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착스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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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착스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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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양사 매화꽃이 진 자리마다 푸른 잎이 돋더니, 어느새 매실이 잎 그늘에 숨어 노랗게 익어가고 있다. 나무들은 본색을 드러내고 생명력을 폭발시키며 짙푸르게 변해간다. 어린 날, 나무가 제 몸 밖으로 밀어내는 꽃과 잎, 가시, 열매 등을 보며 그 묵묵하고 끈질긴 행위가 무섭고 징그러워 한동안 나무를 피했던 적도 있다.


문학 관련 학과를 졸업한 지 이십 년도 훨씬 지난 올해, 나는 등단을 했다. 여러 사정으로 매년 공모전에 참여했던 건 아니지만, 직감적으로 나의 데뷔 시기가 아주 늦게 오리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지난 5월 23일에는 제20회 세계문학상 시상식이 있었다. 여러 부문의 당선자가 함께하는 신춘문예 시상식과는 달리 오롯이 나 한 사람을 위한 자리였다. 평일 바쁜 시간임에도 얼굴을 비춰준 사람들과 양팔을 벌려도 다 안을 수 없을 만큼 풍성했던 꽃다발들. 내 생에 잊지 못할 하루가 만들어졌다. 기념사진을 찍을 즈음, 오랜 대학 선배가 축하의 말끝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진짜 악착스럽다, 악착스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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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악착’이라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악착(齷齪)은 치아를 뜻하는 부수가 포함된 한자로 원래 ‘잗다랗다’, 곧 자잘하다는 뜻이었는데 점차 이가 촘촘하게 난 모양이거나 이를 앙다문 상태라는 의미로 확장되었다.


마음속의 각오가 크게 서 있고, 뭔가 기를 쓰고 덤벼들거나 끈기 있게 행동한다는 의미를 나타내기도 한다.


중국에서는 양의 소명태자가 편찬한 시문집 『문선』에서 ‘악착’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당시에는 ‘자잘한 일에 구애되다’라는 뜻으로 쓰인 모양이다. 『국립국어원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① 일을 해나가는 태도가 매우 모질고 끈덕짐. 또는 그런 사람.(예: 악착을 부리다./ 나는 내 신체 얘기가나오면 신경이 곤두섰다. 그만큼 나는 다른 사람보다 표 나지 않게 하느라고 악착을 떨며 일했던 것이다. 『황석영, 어둠의 자식들』)

② 도량이 몹시 좁음.

③ 잔인하고 끔찍스러움.


그렇다. 위의 예처럼 악착에는 부정적 의미가 있다. 성질이 모질거나 도량이 좁고 잔인하고 끔찍한 상태를 지칭한다. 타고난 재능과 그에 적합한 노력을 보태어 당연한 듯 성과를 거머쥐는 이들에게는 ‘악착스럽다’는 표현을 잘 쓰지 않는다. 자기 능력 밖이거나, 보통의 사람이라면 시도조차 하지 않는 일. 설령 시도했더라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줄곧 일어나 당장이라도 손 떼고 싶어 고개를 젓게 되는 일에 사용되곤 한다.


‘1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개념이 있다. 이는 누구나 시간을 들이면 꿈을 이룰 수 있다는 마술적 성공 공식을 말하는 게 아니라, 재능의 발현을 위한 노력의 필요성을 뜻한다. 먼저 자기 재능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고, 그 재능을 발판 삼아 성공을 향해 도약할 수 있다는 것이다.


노력과 성과의 관계를 강조하는 것은 재능의 중요성보다 의식적인 노력의 가치를 긍정하며 열심 히 하면 할 수 있다는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성취동기를 높이기 위함이다. 그런 과정에서 피를 토하는 노력으로 자신과의 싸움을 이어가는 이들이 운동 선수들이다. 운동선수들의 연습량을 보면 입이 떡 벌어진다. 악착스럽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집요한 투지와 독기를 품고 혹독한 훈련에 임하면서 매번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고자 애쓴다. 작은 목표들을 성취하다 보면 승부 근성이 강해져 더 큰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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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삶에 만족하지 못하면 평생 외줄에 매달린 듯 불안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의욕과 책임감을 유지하며 최고의 컨디션으로 매진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출 것. 경쟁에서 뒤지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잡은 줄을 놓지 말 것. 때로는 줄이 끊어져 바닥으로 곤두박질쳐질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일어나 매달리는 것이 삶인지도 모른다. 악착같이.


어떤 일을 하는 태도가 몹시 모질고 끈덕지다는 게 ‘악착’이다. 악착도 모질고 끈덕지기만 한 이야기는 아니다. 자신이 정한 바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끈을 놓지 않고 애쓰는 사람들. 우리 주변에도 악착스러운 사람들이 많다. 당연하고도 자연스레, 해야 하는 일이면 해야만 한다고 실천하는 사람들. 타인의 눈에는 그러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악착같이 보이기도 하겠지만 실상 악착보살의 마음에는 불교의 실천수행법인 육바라밀이 구동되고 있다. 자신이 정한 바를 이루려면 억척이든 악착이든 끈질김이 기본으로 장착되어야 한다. 부처님 머리 위 천장에 매달려 있는 악착보살처럼.


우리나라에서 악착보살을 만날 수 있는 곳은 대표적으로 청도 운문사, 서울 봉천동 길상사, 영천의 영지사 등이다. 청도 운문사 비로전 천장 대들보에는 단청이 흐릿해진 반야용선 한 척이 걸려 있다. 망망대해를 건너는 배. 인간이 꿈꾸는 이상세계를 향한 이동 수단이다. 뱃머리에서 내려온 외줄에 ‘악착같이’ 악착동자가 매달려 있다. 한순간 방심하면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처럼 위태하게 보인다.


