지나 묻혀 보낼 소식들이기도 하고…
하늘이 개었다. 다시 “뒷뜰에 있습니다” 명함을 현관문턱에 내어놓고 뜰로 나왔다. 아주 작은 달팽이 한마리가 내가 좋아하는 다육이의 잎을 움푹하게 파먹고 아예 그곳에서 잠까지 자고 있다. 대부분의 달팽이들은 아침엔 퇴근은 하던데…내 기척에 놀란 무당벌레 한 마리가 날개를 쫙 펴고 날아올라 연잎닮은 활련화 잎에 옮겨 앉는다. 잎 가운데 고여있던 진주같은 물방울이 또르르 굴러 떨어진다. 내가 이렇게 평화로운 곳에서 수많은 다육이를 돌보며 노년의 삶을 누리고 있음은 오랜 세월 나를 아는 사랑하는 이들과 수녀님의 기도 덕분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며 모두들 사무치게 보고 싶단 말을 이렇게 주저리 주저리 길게 하고 있다. 늙으면 너무 먼 곳을 보지 말라는 어떤 문귀가 생각난다. 그 말이 틀리진 않는다. 하지만 지난 시간을 반추하기도 바쁘니 걱정할 일은 아닌 듯 하다. 두 눈을 꼬옥 감으면 더 잘 보이는 지난 추억들…
내 뜰 가득 바이올린 선율이 차오른다.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