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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을 넘겨 사위는 숯 가마처럼 어둡고 대부분 일찍 잠자리에 드는 뉴질랜더들은 소등을 한채 옆집도 조용하다. 밤은 모든 것을 끌어 안는다. 낮의 고통조차 담담히. 때로는 홀로 깨어있고 싶은 밤이 있다. 나는 뒷뜰 우리 동네에서 제일 큰 나무 빛그늘 속에 서 있다. 초저녁 흩뿌리듯 비가 지나가더니 젖은 잔디가 맨발 아래 차고 또 시원하다. 흔들어 벗어던진 슬리퍼 한짝은 잔디 속에 묻혀있고 한짝은...? 나는 괘념치 않고 맨발로 잔디밭을 서성인다. 주렴처럼 드리워진 나무가지들 사이로 놀란 듯 켜진 추녀 밑 방범등이 모자이크 하듯 내 얼굴을 내려다본다.
거의 매일 우리 집 뒷뜰에서 노니는 옆집 고양이가 지레 겁먹고는 날렵한 몸동작으로 담을 타고 도망친다. 목에 매달린 방울이 이 밤의 고요를 헤집는다. 매일 쫓아내기만 하던 할머니이지만 오늘밤엔 같이 놀아줄 수도 있으련만 가버리네... 그때는 쓰잘데기 없이 방범등을 켜 놓고 화분들을 넘어뜨려 깨뜨리고 잔디밭 여기저기 똥을 싸서 그랬지이...
올려다 본 거실 창문은 잔 불빛을 받아 번들거리고 그이가 늘 앉아 내려다보던 자리엔 허무한 고요가 켜켜이 녹아 내려 쌓여있다. 그이는 이 뜰에서의 나의 흙놀이를 항상 못마땅해 했었다. 작은 잎을 떼어 싹을 틔우고 분갈이를 하고 물을 주며 즐거워하는 따위의 나의 행위를 노동으로 보는 듯 늘 안쓰러운 눈빛으로 “힘들지 않느냐 그럴 시간에 좀 쉬지.” 하고 말하곤 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투레질 하는 말처럼 투덜대곤 했었다. 이것마저 놓아버리면 난 어쩌라고... 손톱 밑이 까매지고 손은 거칠어도 나는 뒷뜰 흙놀이가 즐겁다. 그래도 가끔은 한창 예뻐져 있는 화분을 들어올려 보여주면 아무 말 없이 웃으며 고갤 주억거려 주기도 했었는데... 그렇지만 이젠 흙놀이 만으론 나의 헛개비 같은 마음을 메꿀 수가 없었다.
낮의 나와 밤의 내가 다르고, 누구와 함께 했을 때의 나와 혼자 있을 때의 내가 다르다. 최소한 나의 주관은 나로 인하여 주변이 어두워 지는 걸 참지 못하여 그렇게 되지 않으려 우스갯소리로 푼수임을 자처하기도 하지만 지금은 안으로 텅 비어 관통하는 알수 없는 그 무엇과 틈만 나면 실핏줄 터지듯 스멀대며 터지려는 이 공허를 점점 감당키 어려웠고 무서웠다.
떠난 이는 편지한통 없고 그 흔한 톡 한번이 없다.
그 즈음 슬몃 영어학교를 다녀보면 어떻겠냐 조언하는 이가 있었다. 때론 용두사미로 끝나는 일들이 있긴 해도 아마도 뭐든 배우길 좋아하는 나의 성향을 간파하였음인게다.
아주 옛날 어렸을 적, 왼쪽 가슴엔 하얀 손수건 착착 접어 이름표와 함께 매달고 첫 등교하던 어리버리한 초등학생처럼, 나를 올려보내고 자긴 요 옆 커피숍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한다.
나의 학교생활은 그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도시락을 싼다. 아침형 인간이 아니어서 아이들 키울 땐 그렇게 힘들던 아침기상이 자연스러워졌다.
오늘은 유부초밥으로 도시락을 준비하고 과일도 따로 썰어 담아놓는다. 사실은 나보다 더 내 유부초밥을 좋아하는 한국 학생이 있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려 아침시간을 조금 더 할애하고 있었다. 아직도 햄버거를 주식으로 챙기는 게 낯선 나에게 그녀는 열심히 맛있는 햄버거를 싸와서 바꾸어 먹었다. 뭐로든 행복을 느끼는 사람의 하루는 바쁘다. 스틱커피 한잔을 타들고 뒷뜰이 내려다 보이는 창가에 선다. 뉘 집 벽난로의 연기일까 아니면 미처 거두어 가지 못한 밤안개일까? 한폭의 동양화처럼 낮게 그리고 느리게 흘러간다.
이때쯤이면 큰 길 자동차 소음도 점점 바빠지는데 의외로 나의 아침은 여유롭다. 등교길, 나보다 한 정거장 전에서 버스를 타고 오는 중국 아줌마 리민이 이층버스 맨 앞자리에 앉아 오다가 손을 흔들며 반가워한다. 나란히 앉아 휙휙 지나가는 간판들을 읽거나 서로의 폰을 보며 영글지 못한 영어를 주고받으며 때론 소녀들처럼 작은 소리로 키득대기도 한다. 꼭 한글 깨우칠 때의 어린아이들 같다. 중간 오클랜드 대학 정류장에선 싱싱한 젊은이들이 우르르 쏟아져 내린다. 젊음은 부럽다. 항상.