불교에서는 반야용선이라는 구원의 배를 등장시켜 오랫동안 선행을 이어 온 불자들을 저 언덕 너머 극락정토로 태워다준다. 배의 이름이 ‘반야’인 것만 봐도 극락정토가 깨달음의 세계이고, 불법의 수호자이자 물을 다스리는 용이 배를 이끌어 ‘용선’이라 하였다. 중생은 이쪽 차안(此岸)에서 집착하고 분별하는 삶을 살고 있지만 저 언덕 너머의 세계는 모든 번뇌를 벗어난 적멸의 세계, 생사(生死) 생멸(生滅)도 없는 세계가 펼쳐지는 정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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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당이 곧 반야용선이라는 주장도 있다. 사바세계가 고해(苦海)라면, 법당은 중생을 태우고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하는 배에 해당한다. 만약 법당 기둥에 서쪽을 향한 용머리를 조각한다면 서방정토를 향해 고해의 세상을 헤쳐나가는 한 척의 용선이 완성되는 것이다. 고락(苦樂)과 시비(是非), 생사(生死)를 거듭하는 차안(此岸)에서 깨달음의 세계인 피안(彼岸)으로 용(龍)이 이끄는 것이다. 그 용선 안에서 사부대중이 함께하며 염원과 발원, 기도와 참선, 보시와 정진으로 저 피안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그 옛날 반야용선을 타고 저 언덕 너머의 세계로 가야 하는 한 보살이 있었다. 그 보살이 배를 타기 전, 누군가를 도와주다가 나루터에 늦게 도착하고 말았다. 이미 배는 출발한 후였다. 마침 밧줄 하나가 보였다. 이에 보살은 망설임도 없이 죽기 살기로 밧줄에 매달려 마침내 서방 극락정토에 닿았다고 한다. 또 다른 사찰의 악착보살은 신발 한 짝이 벗겨진 채 배에서 내려진 밧줄에 매달려 있다. 뒤늦게나마 나루터에 도착한 이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밧줄을 붙든 채 기어이 고해를 건너간다.


악착보살이 밧줄에 매달려 정토에 도달할 때까지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앞이 캄캄하다는 말이 있다.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를 발밑에 두고 밧줄에만 의지한 채 언젠가는 목적지에 닿을 거라는 희망 속에서 밧줄을 놓아버리고픈 충동을 참아내는 것. 어쩌면 악착보살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악착동자의 ‘동자’는 나이가 어린 자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다른 의미도 있다고 한다. 그중 하나는 ‘움직이는 자’라는 뜻이다. 목적한 바를 성취하려고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 멈추지 않고 이루어질 때까지 연구하는 마음, 끝이 없는 욕망과 집착의 사슬을 끊어내기 위해 이 순간을 사는 사람들의 마음 역시 동자의 마음이라 할 수 있겠다.


법당에 걸려 있는 탱화나 천룡팔부 등의 조형물은 우리가 뭔가를 알아차리기를 바라는 의도로 걸어두었다고 한다. 멈추지 않은 선행을 배우라고 법당 천장에 악착보살을 걸어둔 것이다. 악착보살의 이야기는 한순간도 정신을 놓지 않는 지극한 수행의 마음가 짐을 일깨우는 의미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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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돌을 물에 던지면 그대로 가라앉지만, 그 돌을 배에 실으면 돌은 가라앉지 않는다. 우리의 업장이 아무리 두텁다 해도 이기적인 생각과 집착을 버리고 자비한 마음으로 보시를 행하는 등 악착같이 수행 정진하면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것처럼 우리 같은 범부도 피안의 세계로 건너갈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지은 첫 소설책을 받았을 때의 기분을 한마디로 표현하기가 지금도 어렵다. 책의 무게는 너무도 가벼웠다. 기쁨보다는 어딘가 낯설었고, 별안간 기분이 쓸쓸해지면서 마음 한쪽이 텅 빈 것처럼 느껴졌다. 순탄하지 않았던 오랜 시간이 덩그러니 책 한 권으로 요약된 것 같아 이건 무효라고 손을 흔들고픈 심정이었다. 그래서 책을 받아두고 며칠 동안 펼치지 않았다.


나는 다시 몇 발짝 물러서기로 했다. 등단하기 전처럼 생업에 종사하며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글을 쓰는 것이 나의 작가로서의 본분이다.


독자 한 분이 내게 질문했다. 등단 후 달라진 점이 무엇이냐고. 문학인으로서 달라진 점은 소설 쓰기가 좀 더 체계적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주변에서 만들어 주는 소설 발표의 기회도 좀 늘어났다. 생활인으로서의 나는 크게 달라진 건 없다. 다만 ‘소개팅’ 자리가 계속 들어온다는 변화가 있다. 이전에도 ‘중매’가 들어오곤 했었지만, 이제야 비로소 내가 그런 일에 귀를 기울이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과연 등단 전과 등단 후에 무엇이 달라졌다는 말인가.


나는 지금껏 어떤 결의도 없이 당연한 듯 문학에 발을 담근채 살아왔다. 그래서 좀 더 가난했고, 쓸쓸했고, 우회적인 여정을 지나 지금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문학과의 연애를 이어갈 수밖에 없다. 이것이 악착스러운, 한편 악착스러울 것도 없는 나의 운명이다.


* 임택수 장성 백양사 템플스테이 팀장. 2024년 단편소설 ‘오랜 날 오랜 밤’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데 이어 장편소설 ‘김섬과 박혜람’으로 제20회 세계문학상을 동시 수상하며 등단했다. 매일 새벽예불과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는 그는, 사찰이라는 공간에 기대어 매순간 새로운 인연을 맺으며 살아가고 있다.


■ 출처: 한국불교문화사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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