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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나라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뉴질랜드에서 민사소송의 (고용소송 및 가정법원 소송 포함) 판사들은 증인들의 증언보다 확실한 ‘당시 서류증거’ (contemporaneous documents)를 중요시합니다. 재판이 사건 즉시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보통은 최소 1년 혹은 더 지나서 열리는데 그 동안 사람의 증언은 개인 인지나 기억력의 문제로, 혹은 영어이해의 문제로, 혹은 개인 이익의 문제 등으로 왜곡될 수 있는데 반해서 서류는 사람이 고의로 조작을 하지 않는한 (그 자체가 심각한 범죄라 이런 일을 거의 본 적은 없습니다) 왜곡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사건을 여러명의 증인이 목격했는데 다 조금씩 다르게 기억하고 증언하는 일도 심심치 않게 벌어지고, 그럴 때 결정적 증거가 없다면 판사들이 증인들의 신용도까지 결정해야 하는 등 일이 복잡해지곤 합니다.
당시 서류증거의 예시로는 상황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보통 당사자끼리 주고받은 서신 (카톡메시지, 문제메시지, 이메일 등) 및 거기에 포함된 첨부서류들, 계약서 및 은행잔고 등의 서류, 녹음파일, 그리고 CCTV등이 많이 이용됩니다.
그렇다보니 저도 초기 상담은 서면으로만 하고 있습니다. 대부분 전화를 해서 상황 설명을 하려고 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저는 일단 관련된 서류들부터 보내주십사 요청을 드립니다. 그렇게 서류를 먼저 검토하다보면 본인의 사건인데도 불구하고 구두로 설명해주신 부분들이 놀랍도록 틀릴 수 있다는걸 항상 느끼곤 합니다. 예를 들어 3월 1일에 해고되었다고 하셨는데 카톡메시지를 보면 3월 2일에 해고된 것으로 나와있는 등의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서요.
이렇게 뉴질랜드에서는 결정적 (서류)증거가 중요하기 때문에, 민사소송에서 그걸 조기에 공개해야 하는걸 다양한 방법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방법원에서는 처음 소장을 송달할 때, 소장 작성을 위해 사용된 핵심 서류증거들을 “초기 공개” (initial disclosure - 정식 서류 명칭은 list of documents relied on) 로 같이 송달 혹은 공개하도록 되어있습니다. 그 이후에 보통은 당사자들끼리 판사주재 조정미팅을 가지고, 합의가 실패하면 재판으로 진행되기 전에 “서류 전체 검색 및 공개 (full) discovery” 단계를 거칩니다. 이 소송 관련해서 모든 관련있는 서류들 (심지어 나에게 불리할 수 있는 서류들도) 을 전부 다 찾아내서 목록을 만들고 서로 공개하는 작업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재판에서 사용될 서류들은 bundle of documents 로 묶여서 제출되고, 거기에 제출되지 않은 서류들은 보통 재판에서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드라마에서처럼 숨겨두었던 자료를 재판에서 짠! 하고 보여주면서 역전 재판을 만드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변호사들이 그렇게 고객이 모든 서류를 찾아보도록 협력하고, 찾아낸 서류들을 검토하고, 상대방에게 공개하고, 또한 상대방의 서류를 받아서 검토하는 작업은 엄청난 시간을 소비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위 방법은 초기 비용이 비교적 크지는 않은데, 후반부 재판 준비 비용이 많이 드는 방법입니다.
고등법원에서도 원래는 지방법원과 비슷한 절차를 밟았는데, 올해부터 절차법이 변경되었습니다. 이제는 대부분 소송에서 처음부터 나에게 유리하거나 불리할 수 있는 서류들을 전부 찾아보고 진술서 형태로 제출해야 합니다. 그래서 초기 비용이 비교적 커진 대신에, 서류들이 처음부터 다 나와있으니 재판까지 가지 않고 합의가 될 확률은 더 켜질 것 같다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위와 같은 절차가 있음에도 상대방이 일부러 자기에게 불리한 서류를 숨기고 공개를 하지 않을 것 같다고 걱정하시는 고객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하지만 변호사가 있는 경우 자기 고객에게 적절한 질문을 하면서 관련된 서류가 무엇이 더 있을지 찾아보는 의무가 있고, 또한 A라는 서류를 보면 B서류가 언급되어있어서 B서류도 있으신지 물어보는 등 서류공개에 최대한 협력을 하도록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변호사가 없고 당사자가 직접 소송을 맡는 경우 그러한 보호막이 없는 건 사실입니다. 그래서 서류공개가 미흡한 경우도 많고, 그 중 우리가 특별히 어떠한 서류가 빠진 게 있다고 설명할 수 있다면 (예를들어 이메일들이 전부 다 공개되었는데 3월은 통채로 없다던지, 아니면 은행잔고 서류가 당연히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없다던지 등등) 법원에 특정 서류공개 요청을 신청할 수도 있습니다.
가정법원에서는 소장이라는게 따로 없고 모든 주장은 진술서(affidavit) 형태로 제출을 하는데, 서류증거는 그 때 같이 첨부해서 제출하도록 되어있습니다. Affidavit은 진술서라고 흔히 번역해서 사용하는데, 다른 변호사나 Justice of Peace, 법원 직원 등을 방문하고 그들 앞에서 “(재판에서 사실만 말할 것을 선서하듯이) 모든 내용이 사실임을 선서합니다” 라고 한 후에 사인을 하고 증인도 똑같이 사인을 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형식적으로 보이지만 거짓을 증언하면 엄연히 위증죄 (perjury) 로 처벌받을 수 있는 중요한 단계입니다. 즉 이렇게 하면 제출하는 모든 서류도 내가 그 진실됨을 보장하는 과정을 거치는 셈입니다. 그렇게 제출된 서류들만 재판에서 사용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정 법원에서는 일반 민사와 같은 “서류 검색” 단계는 없습니다. 내가 알기로 상대방한테 이러한 서류가 있는 것 같다라는 어느정도 정보는 있다면 특정 서류공개 요청은 가능은 합니다. 예를 들어 재산분할 소송에서는 당사자가 “모든 재산과 빚 (assets and liabilities)”에 대해 진술서 형태로 공개를 하도록 되어있습니다. 물론 한계도 있습니다. 예를들어, 상대방이 작정하고 Family Trust 자산을 숨겼고 우리는 그것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으면 추적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쪽에서 상대방이 뭘 숨겼는지 대충이라도 증명할 수 있다면 법원에 특별 재판을 신청하고 상대방의 재산 비공개에 대해 심문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도 합니다.
고용소송 중 첫 고용위원회 (Employment Relations Authority, ERA) 에서도 별도의 서류검색 및 공개 단계는 없습니다. 다만 ERA에서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서류를 요청할 권한이 있기는 하고, 보통 고용법은 고용주로 하여금 대부분의 서류를 작성하고 관리하도록 하고 있기 때문에 (대표적으로 고용계약서, 급여 및 근무시간기록, 휴가사용기록 등) 직원이 요청하면 ERA에서 고용주로하여금 공개를 강제할 수 있고 응하지 않을 시 벌금(penalty)을 부과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소송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혹은 시작하고 나서라도) 제3자에게 서류공개를 요청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인스타그램에서 누군가 내 명예를 훼손한 경우, 미국의 Meta회사를 상대로 특정 ID의 IP주소를 공개하라고 하는 식으로요.
독자분들께서도 소송을 염두하고 계신다면 서류증거의 중요성을 인지하시고 서류공개 절차를 적절히 이용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