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랑이 멈춘 바다에 비친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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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랑이 멈춘 바다에 비친 것들

0 개 510 템플스테이

데이비슨대학교 학생들의 해인사 템플스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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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탁탁, 죽비가 세 번 울리자 도반들은 미동도 없이 참선에

들었다. 산새 소리가 파도처럼 가까워지고 멀어지기를 반복하고

나뭇잎을 흔드는 산사의 바람결도 이어졌지만, 가부좌를 한 이들은

일시정지 버튼을 누른 영상 같았다. 그 ‘멈춤’ 속에서 얼굴에 번지던

미소는 참선을 마친 뒤엔 함박웃음이 되었다. 53명의 선지식을

찾아 떠난 선재동자처럼 멀리 미국에서 해인사를 찾아온 청춘들.


초여름, 한낮의 산사는 고요했다. 강렬한 햇살에 산새도 풀벌레도 오수에 든 듯했다. 해인사 당간 지주에서 일주문으로 향하지 않고 왼쪽 길로 10여 분을 걸어 올라 도착한 템플스테이 숙소 무아정사 툇마루에 걸터앉으니 새삼 계절이 느껴졌다.


무아정사 지붕의 그늘이 점점 짙고 길게 마당을 물들이던 오후 2시 무렵, 자박자박 발걸음 소리 사이로 탄성이 들려왔다. 모두 더위로 발갛게 상기된 얼굴에 구슬땀이 맺혀있었는데 하나같이 경이로움 가득한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전날 경주 골굴사에 묵었던 이들이 여느 절집의 것과 다름없어 보이는 기와, 댓돌, 기둥을 가리키며 짓는 신기한 표정에 익숙함은 없었다. 그들에게 해인사는 또 하나의 새로운 절, 놀라운 공간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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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학생들이 해인사에 간 까닭은?


진정으로 음악을 사랑하는 이에게 세상은 음악으로 가득하다. 그들에겐 그저 흔한 물소리, 바람소리도 각각 고유한 음악이다. 진정으로 배우려는 사람에게 세상은 배움터 아닌 곳이 없다는 생각을 일깨우는 이들이 해인사를 찾았다. 한국의 불교를 알기 위해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에 자리한 명문아츠 칼리지 데이비슨대학교의 교수와 학생 11명이 템플스테이를 하러 온 것이다.


어릴 적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지금은 데이비슨대에서 정치학과 불문학을 전공하고 있다는 3학년생 이윤재 군은 “저는 기독교 신자이지만 불교에 대해 알고 싶어서 이번 템플스테이에 참가했어요.


공부하는 데 명상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자연스레 명상과 인연이 깊은 불교를 알게 되었어요. 새로운 것을 배우는 건 언제나 즐거워요.”라고 했다. 티베트불교를 가르치는 레이첼 교수는 “해인사는 참 평화롭고 새로운 느낌을 주네요. 생생한 한국불교의 현장에 와있으니 행복합니다. 많이 배워가고 싶어요.”라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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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테를 품고 ‘지금’을 살아가는 나무처럼


새로운 경험은 새로운 나를 만든다. 경험을 선택하는 태도는 호기심에서 비롯된다. 일주문, 봉황문, 해탈문, 대비로전, 대적광전, 장경판전 등. 해인사 템플스테이 팀장의 안내를 받으며 해인사의 곳곳을 둘러보는 학생들의 얼굴은 호기심이 어려 있었다. 1,2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해인사는 뭇 생명을 품은 숲처럼 깊은 불교의 지혜와 희망을 전하는 전각과 누각, 문 등이 조화롭게 자리하고 있다.


불교의 가르침을 품은 개개의 공간은 발길을 멈추게 한다. 일주문에 걸린 주련부터 울림이 크다.


역천겁이불고(歷千劫而不古)

긍만세이장금(亘萬歲而長今)

‘천 겁의 역사가 지나도 옛일이 아니고, 만세의 미래가 이어져도 늘 지금이다.’


켜켜이 쌓인 나이테를 품고 지금 이 순간을 살아 가는 나무처럼 살아가리라 다짐해 본다. 일행이 사천왕이 보위하는 봉황문을 지나 깨달음의 세계로 향하는 해탈문을 열고 들어가 수많은 불보살의 통합체이자 궁극적 실체, 곧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비로전과 대적광전을 거쳐 장경판전에 이르렀을 때였다.


