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둣빛 행복이 움트는 목장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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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둣빛 행복이 움트는 목장을 가다

0 개 1,965 오소영

11월 중순 지금보다 더 포근하고 바람 한 점 없이 잔잔한 구월 어느 날이었다. 길을 나설 때면 소풍가는 아이처럼 설레는 마음은 예전이나 조금도 다름이 없다. 이 다행스러움을 오래오래 변함없이 지키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북쪽으로 달리는 길은 무한히 뻗어 있다. 코로나에 갇혀 있던 답답함이 일시에 물러났다. 마스크도 벗어 던지고 시원한 공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셨다. 눈 앞에 펼쳐진 푸른 세상 저 멀리 촘촘한 새털구름에 하늘빛이 얼룩져 있다.


도심을 벗어나면 괜스레 고향을 그리는 나그네가 되기도 한다. 시골에 살아본 적도 없는데 어디선가 낯익은 개가 반갑게 꼬리치며 달려 나올 것만 같다. 낯선 땅에서 살아가는 영원한 나그네의 가슴 속 향수가 아닐까?


고속도로를 벗어나 하염없이 푸른 들판을 달렸다. 멀찍이 왼편 비스듬한 언덕 위로 빠알간 지붕이 보였다. 풀로 뒤덮인 좁은 길을 따라 문 안으로 차를 들이댔다.(여기가 맞을 거야) 집안이 너무 조용해서 잘못 왔나 하는 마음에 잠시 주춤거리는데 현관문이 열렸다.


아! 반가운 얼굴, 그녀가 나왔다. 우리를 초대해준 사람이었다. 멀고 낯선 목장에서 그녀를 만나다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키 큰 여인의 뒤에 더 훤칠한 남자가 웃고 있었다. 처음 대면하는 사람이 어찌 그리도 낯설지가 않은지. 늘 보는 이웃 같았다. 그가 성큼 내려와서 정식으로 인사를 하고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내 나라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전혀 서먹하지가 않았다.


점심 준비를 하다가 나온 그녀가 바쁘게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초면인 우리를 남편에게 맡겨도 안심이 되는 모양이었다. 편하게 자기 일을 계속하러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이 느긋해서 보기 좋았다.


신을 벗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신 벗고 들어오세요. 여기는 한국식입니다. ㅎㅎ.”


아 참. 그녀가 이 집에 안주인이었지. 당연히 우리식으로 신을 벗어야지. 가벼운 웃음이 흘러나왔다. 남자가 집 안을 두루 구경시켜 주었다. 너무 옛날 집이어서 규모에 견줘 조금은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 넓지 않은 거실은 정리가 덜 된 듯한 어수선함이 있었다. 조금씩 수리를 하는 중이라니 곧 면모가 달라질 것이었다.


1870년대에 지었다고 하니 150년의 나이를 먹은 낡은 집이었다. 그런데도 창틀 하나 비틀린 데가 없이 고풍스럽고 묵직한 느낌이 들었다. 그의 조상들이 직접 지은 집에서 대대로 살아왔다. 그 역시 그 집에서 태어났고, 한 번도 다른 곳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고 했다. 조상이 물려준 터전에서 소들과 함께 오늘에 이른 토박이였다. 이제 더는 목장을 물려받을 사람이 없단다. 사람도 세상도 많이 달라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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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가 양지에 놓인 식탁 옆으로 자그마한 구식 장식장이 서 있다. 그 안에 진열된 찻잔들은 자기 어머니의 애장품이라고 했다. 우리가 보기에는 특별하게 화려한 것도 대단해 보이지도 않건만 깊은 애정의 눈으로 그 물건들을 설명해 주었다.


팔십 대 중반인 어머니는 막내아들과 또 다른 목장에서 사신다고 했다. 요즘 한국인 새 며느리와 함께 색다른 한국 음식도 맛보며 행복해하신다고 좋아했다. 뿌리가 깊이 박힌 고목처럼 든든함이 느껴지는 가정이구나. 그녀의 선택이 옳았음을 알게 했다.


직접 심어 거뒀다는 갓김치와 오물쪼물 무쳐 내온 나물에 미역국을 끓였다. 조신하게 미역국을 떠먹는 그가 전혀 외국 사람 같지 않았다. 따뜻한 정이 물씬 묻어나는 믿음직한 동기 같았다.(괜찮은 남자를 만났구나) 사윗감을 물색하던 딸의 엄마처럼 마음이 놓였다. 한국 사람은 생일에 이 미역국을 꼭 먹는다고 설명을 해주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열심히 닭 날개를 뜯었다. 아무래도 나물 반찬에 흰밥은 아니었나 보다. 20년을 남자 혼자서 지킨 우중충한 집이었기에 손 볼 데가 많아서 늘 바쁘단다. 즐거운 비명같이 들렸다.

 

내가 알던 ㅇㅇ 엄마, 그녀를 알고 지낸 게 20여 년이 되었다. 처음 와서 모든 게 낯설었던 내게 그녀는 늘 자상한 도우미 역할을 해 주었다. 몸매가 날씬하고 얼굴이 하얀 서양인 같은 여인, 언제나 상냥하고 친절해서 나 말고 다른 어른들도 많이 좋아했다.


늘 명랑했던 그녀는 딸 둘을 혼자 키우고 있었다. 오랫동안 지내오면서 어느새 우리는 모녀 같은 사이가 되었다. 열심히 일하는 틈틈이 빈 가슴의 허허로움을 호소해 오는 때가 종종 있었다. 그 진심이 내 가슴 깊이 스며들어 같이 공감하고 아파했다. 나는 인생을 먼저 살면서 겪은 경험을 이야기해 주며 그를 위로했다.


