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빌리지의 오후 한때 (수요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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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빌리지의 오후 한때 (수요일기)

0 개 813 오소영

물먹은 풍선처럼 하늘이 무겁게 내려앉아 있다. 엷은 바람만 스쳐도 곧 물폭탄을 터트릴것 같다. 하늘을 아무리 살펴봐도 어느 한 귀퉁이 열릴것 같지가 않다.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가는 쪽으로 마음이 정해지면 버스 시간이 촉박해서 망설일 틈이 없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집을 뛰쳐나섰다. 날씨 탓 일까? 발걸음이 천근인양 무겁다. 돌아설까 주춤거리길 여러차례, 그러저러 버스 정류장까지 가서 의자에 앉으려는 순간이었다.


때를 맞춘듯 이 ㅇ옥 아우님이 전화를 해왔다. 오늘 행사에 참석하려고 하는데 형님도 갈거냐고 물었다. 응원군을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역시 나서길 잘했구나.


일단 버스에 자리를 잡아 앉으면 마음이 그리 편할 수가 없다. 교통비도 안내는데 운전 하느라 신경 안써도 되니 얼마나 좋은가.


매주 무지개 합창연습을 갈때면 버스에서 노랫가사도 외우고 묵주알을 돌리기도 했다. 


하버 브릿지를 건널땐 물위에 한가히 떠있는 요트들을 보게된다. 그 때마다 한강을 유유히 흘러가는 돛단배가 떠 오른다. 강변에서 놀던 어릴적 일들이 어제 일인것처럼 눈 앞에 겹쳐진다. 흘러가는 물은 분명 어제와 다를텐데 옛날을 추억하게 해주는 정서가 고향가는 길처럼 정겹다.


무한대로 펼쳐진 푸른 하늘은 그 빛깔처럼 청명한 희망을 속삭여준다. 흰구름들의 노니는 모습은 멋진 묘기로 놓칠수 없는 선물 이기도 하다.


코로나에 발이 묶이기까지 늘 그렇게 풍류객이 되어 건너 다니던 하버.


정말 오랜만에 버스에 앉아 하버를 건너게 되었지만 아니었다. 검은 구름밑에 희뿌연 안개로 뒤덮인 바다는 낯설기만 했다. 


단체모임이 끝나면 오후 합창단 초청공연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제 단원으로서의 책임은 벗어났다. 십수년을 같이한 동료들의 공연을 응원이라도 해야했다. 몸은 비록 떠났지만 무궁한 발전을 바라는 간절함과 끈적한 사랑은 남아있기 때문이다.


지난세월 뜨거운 열정으로 활동했던 일들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하나둘씩 떠올랐다.


처음 이 멀고 외진 섬나라에 왔을 때, 다른 문화 낯선 사람들속에서 어찌 살아가야 할지 걱정이 참 많았다.


이름도 고운 무지개 합창단이 아니었다면 지치도록 외롭게 살았을 노후 인생이었다. 소외된 노후의 삶을 빛나는 영혼으로 바꿔주신 단장님께 늘 고마울 따름이다.


우리의 노래 전통 예능을 선보이며 벌써 16년차가 되었다. 이제 뉴질랜드에서 한국 문화를 알리는데 열심인 시니어 합창단으로 자리매김을 하게되었다.


매년하는 정기공연외에 각종행사에 초청공연 으로 자리를 빛내기도 했다. 양로원 병원 위문으로 아픈이들을 위로도 했지만 가장 인상깊었던 공연은 역시 시드니 원정이었다. 합창제에 참석해 새파란 청춘들의 열기속에서 함께했던 그 공연은 정말 특별했다. 무섭게 불타오르던 거리공연은 또 어땠는지...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관광객들 숲, 오페라 하우스 앞에서 목청을 돋우어 노래를 불렀다. 바다로 하늘로 멀리멀리 퍼져나갔을 코리아의 메시지 였다.


몸은 고국을 떠나있지만 조국 대한민국의 메신저 역할을 톡톡히 해낸 것이다. 얼마나 멋진 쾌거인가.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뜨거워진다.