“이곳에서 뭔가 특별한 에너지가 느껴져요.”


데이비슨대학 교수였으며 현재는 같은 대학에서 교법사를 맡고 있는 이반의 말에 해인사 템플스테이 팀장은 미소 지으며 이야기했다. “1995년 유네스코에서 이곳 해인사 장경판전과 대장경판을 각각 세계문화유산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했습니다. 불교경전의 총화라고 할 수 있는 팔만대장경 경판은 800년 이상 변형 없이 보존되고 있어요.


한국전쟁 당시 김영환 장군은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끝까지 거부해 장경판전과 대장경판을 지켜냈죠. 이런 놀라운 이야기가 담긴 곳이라 특별한 느낌을 받으셨나 봅니다.”


불교의 경·율·론 삼장의 구성이 완벽하며 경판 글씨 제작에 참여한 1,600명의 글씨체가 마치 한 사람의 글씨인 양 고르게 정교한 대장경판은 모두 81,357장이다. 한 장의 두께가 3.6cm, 한 줄로 쌓으면 백두산보다 높다고 한다. 13세기 몽골의 침입이라는 국난 극복을 위해 대장경을 만든 이들의 마음과 800년의 시간 동안 그것을 지켜온 이들의 마음을 헤아려보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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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는 마음의 풍경들


“한국 사찰의 첫인상은 어떤가요?”


“아주 멋져요!”


차담 자리를 마련해주신 해인사 템플스테이 지도법사 현사 스님의 질문에 니브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고 여기저기서 “평화로워요.” “새로워요.”라는 답이 이어졌다. 스님이 “불교는 뭘까요?”라고 두 번째 질문을 하자, 이반은 “제게 불교는 삶의 모든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라고 말했다. 스님은 “오, 인상적이네요! 불교는 세상의 변화, 그 시작을 나 자신에게서 찾는 종교입니다. 온 우주를 일시에 가리는 법은 내 두 눈을 감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이죠. 불교 수행자인 스님들은 매우 단순하고도 충만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화엄경』에 나오는 ‘해인(海印)’이란 말은 불교 수행자의 자세인 정견, 곧 ‘바로 봄’과 상통합니다. 우리는 종종 욕심 때문에 대상을 바로 보지 못하지요. 내 욕심이 정견의 장애가 되지 않는지 점검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여러분과 저처럼 공부하는 사람이 잊지말아야 할 태도이지요.”라고 하셨다.


차담을 마친 후 현사 스님과 함께 공양간으로 향하는 길, 스님은 우연히 마주친 해인사의 젊은 학승들에게 멀리 미국에서 우리 도반들이 왔다고 소개해 주시며 함께 가자고 청하셨다. ‘배우는 사람’이라는 공통점이 있는 현사 스님과 학승들, 그리고 데이비슨대학교 학생들 사이에 서먹함은 없었다.


저녁 공양 후 참가자들은 범종루에서 법고를 시작으로 범종, 운판, 목어가 차례로 연주되는 소리를 들었다. 고요히 텅 비었던 경내는 뭇 중생을 제도하는 울림 깊은 소리들로 가득 찼고 가야산 일대로 울려 퍼졌다. 어느덧 푸른빛이 도는 어스름이 깔리고 있었는데 대적광전 앞마당에 그려진 ‘해인도(海印圖; 7세기 의상대사가 화엄사상을 요약해 만든 도안)’ 위를 걸으며 홀로 걷기명상을 하는 듯, 생각에 잠긴 시드니(Sydney)의 모습에 눈길이 머물렀다. 소감을 묻자 시드니는 설명하기보다 그저 느낌으로 간직하고 싶다는 듯이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대적광전에서 저녁예불을 올리고 나오니 산사는 색이 사라진 수묵화처럼 실루엣만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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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삼매를 꿈꾸며


