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려라 들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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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려라 들깨

0 개 393 이경자

간밤엔 빗소릴 들으며 잠자리에 들었었는데 밖이 조용한 걸 보니 비는 그친 것 같은데 이불밖이 냉하다. 이렇게 일찍 일어나야만 할 일도 없고, 커튼 사이로 휘뿌연하게 보이는 새벽이 좀 더 누워 있어도 될 듯 해서 이불을 다독이고 있는데, 거실의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린다. “이 새벽에 누구지? 아마도 잘못 걸린 전화일게야” 생각하며 받은 수화기 너머에서 엄마가 급하게 말한다. “에미다. 열쇠 갖고 빨리 오너라.” 그리곤 끊어버린다. 놀란 나는 “뭔 일이래?” 하고 차로 7,8분 거리에 살고 계시는 엄마네로 향한다. 아직 거리는 한가롭고 열린 가게들도 없다. 


그날 아침 서둘러 가본 엄마는 늘 목에 걸고 다니시던 열쇠 꾸러미를 어젯밤 목욕하기 전 풀어놓았다가 재착용을 잊어서 이런 봉변 아닌 봉변을 당하신게다. 엄마네 현관문은 오래 되어서 닫으면 저절로 잠겨 버리는데 입주전 리노베이션 할 때 바꾸자 하니 아직 쓸만 한데 애먼데 돈 쓸 거 없다 하시며 거절하셨는데 그것이 화근이 되서 그 아침 고쟁이 바람으로 쫓겨난 셈이다. 


엄마는 이층 건물 아파트의 이층에 살고 계셨는데 내가 갔을 때는 이미 옆집 키위 아저씨가 사다리를 걸어놓고 다행히 문이 잠기지 않은 뒷 베란다 쪽으로 입성중에 있었다. 시퍼렇게 언 엄마는 문이 열리길 기다리며 현관쪽에서 벌을 서고 계시고… 그 아저씨는 우체국에 근무하는데 새벽에 출근한 날은 점심때쯤 퇴근하고 좀 늦게 출근하면 늦게 퇴근한다고 전에 말했었는데 내가 잘 이해했는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그 이는 옆집에 살며 엄마의 자질구레한 걱정을 해결해 주곤 했었다. 전구를 갈아야 하거나 한국 TV가 말썽을 부릴 때도, 또는 엄마가 거의 도맡아 돌보는 단지내의 정원일을 하며 무거운 바위를 옮긴다던지 할때도 불러 도움을 청하고 했었지만 한번도 귀찮아하지 않고 엄마를 도와 주었다. 엄마와 나는 늘 감사해 하며 가끔 초콜렛이나 와인으로 인사치레를 하곤 했었다. 


나는 오래전에 혹시 우리 엄마에게 급한 일이 생기면 연락해 달라는 당부와 함께 전화번호를 건넨 적이 있었지만, 그동안엔 한번도 이런 일이 없었다. 형제들이 자주 돌아가며 들리기도 했고…하긴 엄마는 깜박해서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일들이 있긴 있었다. 벽마다 부적처럼 “불조심” “꺼진 불도 다시 보자” “물을 아끼자” 라는 표어를 여기저기 붙여 놓았지만 내가 아는 것만 두번이나 냄비를 새까맣게 태웠었다. 물론 사골국이나 또 다른 내용물까지… 냄새가 오래 갔었다. 


개스불이 아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며 표어만 많이 붙이면 뭐하냐는 듯 말하며 걱정할 땐 엄마는 “너도 내 나이 돼봐라” 하면서 섭섭해 하셨다. 벌써 수년전의 일이며 엄마가 늘 말씀하시던 엄마의 그 나이에 지금은 내가 살고 있다. 언제든 소소한 건망증에서 큰 일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그나마 엄마는 더 큰 걱정없이 건강하게 잘 지내셨었다. 나 또한 이 길에 주소를 얹고 사는 세월이 벌써 몇해인데 아직도 쓰레기 치우는 날을 깜박 잊고 일주일을 더 묵히는 일이 가끔 있다.  


오늘 아침엔 쿠르릉대며 마치 쓰레기차가 수거중일 때와 비슷한 소리에 어젯밤에 내어 놓아야 할 쓰레기통이 생각나서 대충 겉옷을 걸치고 급하게 통을 끌고 나가니 쓰레기차도 아닐뿐 아니라 옆집도, 또 다른 집들도 내놓은 집이 없다. 그제서야 오늘이 뉴질랜드의 빨간 날이라 순연되는 것을 깨닫는다. 오랜 세월을 살아도 이 나라의 국경일을 기억 못하고 헤맨다. 요즘에 아이들까지 모두 성장해 따로 살고보니 더더욱 달력의 빨간 글씨들을 뜻 모르고 지내기도 한다. 


