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놀랄 만큼 많이 주는 행복 에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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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놀랄 만큼 많이 주는 행복 에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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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호철통일로문학상 수상자로 한국에 온 북아일랜드 작가 애나 번스. 그는 “평화는 놀라울 정도로 많은 것을 가져다준다”고 말한다. 
 

서울 은평구에서 주관하는 이호철통일로문학상 올해 수상자로 선정된 북아일랜드 작가 애나 번스(62)가 방한해 기자들과 만났다. 장편 ‘밀크맨’으로 맨부커상(2018)을 수상하면서 세계적인 작가로 부각된 그는 분쟁 국면의 폭력적인 사회에서 여성을 포함한 구성원들이 어떻게 상처받고 왜곡되는지 그려냈다.


영국령인 북아일랜드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98년까지 30여 년간 북아일랜드 독립투쟁을 둘러싼 혼란기(‘The Troubles’)를 겪었다. 친영국 진영과 친아일랜드 진영이 무력 충돌을 벌여 최소 3500명이 넘는 사망자와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 나고 자라며 ‘트러블’을 고스란히 겪은 애나 번스는 이 시기를 배경으로 ‘노 본스’와 ‘밀크맨’을 썼다. 그는 “북아일랜드 고유의 갈등뿐 아니라 그 어떤 나라에서건 여성으로서 겪는 젠더와 세대 갈등까지 직시하며,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와 애정 속에서 포용하고 융해시키는 화해의 미학을 구현해 낸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호철통일로문학상 위원회는 “전 지구적 차원에서 일어나고 있는 분쟁, 여성, 난민, 폭력, 전쟁 등으로 인해 생기는 문제를 사유하고 극복할 수 있는 문학적 실천을 보증하는 것을 기치로 내걸고 있는 상의 취지에 부합하는 문학적 가치와 의의를 애나 번스의 작품 세계에서 찾았다”고 수상작 선정 이유를 밝혔다. 위원회는 “일상적으로 난무하는 여러 층위의 폭력, 개인의 정신을 지배할 정도로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 등, 애나 번스가 소설을 통해 다룬 분쟁 이면의 문제들이 비단 북아일랜드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는 건 분명하다”고 부연했다.


여전히 분단된 상태로 남아 있는 한반도의 남쪽 나라를 찾아온 애나 번스는 “평화는 놀라울 정도로 많은 것을 가져다준다”면서 “평화를 위한 제 글쓰기가 인정받아 주어지는 상이라니, 엄청난 선물이자 영광”이라고 미리 보내온 ‘수상 소감’에서 밝혔다. 이날 간담회 자리에는 국내 작가에게 수여하는 특별상 작가로 선정된 소설가 김멜라도 동석했다.

-오랫동안 분쟁을 겪었던 북아일랜드에서 성장한 작가 입장에서 한국의 분단 상태를 어떻게 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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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북아일랜드 구교도와 신교도 사이의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벨파스트 전역에 설치한 장벽. 지금은 관광객들의 구경거리이지만 30여 년 동안 3500명 넘게 희생된 비극의 상징물이다. 사진(벨파스트)


“북아일랜드 같은 경우에는 너무나 많은 차단기들과 무장 세력과 검문소들이 많았다. 지역 자체는 상당히 좁은 곳인데도 그렇게 많은 검문소들과 무장 세력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정말 미쳤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잔혹한 상황이었다. 사람들이 그 검문소를 지나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강을 통해서 바다를 통해서 그리고 또 다른 육지를 통해서 오가려고 했는데, 그런 상황들은 정말 끔찍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한국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이긴 하지만 제가 이곳에 살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어떠한 상태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이런 분단 자체가 너무나 잔혹한 것이다. 물리적인 장벽도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장벽들도 있다. 물리적인 장벽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이쪽에서 살면 저쪽으로 넘어가지 않고, 또 저쪽에서 살면 이쪽으로 넘어오지 않는 그런 보이지 않는 장벽들이 존재한다. 제가 살던 벨파스트 지역은 물리적으로 그런 장벽이 있었는데, 분쟁 시기가 지난 이후에도 남아 있다.”


- ‘평화’가 처음에는 지루한 개념이었다는 소감이 인상적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그 상태로 있으면 평화 아닌가,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다. 어렸을 때 너무나 폭력적인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사실 평화라는 것을 겪어본 적이 없었다. 자라면서 평화라는 것이 많은 것들을 가지고 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에너지도 얻을 수 있고 행복해질 수 있고 제가 조금 더 부드러워지고 또 삶이 조금 더 나아진 것처럼 보이는 그러한 것들을 평화가 가져다주었다. 한국의 상황은 사실 잘 모르겠지만, 이스라엘 전쟁 국면에서 지금 거의 대학살이라고 부를 정도의 일이 벌어지고 있다. 너무 충격적이고 가슴 아픈 일이다. 뉴스에서 이런 상황들을 보면 정말로 너무 끔찍한데, 예전 같으면 술이라도 마셨겠지만 술은 끊었다.”