이튿날, 참가자들은 새벽 네 시에 일어나 예불에 참여하고 해인사 템플스테이 수행공간인 선림원에서 현사 스님과 함께 참선의 시간을 가졌다. 스님은 “부처님은 뭇 중생의 마음에 불성이 있다고 하셨어요. 불성을 간직한 ‘참나’를 만나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일어나는 다양한 생각을 애써 지우려 하지 마세요. 다만 그것을 알아차리고 고요히 바라보세요.”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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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을 활짝 열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이른 아침의 청신함을 호흡하며 아스라이 보이는 가야산 능선에 시선을 두기 시작할 때 스님의 죽비가 세 번 울렸다. 그렇게 참선이 시작되자 모두 일시에 미동도 없이 참선에 들었다. 산새 소리와 바람결이 고요를 흔들었지만, 참선 수행자들은 추호도 흔들 리지 않았다. 뭉클했던 그 모습은 『화엄경』의 ‘해인삼매’를 떠오르게 했다. 파도 없는 잔잔한 바다에 모든 사물이 있는 그대로 비치듯 우리 마음의 번뇌가 멈출 때 만물이 그대로 드러나는 경지. 열린 마음으로 배움의 길을 걷는 이들이기에 해인삼매는 가능한 꿈이 아닐까.


참선을 마친 후 초록으로 가득한 가야산을 올라 희랑대를 찾았다. 희랑대에서 수행하고 계신 법유스님께서 참가자들에게 차를 내주셨다. 차를 마시면서 법당 안에 모셔진 희랑대사조각상을 바라보고 희랑대사 이야기를 듣는 느낌이 특별했다. 스님은 “조각상 가슴에 난 구멍이 보이나요? 그것은 진정한 수행자에게서 나오는 지혜의 빛이기도 하고, 희랑대사가 모기에게 피를 보시한 구멍이라고도 합니다. 대사는 저녁마다 모기들이 자신의 가슴 구멍으로 들어가서 피를 먹게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해인사에는 모기가 안 보였다고 해요.”라고 했다. 희랑대를 나와 좀 더 가야산 속으로 들어가는 일행을 향해 법유 스님은 “여름이 깊어지면 이곳에 꽃이 만발합니다. 그때 또 오세요!”라고 했다. 그 다정함이 긴 여운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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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의 지혜에 대하여


가야산을 내려온 참가자들은 인경 체험도 하고 경내를 산책하는 시간을 가진 뒤 해인사 주지 혜일 스님을 만나 차담을 나누었다. 오늘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삶의 지혜를 들려달라는 말씀에 스님은 “청춘은 꿈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을 시기이지요. 흔히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라고 하는데, 그저 마음 내키는 대로 하고 싶은 것을 한다고 하면 시간을 낭비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공공선을 고려하고 세상을 생각하는 지성과 태도로 살아가길 바랍니다.”라고 했다. 아울러 혜일 스님은 기후 위기, 전쟁, 인공지능의 팽배 등 지속 가능한 지구를 위협하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고려 이후 국난 극복의 정신적 힘으로 작용해 온 팔만대장경을 이야기했다. “대장경은 한국을 넘어 인류의 위대한 정신의 소산입니다. 그 문화의 힘을 믿습니다. 지구와 인류의 평화로운 미래를 위해 해인사에서는 5년 뒤부터 대장경 판각 작업을 시작합니다.”라고 들려주었다.


찻잔은 식었지만, 대화의 열기는 쉬 식지 않았다. 배우는 학생들과 수행하는 스님은 특유의 학구적인 에너지를 발산하며 대화를 나눴고 그 속에서 학생들은 자신과 세상을 향한 마음이 한층 성장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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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불이나 참선을 할 때뿐만 아니라 각자의 숙소에서 조용히 참선을 하는 참가자들의 모습이 여름의 가야산만큼이나 아름다웠다. 마음의 풍랑을 멈추게 하고 고요히 자신을 바라보는 이의 모습. 그 모습에서 티베트불교의 성자 밀라레파의 말이 떠올랐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 어느 것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마음으로 볼지니 그 자체가 위대한 힘을 만들어내네.”


■ 가야산 해인사

경남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22

055) 934-3000 ㅣ http://www.haeinsa.or.kr


■ 출처: 한국불교문화사업단 

템플스테이 매거진(vol.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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