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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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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한옥 


동녘이 열푸름히 열리고 희끗희끗한 서리가 엷어지고 있었다. 나는 아침 새를 쫓으러 논으로 향했다. 추수를 앞둔 즈음의 새쫓기는 내가 맡은 임무였다. 옷깃을 여미고 잰걸음으로 달렸다. 하늘에 대고 내뿜는 입김이 찬기운이 되어 뺨과 눈썹을 스쳤다. 개울을 건너고 들머리에 이르자 불그레한 아침 햇귀가 노을로 번지며 낮은 안개를 걷어 천지에 흩뿌리는 조화를 부렸다. 황금빛으로 여물어 가는 벼들은 고개를 숙인 채 아직 잠에 취해 있었다. 줄기가 튼실한 올벼들은 까끄라기를 세우고 허리까지 굽혔다. 들녘은 하얀 김을 모락모락 뿜으며 밤새 참았던 숨을 토해 내고, 참새들은 아침 먹이를 찾느라 이리저리 떼 지어 날았다. 마른 푸새 사이의 거미줄마다 이슬이 맺혔고, 논두렁을 지나는 동안 개구리들이 폴짝폴짝 뛰며 숨어들었다. 거무스레한 우렁이들이 볏줄기 아래서 쌍쌍이 노닐고, 겨울잠 갈 길을 놓친 붉으락 푸른 너불대기 한 마리가 앞을 스치며 지나갔다. 하마터면 밟을 뻔했다. 소롯길이 끝나는 끝머리 다랭이논에는 허수아비 둘이 눈을 부릅뜨고 제 앞에서 거드럭대는 왜가리 떼를 노려봤다.


참새들은 아침이든 저녁이든 시도 때도 없이 몰려와 잔치판을 벌였다. 녀석들은 영리하기 짝이 없어 움직이는 물체에는 놀라 피하지만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꿈쩍하지 않는 영악한 습성을 지녔다. 매끼에 매달아 놓은 소리통을 흔들어도 못들은 척하는 녀석들이다.


새막에 다다랐다. 비를 피하거나 쉴 참에 그늘을 만드는 논둑에 지은 볏짚 거적 움막이다. 나는 녀석들을 쫓아내기 위해 새막 안에 놓아둔 비장의 무기, 대총을 꺼냈다. 대총은 굵은 대나무를 잘라 십자 모양으로 위쪽 부분만 쪼갠 다음, 그사이에 나뭇가지를 끼우고 노끈으로 묶어 만든 새를 쫓는 무기였다. 총알은 논두렁의 흙이다. 쪼개어진 부분을 논두렁에 힘껏 누르면 흙덩이가 묻어 나오고 그 흙덩이를 쏘아 팔매질을 하면 참새들은 날 살려라 하며 도망을 쳤다. 가을 아침 나의 임무는 그렇게 대총을 쏘아 참새와의 일전을 치르는 일이었다. 


농촌의 아이들은 저마다 농사일을 돕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웬만한 집안 일도 스스로 찾아 했다. 꼴을 베거나 가축을 돌보는 일도 대부분 아이들 몫이었다. 낫이나 호미, 괭이, 삽, 소스랑 같은 농기구 사용법은 기본이고, 톱질이나 칼질, 도끼질도 잘했다. 생존을 위한 노동이 오히려 학교생활보다 중요하다는 인식이 농촌 아이들에게는 깊게 배어 있었다. 논밭에 갈 땐 습관적으로 지게를 지고 괭이나 삽을 챙겼다. 주어진 노동을 해야 할 몫으로 여겼고 어른들처럼 지긋지긋한 의무라 여기기지 않았다. 아이들은 날짐승 길짐승들이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삶의 방편을 보고 자랐다. 노동을 통해 육체적 고통의 한계, 끈덕진 인내와 근면을 익히며 비바람, 눈보라 속에서 강골로 커 갔다. 


학교에선 이따금 야외 노역도 학습이나 수업으로 쳤다. 그런 날은 책상 앞에 매달리는 것보다 더 신바람이 나고 달가웠다. 아이들은 화단을 꾸미기 위해 해변에 나가 조약돌을 모았고, 어깨에 메고 머리에 일 만큼 책보에 싸서 날랐다. 학교 앞 신작로 양편 아득한 곳까지 코스모스 모종을 심는 날엔 호미를 하나씩 들고 왔다. 수풀이나 방천, 야산 묘지 근처에서 잔디 씨를 훑어 모으고, 움퍽 패인 운동장을 흙을 퍼다 골랐다. 잔솔밭 송충이를 잡고, 솔방울을 모았으며 등굣길엔 손수 베어 묶은 풀단을 메고 와 퇴비를 쌓았다. 누구 하나 불평하거나 꾀를 부리지 않았다. 오히려 공부보다 더 신나게 몸을 놀리고 마음을 키웠다.


밭에서 괭이질을 하거나 산에 올라 나뭇짐을 지게에 져 나르는 일에 비하면 나의 새쫓기 일은 노동이라기보다 놀이에 가까웠다. 밭일을 하고, 추수 일을 돕고, 땔감 나무를 해 오고, 가축에게 먹이를 주고, 새를 쫓는 일은 시간이라는 품을 들여 삶을 여물려 가는 학습이었다. 나는 지금 아버지가 내어 준 새쫓기 과목 숙제를 하고 있다. 그것도 혼자서 독학 중이다. 대총으로 새를 쫓으며 논두렁을 걷는 나는 개구리와 우렁이가 있고, 너불대기가 있고, 왜가리가 목을 빼고 끄악대며, 허수아비 친구가 있어 외롭지 않았다. 참새들이 떼 지어 다니며 약을 올리지만 녀석들은 나의 말 상대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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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훠-이 훠-이. 저리가!”


대총을 휘두르며 지르는 고함 소리를 녀석들이 알아들었나 보다. 


“짹짹! 짹짹! 총알이다. 피해라!”


참새들은 나를 놀리기라도 하듯 지저거리며 이리저리 헤집고 다녔다. 허수아비 위에 앉아 흘레질하는 녀석들은 기분 좋은 소리를 찢어지게 내며 꽁지깃을 까딱거렸다. 다랭이논 건너에 밀짚 모자를 쓴 농부 한 사람이 볏줄기 사이로 보였다. 그는 대총 대신 긴 파대를 휘감아 둘러치며 딱딱 태질을 했다. 참새들이 놀라며 사라지자 자식들을 보살피듯 벼 머리를 쓰다듬은 다음 뒷짐을 지고 사라졌다. 



풀잎이 시들어 누운 들판은 고요의 세상이다. 하늘은 높고 가을 샛바람에 벼들이 고개를 흔들거리며 속삭일 뿐이다. 새막에 기대어 누웠다. 새벽잠을 놓친 탓인지 졸음이 밀려왔다. 허수아비도 팔을 늘어뜨리고 꾸벅꾸벅 졸았다. 


배가 고팠다. 배 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참새들도 배가 고픈지 논두렁에 숨어 떠날 생각을 안 했다. 달랑 몇 개남겨 둔 까치밥 홍시를 따먹을 때, 어머니가 야단치던 말이 생각났다. 


“새들도 공중에서 나느라 얼마나 고생허는 줄 알어? 가들은 먹을 걸 쟁여 놓지 않는단 말이여!”


나를 우습게 여겼는지 참새들이 다시 우르르 날아들었다. 나는 새총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가 머리 밑으로 깎지를 끼고 드러누워 참새들에게 말했다.


“그래, 배 속에라도 많이 채워라!”


<이한옥 소설집 ‘바람모퉁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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