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년 전 진감선사 숨결 닿은 야생녹차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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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 전 진감선사 숨결 닿은 야생녹차의 맛

0 개 593 템플스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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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의 고승이자 범패의 선구자로 손꼽히는 진감선사(眞鑑禪師, 774~850). 천 년 전 그가 사랑했던 차를 만나기 위해 하동 쌍계사를 찾았다. 사시예불을 앞두고 대중 스님들의 분주한 움직임이 도량 곳곳에 활기를 더하는 시각, 부드러운 미소로 객을 맞이한 쌍계사 주지 지현 스님과 템플스테이 지도법사 허경 스님이 자연스레 차 한잔 권했다. 콕 짚어 ‘쌍계사 차나무 시배지’의 햇차를 청하는 객을 위해 지현 스님이 선택한 차는 죽로차(竹露茶). 대나무 아래 자생한 찻잎만을 따서 덖은 것으로, 대나무 이슬을 맞고 자랐다고 하여 ‘죽로차’다. 이곳 시배지에서 생산되는 차는 죽로차 외에도 모두 야생차다. 직접 따서 손으로 덖는 전통방식을 고수하고 있어 매년 생산량이 녹차 300kg, 발효차 250kg가량에 불과하다.


접견실 다탁에 앉아 차를 기다리며 도란도란 담소가 이어졌다. 창밖으로 밥짓는 연기가 운무처럼 일렁이는 모습에 시선을 빼앗긴 순간, 보글보글 찻물 끓는 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운다. 갓 우려낸 죽로차는 기대만큼 담박하고 청명했다. 여느 녹차와 같이 맑은 탕 색에, 향은 여리지만 명징하게 코끝을 스치고 맛은 슴슴한 듯 깊었다. 두 번째 잔은 좀 더 뚜렷한 맛과 향이다. 세 번째 잔은 다시 은은하고 부드러운 맛 뒤로 따라오는 쌉싸레한 여운이 강렬하다. 오래도록 입안에 맴도는 차향을 더듬다 보니, 문득 다른 공간에 다녀온 듯 생경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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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0년 역사 이은 야생녹차 


끝없이 펼쳐진 푸르른 야생차밭은 하동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이미지다. 하동은 우리나라 녹차의 주요산지로, 특히 쌍계사가 위치한 화개동은 차나무의 식생에 특별히 적합한 환경 덕에 예로부터 차의 맛과 향이 뛰어나기로 명성이 높았다.


지리산 화개동에는 차나무가 사·오십 리에 뻗어 자라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이보다 넓은 차밭은 없다. …(중략)… 다경(茶經)에 이르기를 차나무는 바위틈에서 자란 것이 으뜸인데 화개동 차밭은 모두 골짜기와 바위틈이다.    - 초의선사, 『동다송』


실제 화개동 너른 차밭에 자생하는 야생차는 그 맛과 향이 남달리 뛰어나 왕실에 바치는 진상품으로 활용됐다. 녹차가 왕의 하사품으로 활용된 기록도 다수 확인된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명나라 사신이 임금의 안부를 묻자, 그에 대한 답례로 인삼과 비단 등과 함께 ‘작설차’를 하사했다고 전한다.


당시 작설차는 곧 화개에서 생산된 녹차를 지칭했다고 하니, 이곳의 녹차가 인삼 등과 함께 사신에게 주는 선물로 활용될 정도로 고급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왕의 녹차’라는 역사적 상징성이 지금까지 남아 전하는 이유다.


신라 흥덕왕 3년(서기 828년) 당나라에서 돌아온 사신 대렴공이 차 종자를 가지고 오자, 왕이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차는 선덕여왕때부터 있었지만 이때에 이르러 성하였다. - 『삼국사기』 「흥덕왕편」


기록에 따르면 화개동 야생차밭은 828년 신라 대렴공(大廉公)이 왕명으로 당나라에서 차나무의 씨앗을 가져와 지리산 일대에 처음 심은 이래로 1200년에 이르는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현재 쌍계사로 향하는 진입로 우측으로 펼쳐진 8,000여평 규모의 ‘쌍계사 차나무 시배지’(경상남도 기념물 61호)가 이러한 역사를 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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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녹차’라는 상징성 여전


차나무 시배지는 쌍계사 다맥의 상징이기도 하다. 830년대 쌍계사를 개창한 진감선사가 인근 차나무를 크게 번식시켜 차밭을 조성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그 명맥이 사라져가던 차밭을, 전 쌍계사 방장 고산 스님이 시배지의 정체성을 복원해 다시 조성하면서 그 역사성이 계승되고 있다. 국립산림과학원 산림ICT연구센터가 쌍계사의 의뢰를 받아 조사한 결과, 시배지의 차나무 수령은 대부분 20년 이상인 것으로 측정됐으며 일부 100년이 넘은 차나무도 존재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주지 지현 스님은 “쌍계사 차나무 시배지는 역사적으로 그 의미가 적지 않음에도 그동안 시배지에 담긴 역사적 의미나 쌍계사에서 전승되는 다맥이 제대로 조명되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며 “내외국인들이 템플스테이를 통해 차 문화를 접하고 그 매력에 푹 빠져드는 모습을 보면서, 제대로 된 정립과 확산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높다.” 고 설명했다.


허경 스님도 “여러 템플스테이 프로그램 중에서 특히 사찰에서 당일 체험할 수 있는 스님과의 차담(茶談)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상당히 높다.”며 “정신을 맑히는 차 한 잔이 현대인들에게 얼마나 많은 힐링과 휴식의 순간을 선사 할 수 있는지를 매 순간 깨닫고 있다.”고 전했다.