이십 대에 고향을 떠나 런던으로 간 후에야 비로소 북아일랜드의 많은 사람들, 아니 거의 모든 이들이 얼마나 무감각하게 기이한 환경에서 자라왔는지를 깨달았습니다. 그 시절 우리는 서로 슬픔을 나누지 않았고, 그걸 어떻게 하는지조차 몰랐습니다. 대부분이 트라우마를 경험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지도, 심지어 자신이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분쟁 시기를 견뎌낸 우리는, 즉 개인적이든 공동체로든 그 경험을 겪어 온 우리 모두는 각자 마련한 즉흥적 방식으로 한 비극에서 다른 비극으로 비틀거리며 넘어갔습니다. 정치적, 종교적 폭력이 장기적으로 지속되는 환경에서 자란 많은 사람들에게 그러하듯이, 이러한 위기관리 방식의 삶이 우리에게는 평범으로 자리했습니다. _수상소감


-작가가 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하다가 30대 초반에 글을 쓰게 됐다고 밝혔는데, 글쓰기는 어떤 해방의 계기였나.


“사실 술을 끊지 못해서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고, 그것을 극복하는 데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술을 끊고 나니까 제 안에 어떤 공간이 생겼다. 그 공간 안에 또 다른 것이 채워지게 된 건데, 그 당시에는 작가가 된다, 또는 글을 쓴다, 그런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계속 글을 써 나갔다. 그게 쌓이다 보니까 어느 순간 아, 내가 책을 쓰고 있구나, 내가 작가가 되어가고 있구나, 라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 찾아왔다.”


저는 북아일랜드에 관한 책을 써야 한다는 계획에서 글쓰기를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저는 제가 글을 쓰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삼십 대 초반에 이르러 제가 한 시대의 끝에 도달했고, 그때까지 제가 살아왔던 방식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 후에 갑자기 글을 쓰게 되었지요. 제가 완전히 항복하고 과거를 놓아버린 다음에야 비로소, 저는 제 안에 이전에는 없었던 커다란 해방된 공간이 생긴 것을 느꼈습니다. 놀랍게도 그것을 채우고자 글이 찾아왔습니다. …글쓰기 과정은 어린 시절 놀던 때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마음을 활짝 열고 상상력에 온전히 맡긴 채,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전적으로 몰입했던 그때처럼 말이죠. _수상소감


-심각한 폭력과 분쟁의 국면에서도 소설에 유머가 살아있다는 평가를 듣는다.


“굳이 인위적으로 유머를 넣으려고 했던 것은 아니고 자연스럽게 접목이 됐던 것 같다. 사실 ‘밀크맨’이라는 소설은 굉장히 심각한 주제를 다루는 작품이기 때문에 그런 책에 유머가 조금 담겨 있다면, 유머를 강요하는 것만 아니라면, 책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삶이라는 것도 그런 것 같다. 어떤 일이 재미있지는 않지만 내가 조금 웃고 아, 괜찮네, 라고 생각을 하면 에너지가 생기기 때문에 유머가 삶에 그러한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이 모든 비극의 주범들 명단이 특별한 서열 없이 제 머릿속에 차례대로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살인, 학살, 증오, 부족주의, 부패한 정부, 국가 폭력, 세계 중앙화, 데이터 조작, 인간에 대한 디지털 통제, 허위 표현, 언어 왜곡, 세뇌, 대중적 조롱, 희생양 만들기, 혼돈에 대한 중독, 젊은 세대에 대한 질투, 젊은 세대에 대한 훼손, 화학 식품, 거대 식품 산업, 거대 제약 산업, 너무나도 많은 죽음. 이것이 전부는 아니었지만, 주로 몰입한 부분은 세력 확장 중인 권위주의 사회들, 주입된 공포, 자기 검열, 고립, 그리고 소외였습니다. 개인적, 공동체적, 그리고 국가적 비극들이 여기저기서 쌓여만 가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또한 결코 작은 일이 아닌 유머의 죽음. 참으로 잔인한 세상. _수상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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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세 애나 번스와 이호철통일로문학상 특별상 수상자 김멜라(오른쪽). 김멜라는 “애나 번스의 소설을 읽으면서 작가로서 글을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 역사를 끌어안아 서사로 풀어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진심 어린 마음으로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여성과 소수자 문제에 어떻게 접근하는가.


“다른 사람이 나와 다른 의견을 가졌다고 해서 그 사람이 정말 괴물 같은 그런 사람은 아닐 것이다. 자동적으로 그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제 소설은 정치적인 면과 또 개인적인 면을 다 다루고 있는데, 북아일랜드에서는 제가 성장할 때 이러한 논의조차 할 수가 없었다. 다른 의견을 가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안으로만 곪아 들어가는 그런 경향이 있었다. 결국 안에 담아두지 않고 서로 대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애나 번스는 “바라건대, 통일이 국가와 공동체뿐 아니라 여기에 있는 작은 개인인 저 자신도 통합되는 것을 포함했으면 한다”면서 “저 자신을 깨뜨리고 치유한 사적인 순간들, 그 뒤 간헐적으로 찾아온 멋진 평화의 순간들은 술을 끊고서, 제 안에 여유로운 공간을 만들며, 단순히 반응하거나 억누르기만 하는 대신 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고 그것을 성찰할 수 있을 만큼 자기 인식을 하게 된 이후 찾아왔다”고 소감에 밝혔다. 분열이 아닌 통합은, 자기 안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는 죽비 같은 깨달음이다. 그가 덧붙인 포부와 다짐.


‘저는 세상을 바꿀 수는 없으나 아무리 미약한 빛이라도 세상을 비추도록 도울 수는 있습니다. 진실이 제게 다가와 ‘애나, 지금이야. 해야만 해’ 하고 말한다면, 제 자신에게 도전하고 자신을 바꾸면서 그리할 것입니다.’



* 출처: 문학뉴스
■ 조 용호 ㅣ    KPI뉴스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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