크루즈 여행 때도 역시 무지개는 고운 빛깔로 떴다. 족두리에 알록달록 색동저고리 깡뚱 치마, 그것만으로도 여행객들에겐 눈요기로 충분했다. 거기 더해서 정식 무대에 올라 꼭두각시 춤까지. 환호하던 사람들 함성과 박수소리가 지금도 생생히 들려오는 듯 하다. 예기치않은 이례적인 공연에 직원들까지 일손을 놓고 즐거워했다.


이미 의상까지 준비해 간 단원들 용기와 의욕에 힘을 실어준 가이드님. 단장님과 함께 유능한 섭외가 통했던 것이다. 코리안의 대찬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름다운 추억이 끝도없이 이어지는 지난 세월. 나에게는 이제 그 한 세월이 막을 내렸다.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이니 순응할 수밖에...


합창단 16년차에 10년 총무직을 맡았었다. 할만큼 했다고 나름 생각했다. 그 사이 한번도 고국 나들이를 하지 못했다. 주변머리 없는 짓 인걸 알지만 맡은 일에 충실하자는 고집 때문이었다. 바보스럽기도 했지만 내 맘이 편하기 위해서였다. 시작하면 끝을 보는 성격탓에 무슨 일이든 시작하면 10년은 한 우물만 팠다.


작년 이맘때 쯤 허리에 갑자기 큰 문제가 생겼다. 세번이나 있었던 공연에 지팡이에 의지해 무대에 올라야 했다. 이건 아니지. 너무 조심스럽고 민망했다. 단원들에게 폐 끼치는 것 같기도 하고 견딜수 없는 모멸감에 시달렸다.


이제 그만 하자. 조금 아쉬움이 남았을 때 떠나라는 말이 생각났다. 아직도 식지않은 열정일랑 새로오는 후배들에게 넘겨주자 라고 마음을 정했다. 거기까지.


지난 2월 어느날 졸업식이라는 명분하에 나는 합창단의 단복을 넘겨주었다.


그들과 합석 안한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불청객이란 생각이 들었다. 물에 기름처럼 겉도는 서먹한 느낌에 개운치가 않았다. 


가야금 연습 가락을 따라 미친척 춤사위 흉내도 내보고 괜스레 너스레를 떨어본다. 피붙이들처럼 형님 아우 하면서 정이 든 친구들이다. 얼굴보면 반갑다고 전과 다르지 않게 대해주는 분들 이건만. 날씨도 궂은데 집에서 편하게 낮잠이라도 잘것을 괜히 따라나섰나?


개도 안 물어가는 알량한 자존심 따위는 이제 제발 버려야 할텐데... 


목적지는 서쪽 지역이었다. 사는 곳에서 멀었지만 내가 지나다니며 자주 보아오던 깔끔한 단지였다. 지은지 오래되지 않은 새 건물로 눈길을 끌었던 아파트였다.


도착 바로직전 참았던 하늘에선 드디어 빗방울을 떨구기 시작했다. 무거운 마음에 덜컥 겁이났다. 바람도 예사롭지 않은데 돌아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불안해졌다. 집에서부터 망서렸던 일 이 급기야 벌어졌던 것이다. 내 마음을 알리없는 차는 지하 주차장으로 가볍게 미끄러져 들어갔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저쪽에서 마주오는 어느 여인이 있었다. 그가 싱글싱글 웃으며 다가왔다. 우리는 서로가 아는 얼굴이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어쩐 일이세요? 의아해 하는 나를 보며 여기 입주민이라며 웃어주었다. 개인적으로 자주 만나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유능한 분답게 아는 사람이 많은 여사님이다. 


안내역을 맡았는지 모두를 반갑게 안으로 안내 해 주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안내된 룸은 시원하게 밝고 넓었다. 앞쪽에는 홈 바가 있고 한쪽으로 피아노가 놓여있다. 아담하고 폭신한 쇼파가 삼삼오오 작은 테이블을 에워싸 놓여있다. 와인도 마시고 커피도 마시며 즐기는 휴식처였다. 시설이 꽤 괜찮은 빌리지라는 걸 분위기로 알수 있었다.