그의 외로움이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어쨌든 아이들이 다 클 때까지는 기다려야 한다고 말해 줄 수밖에 없었다.


점심시간에 시티 식당에서 우연히 만날 때가 몇 번 있었다. 남자 직원들과 함께 하는 자리에서는 ‘그 중에 혹시 그녀가 마음 둔 남자가 누구 없을까?’ 하는 마음으로 혼자 신경을 곤두세우기도 했다.


지난해 이맘때쯤이었을까? 오랜만에 그녀가 전화를 했다. 그 어느 때보다 밝고 낭랑한 목소리였다. 대단히 반가웠다. 괜찮은 사람을 만났다는 좋은 소식이었다.(드디어 임자를 만났구나.)


지난 7월 어느 날이었다. 전화가 왔다. 그 남자와 결혼을 해서 W시에 산다고 알렸다. 먼 길이지만 꼭 한번 놀러 오라는 부탁을 곁들였다. 말소리가 안정적이었다. 전과는 아주 달랐다. 행복해하는 모습이 안 봐도 뻔히 보였다. 다시 시작한 그녀의 두 번째 인생이 분홍빛 화사함으로 내게 전해졌다. 저으기 마음이 놓였다. 꼭 가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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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고 목장 구경에 나섰다. 벌판은 상당히 춥다며 두툼한 잠바를 내게 입혔다. 청바지를 입은 그녀가 긴 장화를 신고 마당으로 나섰다. 너무나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남자는 바람이 차다며 아내한테 게이터(Gator) 운전을 맡기고 나를 그 옆에 앉혔다. 남자들은 건초더미를 의자 삼았다.


꼬불꼬불하고 거친 언덕길을 거침없이 내달리는 여인.


“이미 목장 아줌마가 다 되셨네요.”


일행 중 젊은 분이 제대로 한 말이었다. 내가 먼저 하고 싶은 말이었다. 정말 아주 오래전부터 그 일을 해 온 사람같이 하나도 서툴지 않았다.


“도시 여자가 시골에서 살려는 생각을 어찌했을꼬. 아무리 좋은 배필을 만났어도 목장 일이 힘들지 않아요?”


“아녜요. 저 시골서 나서 자랐어요. 고향에 온 것처럼 전혀 낯설지 않고 재밌어요.”


내 기우를 일언지하로 일축해 버렸다. 함께 하는 사람이 좋으니까 그 어떤 일도 두렵지 않은 것이다. 빛나는 행복이 그녀의 표정 속에 낱낱이 드러나 있다.


청명한 하늘에는 점점이 흰 구름이 떠 있다. 넓은 목장을 작은 몸집의 게이터가 툴툴거리는 소음을 내며 휘젓고 다녔다. 평원의 바람이 정말 차가웠다. 100여 마리의 소가 모여 있는 우리로 들어갔다. 소들이 우르르 앞으로 모여들었다. 그녀는 내게 긴 막대를 한 손에 쥐여주며 한 손으로 건초를 흩뿌려 먹이를 주어보라 했다. 가깝게 와서 받아먹는 소들의 큰 입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두려움에 자꾸만 뒷걸음을 치게 된다. 멀찍이서 바라보니 그녀가 소들 가운데로 깊이 들어가 자연스럽게 먹이를 주고 있었다. 소들과 함께 장난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일체감에 놀랐다.


그렇게 빨리 적응하고 잘 사는 모습을 꼭 나에게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홀로 긴 세월을 견뎌낸 시간은 이 남자를 만나기 위함이었을까? 어떤 기회가 오기까지 기다림의 보상은 이처럼 큰 것이구나. 느긋한 시선으로 여인을 바라보는 남자의 모습도 지켜봤다.


목장 곳곳에 잘려 나간 고목은 마치 조각가가 잘 다듬은 예술작품 같았다. 제각기 회색의 모습으로 하늘을 배경 삼아 들판 위에 서 있다. 마치 인위적으로 세운 것처럼 푸르기만한 심심함에 멋을 더했다. 들판 멀리 내려다보이는 마을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내려오는 길에 게이터 운전대를 우리에게 맡기고 운전을 해보라고 해서 별난 경험도 했다. 새로 태어난 어린 송아지들의 순한 눈빛, 어미를 따르듯 사람들 곁을 겁 없이 졸졸 따라다니던 귀여운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송아지들에게 때맞춰 밥을 주고 어루만지며, 작은 뜨락에 온실을 만들어 식물의 싹을 틔우는 ㅇㅇ 엄마.  이제 아이들은 다 커서 엄마 곁을 떠났다. 그녀는 한 남자의 아내로서 새로운 삶에 행복해질 차례만 남은 것이다. 어머니는 위대했지만 아내의 모습은 그지없이 아름다웠다.


그들의 행복 바이러스에 우리도 전염이 된 듯했다.(왜 이렇게 기분이 가볍지…) 돌아오는 길에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그녀가 선물로 안겨준 바이올렛 화분에서 방금이라도 꽃이 피어날 것만 같다. 빨간색 분홍, 그리고 흰 꽃망울. 그녀의 마음이 담긴 정열의 빨강 꽃이 제일 먼저 필 것만 같다. 그 가정의 행복이 영원하기를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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