나의 클라스엔 이십여명의 학생들이 같이 공부하고 있다. 중국 학생이 단연 많고, 아프가니스탄 자매, 얼굴만 빼곡이 내밀고 히잡으로 야무지게 머릴 감싼 예멘 아줌마, 인도네시아 학생 등등.
애나 어른이나 모아 놓으면 왜 그리 떠드는지 늘 시끄럽고 소란스럽다. 수업중 교실에선 절대 영어 이외엔 쓰지 말라는 선생님의 당부를 아무리 들어도 급하면 튀어나오는 각자의 모국어들이 애처롭다. 한국인은 나 혼자여서 외롭긴 해도 혼자 중얼대는 내 말을 아무도 못 알아들으니 그건 이점일까? 첫 짝궁은 열여덟짜리 증손주 같은 남학생이었다. 그 아이는 특히 문법에 강해서 나의 영어공부중 특히 더 취약한 부분을 많이 채워주기도 했으나 잦은 결석과 지각으로 별로 학업에 열심이지 않는 게 흠이었다. 가끔은 내가 손주 나무라듯 야무지게 주먹을 틀어쥐고 너 내일도 늦으면 가만 안둬 하듯 입술을 모아 뾰죽 내밀고 눈을 가늘게 뜨면 선한 눈으로 웃기만 한다. 하지만 다음날도 또 늦던가 결석한다. 도무지 긴장감이 없다. 아마도 밤새 게임을 하는 듯 가끔은 두 눈이 충혈돼 있어 할머니 같은 마음이 걱정스러워한다. 뭐든 젊어서 해야 하는데…나이 드니 이건 뭐 금방 배운 것도 돌아서면 잊어버린다. 오전에 배운 과거분사는 하학 하면서 퀸스트리트 어디쯤에 떨어뜨리고, 외워두었던 불규칙 동사를 비둘기 날갯소리와 함께 날려보내고 집에 와서 다시 찾는다. 그래도 나의 밑천은 아주 어렸을 때, 그러니까 반세기도 훨씬 전 외워둔 단어들을 뒤적어 꺼내쓰고 있는 것을…
얼마전까지만 해도 같은 단어의 뜻을 몇번이고 다시 물어봐도 매번 똑같은 억양으로 대답해 주던 어떤 이가 있었는데…
돋보기를 쓰고도 또 둥근 확대경을 덧대어 보아야만 보이는 영한사전의 작은 글씨를 찾아 읽다가 울컥해서 뿌얘진 안경아래로 눈물 한방울을 또르르 굴러 떨어뜨린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놀라워 하며 묻는다. 힘들지 않느냐고… 힘들다. 수업중 다리에 자주 쥐가 나기도 하는데 속으로 야옹야옹 아무리 해도 풀리지 않을 땐 이놈이 영어로 해야 알아듣나 하고 혼자 생각한다. 웃는 내가 우스워 웃는다. 그리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검지로 침을 찍어 콧등에 세번 톡톡톡 바르기도 한다. 어린 시절 발 저릴 때 하던 민간요법인데 그게 뉴질랜드에서 효력이 있는지는 검증된 바가 아직 없지만 뭐라도 해야겠기에… 어줍잖은 품위유지를 위해 물밑 나의 물갈퀴는 백조의 그것보다 항상 더 절박하고 치열하다. 그리곤 또 자주 듣는 질문은 힘든데 뭐하러 그렇게 열심이냐고… 글쎄… 처음엔 빈시간을 메꾸기 위해서 시작한 일이지만 재미도 있고 소속감도 생겼으니 이젠 무엇이든 계획을 세워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긴 했다.
첫번째 목표는 집 앞 성당 키위 신부님의 강론을 들을 수 있게되면 좋겠다 생각했다. 가끔 가서 듣는 강론은 언제나 가려운 곳을 옷 위로 긁는 것 같은 미진함 때문이다. 하지만 얼마 못가 그 쪽은 포기했다. 시간이 지나도 영어를 듣고 말한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인 걸 몸소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에 집에서 가까운 적십자사 중고가게에서 자원봉사자로 내 목표를 격하시켰지만 나날이 뒷걸음 치는 이 자신감이 나를 더욱 겸손한 사람으로 몰아가고 있다.
요즘 내 짝은 중년의 프랑스 아줌마다. 성격이 밝고 외향적이며 실력이 만만치 않다. 키위들의 그것보다 그녀의 영어는 더 알아듣기 어렵지만 우린 잘 통한다. 오전수업 끝나면 간단히 점심을 챙기고 그 시간에 우린 밖으로 나간다. 명주올같은 햇볕이 빌딩 사이로 부서져 내리고 다양한 사람들이 분주한 뉴질랜드의 얼굴 퀸스트리트. 그녀는 꼼씨꼼싸라는 말을 자주 쓴다. 불어로 쏘쏘란 말이란다. 그렇지 인간만사 꼼씨꼼싸. 늙은 이국소녀 둘이 깔깔대며 맑고 밝은 뉴질랜드의 공기를 가른다. 남모르게 마음의 문을 닫기 직전 나를 수용해 주고 이층버스도 거져 태워다 주는 이 나라가 고맙다. 자기 엄마가 나보다 두 살 어리다는, 보기만 하면 껴안아 주는 작년 담임 선생님. 그럴 때마다 그녀는 나에게 속삭인다. You can do it. 아마도 만나면 늘 어렵다 징징대는 나를 미리 입막음하려는 건 아닐까? 나도 속삭인다. Thank you. You made my day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