무지개 단원들은 단복으로 갈아입고 여기저기 둘러앉아 늘 그렇듯이 수다판이 벌어졌다. 더러는 사진 찍느라 모였다 흩어지고....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단원들 얼굴을 마주하며 가라앉은 기분을 추스렀다. 신입단원들이 여러명 있을줄 알았는데 결석을 했는지 안보여 아쉬었다. 


내 옆에 자리했던 한 분은 암 투병을 하다가 며칠 전에 하늘나라로 가셨다. 합창단에 처음있는 슬픈 소식이었다.


흰저고리 녹색치마 단복이 화사했다. 점점이 봄바람에 흣날린 여린 나뭇잎처럼 예뻤다. 내가 입었던 단복은 누구에게 돌아갔을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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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도 없는데 어디서 공연을 하나?했는데 피아노 곁으로 단원들을 불러 세웠다. 둘러보니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해 자리를 채워나갔다.


안내역을 맡았던 여사님이 어느새 새까만 정장 차림으로 마이크를 들고 앞으로 나섰다. 오늘 공연에 사회를 맡으셨구나.


아마도 그 여사님으로부터 공연이 이루어진게 아니었을까? 코리안의 위상이 돋보이고 참으로 멋졌다. 늘 겸손함으로 누구나 편하게 다가갈 수 있었지만 여사님은 역시 지성인이었다. 유창한 영어로 현지인 입주민들에게 합창단을 소개했다.


그 날 공연에는 두 합창단이 함께 노래를 불렀다. 뉴질랜드 현지인들과 코리안이 어울려 우의를 다지는 시간이었다. 비록 간소한 행사였지만 참으로 뜻깊은 공연이었다.


무지개 합창단은 홀로 아리랑, 그리고 가야금 연주, 하모니카 독주를 했다.


두 합창단이 함께 부른 노래는 아리랑과 포카레카레였다. 현지 단원들은 연령대가 많이 높았다. 거의가 90을 넘으셨다니 놀랐다. 노인들이 언제 익혔는지 우리말 아리랑을 멋들어지게 불렀다. 인종의 벽을 넘어 함께 어울려 열창하는 그 모습이 참으로 감동이었다.


무지개 합창단 16년 역사속에 기록으로 남을 한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언제 어느 곳에서든 최선을 다하는 무지개 합창단. 내 식지않은 열정의 한끝이 오래오래 남아있을 친정같은 단체.


관람석에 앉아 신나게 박수로 응답하며 뭔지 알수없는 감동에 전율을 느꼈다. 그들과 저물어가는 인생 막바지의 공감대가 아니었을까?


조용히 앉아 노래를 경청하는 모든분들의 마음도 내 마음과 다르지 않으리라고 생각되었다. 

 

공연은 끝났지만 또 한가지 남은 일이 있었다. 따끈한 파이와 음료수로 찾아온 손님을 대접해주었다. 바로 구워 바쁘게 날라다 놓는 정성이 음식만큼이나 따뜻했다. 유니폼을 입은 아줌마들의 온화한 미소와 친절이 더할수 없이 정겨웠다. 평소 이 빌리지 안의 부드러운 분위기를 짐작하기에 충분했다.


고령임에도 합창단을 만들어 노래도 부르고 즐겁게 생활하는 원동력이 저들에게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것 같았다.


환한 미소로 손을 흔들며 배웅해주던 어르신들 덕에 돌아서는 등뒤가 후끈했다. 밖에 나오니 시작된 비는 끊임없이 내렸는지 온 세상이 어둡고 축축했다.


사실은 얼마전에 입단한 막내와 나는 막역한 사이였다.


“형님 이따가 끝난 다음에 저녁 같이 하시고 집 에 모셔다 드릴께요”


우리는 그렇게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미 파이로 배를 채운 우리는 서로 마주보며 웃었다.


“오늘은 틀렸네 다음 기회로 해야겠지..”   


추적추적 내리는 저녁 빗길을 집으로 달렸다.


“어때 재밌잖아. 무지개 합창단 들어오길 역시 잘했지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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