두 스님은 쌍계사에서 소임을 맡기 전 수행에 남다른 뜻을 두고 정진해 온 수좌이기도 하다. 따라서 녹차의 맛과 향을 평가하고 논하기보다 차 한잔을 통한 변화, 그리고 마시는 동안 스스로에게 집중하게 되는 찰나의 순간을 더 즐거이 여긴다. 이는 천 년 전 진감선사도 마찬가지였다. 사찰 주변으로 차나무를 크게 번식시킬 정도로 차를 좋아했지만, 그 맛과 향에 깊이 천착하거나 메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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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나무 크게 번식시킨 진감선사


중국의 차[漢茶]로 공양을 올리는 사람이 있으면 곧 돌솥에 불을 지펴서 가루로 만들지도 않고 차를 끓여서 말하기를 ‘나는 이 차가 무슨 맛인지 알지 못한다. 다만 뱃속을 적실 뿐이다.’ 하였으니, 참됨을 지키며 속됨을 꺼리는 것이 모두 이러한 종류였다. - 「진감선사대공탑비문」(덕민 스님 평설본)


선사의 성품을 잘 드러내는 대목이다. 최치원(崔致遠)이 쓴 비문에 따르면 생전 진감선사는 질박함을 흐트러뜨리지 않았고, 말은 기교를 부리지 않았으며, 옷은 남루한 베옷도 따뜻하게 여겼고, 음식은 쌀겨나 보리 싸라기라도 달게 먹었다고 전한다. 차를 마실 때 그 맛을 만끽하여 즐기기보다 그저 뱃속을 적시는 음료의 하나로 여겼던 면모와도 일맥상통한다.


진감선사는 국사로 임명하겠다는 왕명을 고사한 채 쌍계사에서 평생을 주석 했는데, 제자들에게 승탑과 탑비를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사후 36년경 그의 업적을 기려야 한다는 문인들의 요청이 있고서야 진감선사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왕명에 의해 승탑과 탑비가 건립됐다. 사명이 옥천사에서 쌍계사로 변경된 것도 입적 후 왕명에 의한 것이다. 이처럼 쌍계사의 차 문화에는 진감선사의 담박한 성품이 곳곳에 스며있다.


사중 스님과 대중, 사하촌 주민 모두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차를 즐겨 음용하지만, 격식을 차리는 다도(茶道)를 넘어선 일상문화에 가깝다. 차 맛에 대한 높은 기준의 품평, 제다와 음용 방식 등에서 까다로운 제약을 두기보다는 각자의 상황과 취향에 맞게 차를 곁에 두고 즐기는 모습이 인상 깊다.


지리산은 차의 산지인데 오직 화개동만 산의 서남쪽으로 수백 리 땅에 차가 나지 않는 곳이 없다. 악양면, 화개면 등은 비록 거친 농촌이지만 차를 끓여 아침저녁으로 식사 후에 늘 마시지 않는 집이 없다.     - 석전 박한영 스님, 『석전문초』


지역민들만의 독특한 차 음용법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채다(採茶) 시기가 지나 늙은 찻잎을 따서 말려 뒀다가 감기 기운이 있거나 피로한 날 대추 등을 함께 넣고 팔팔 끓여 마신다. 염증에 좋은 녹차의 약용 성분을 일찍이 알고 활용해 온 사하촌 사람들만의 가정상비약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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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문화 복원.대중화 이끄는 쌍계사


회주 영담 스님이 은사 고산 스님의 원력을 이어 쌍계사 차문화 복원과 대중화에 남다른 관심을 쏟는 것은 이러한 지역 분위기와도 무관하지 않다. 쌍계사는 더 많은 현대인들이 일상에서 차를 친숙하게 느끼고 제대로 음용할 수 있도록 이끌기 위해, 매년 봄 ‘차문화대축전’를 개최해 오고 있다. 주로 음악회 등 차와 연계한 문화행사로 진행되는데, 올해에는 청소년들이 시배지에서 촬영한 차나무 사진과 시를 작품으로 내는 ‘茶-디카시로 만나다’를 새롭게 기획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쌍계사 다맥과 전통 차문화를 복원하고 계승하기 위한 노력도 지속되고 있다. 영담 스님이 이끄는 사단법인 진감초의다맥 한국선다회가 매년 차문화 대축전의 일환으로 봉행하는 ‘진감초의다맥 전수대법회’가 대표적이다.


“쌍계사 다맥은 진감선사와 초의선사 양 축으로 전승되어 진감초의다맥, 또는 해동다맥이라고 합니다. 쌍계사 다맥을 온전히 복원하고 그 가치와 의미를 다양한 방법으로 대중들에게 알리는 일은 쌍계사 불교문화의 전통과 정체성을 확장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지현 스님의 설명에 담긴 확고한 자긍심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그럼에도 길지 않은 찻자리서 쌍계사의 ‘진감초의다맥’을 짐작하기란 쉽지 않다. 그저 스님들의 소탈한 다담(茶談)에서 진감 선사의 담박했던 삶을 어렴풋이 엿보고, 그윽한 차향에 초의선사의 선다(禪茶)세계를 좁디좁은 식견으로 상상해 볼 뿐이다. 하동 쌍계사를 내려 오는 길, 채다 시기가 지난 찻잎들이 초여름 햇살에 붉고 푸르른 빛으로 반짝인다. 그 옛날 진감선사의 눈길이 닿았던 야생차밭의 풍경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 삼신산 쌍계사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쌍계사길 59

055-883-1901ㅣhttps://ssanggyesa.net


■ 출처: 한국불교문화사업단 

템플스테이 매거진(vol.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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