빨간 뚜껑의 쓰레기통을 그냥 내일까지 길가에 둘까 아니면 낼 아침 다시 내어놓을까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한 번 나의 기억력을 시험해 보기로 하고 끌고 들어온다. 내일 아침 아니 오늘 저녁에 잊지 말고 꼭 내어 놓아야지 한다. 그제서야 이 아침이 만만치 않게 춥다는 것을 느끼며 뛰어 들어오며 현관문을 미니 문이 잠겼다. 


온 몸에 소오름이 돋으며 순간 수년전 겪었던 엄마의 그 일들이 데자뷰처럼 떠오르며 늘 목에 걸고 다니던 열쇠 꾸러미를 찾아 가슴팍을 더듬는다. 오늘따라 안엔 아무도 없는데, 이렇게 암담할 수가… 옆집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듯 해서 그 댁 남편이 출근할 때를 기다려 자연스럽게 만나는 것처럼 동방예의지국의 아녀자 답게 예의를 갖춘다. 지가 출근은 하겠지. 입김이 허옇게 쏟아진다. 세워놓은 자동차에라도 들어갈까 했더니 거기도 잠겨있다. 빈 자동차에 뭐 가져갈 게 있다고 문까지 잠궜을까 하며 콩콩 머리를 쥐어박는다. 누가 이럴 줄 알았나? 뭐라도 몸을 움직이면 덜 추울 듯 해서 이 새벽 어울리지도 않게 쭈그리고 앉아 담장 밑 잡초도 뽑아보고 강종강종 뛰어보기도 하는데 그 무렵 부시시한 얼굴의 옆집 내외가 부엌 창문으로 물끄러미 나를 내다보고 있다. 새벽부터 요상한 짓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뜨악한 얼굴이 된다. 나는 자초지종을 대충 설명하고는 들어오란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안으로 뛰어든다. 동방예의지국의 자긍심이 고드름이 되어가는 위기였다. 그녀가 말했다. “우리 남편 오늘 쉬는 날인데.” 


아이구 이런 정신머릴 봤다. 쓰레기통 끌고 들어온 게 조금 전인데… 뜨거운 차를 건네주곤 두 손을 맞잡아 비벼주기도 하며 담요론 나를 감싸안는다. 무엇을 어떻게 해주길 바라느냐 묻는데 아무것도 생각나는 게 없다. 딸 전화번호도 전혀 생각나지 않는데 마침 그녀의 남편이 자기에게 당신 딸 전화번호가 있다 말한다. 엄마에게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부탁한다는 비상용으로 건네준 모양이다. 딸은 “어쩌지? 지금 당장은 가기 어려운데. 빨리 가도록 해볼게요 엄마” 


기다리는 동안 여러가지 얘길 했다. 자주 얼굴은 마주쳐도 그냥 간단한 인사정도였는데 가족 얘기도 하고, 이제 곧 인도로 부모님을 뵈러 갈 것이라는 말과 함께 비행시간을 얘기할 땐 벌써부터 버거운 얼굴을 하며 웃는다. 딸은 빠알갛게 상기된 얼굴로 생각보다 빠른 시간에 와주었다. 나는 변명처럼 오늘 아침 이 일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일의 당위성을 쭈뼛대며 설명한다. 그리고 딸도 이렇게 아무때나 빨리 올 수 없을 수도 있음을 말한다. 그렇긴 하지 저도 늦은 나이에 학교에 다니고 있고 두 아이의 엄마, 아내 노릇까지 결코 한가하지 않음을 나도 알기에 미안한 마음을 속으로만 말한다. “너도 내 나이 돼봐라”


어릴 때 동화 속처럼 열려라 참깨 하는 방법도 있긴 한데 그건 이미 사십인의 도둑이 써먹었고 기억력 오류로 동굴에서 못 빠져나온 아리바바의 형도 있으니 그렇게 따지면 이미 사용했다 실패한 얘긴데… 황당한 일을 당하니 별 유치한 생각이 다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그냥 궁리끝에 열쇠 하나를 더 복사해서 바깥 화단에 묻기로 합의를 보았다. 녹슬지 말라고 은박지로 싸고 비닐로 또 싸서 비밀장소에 묻고 돌로 눌러 두었다. 딸과 나만 안다. 


가끔 확인차 후비적거려 확인한 후 혹시 누가 보지 않나 긴장감으로 다시 묻곤 한다. 때론 꽃씨를 묻는 것 같은 소중한 마음으로 하지만 싹은 나지 않는다. 벌써 두번 파내서 써먹었으니 제 할일을 잘 하고 있는 셈이다. 묻어도 묻어도 잊히지 않는 일 잊어서는 안되는 하구많은 사연들은 물위에 던져진 돌맹이가 물수제비 뜨듯 튕겨나가기도 하고 수면 아래로 침잠하기도 한다.  하루하루 빠르게 발전하는 문명앞에 적응하지 못하고 기억력마저 쇠퇴해가는 나는 동굴에 갇혀 틀린 주문인 줄도 모르고 외친다. 열려라 들깨 열려라 들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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