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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MI TMI

0 개 1,153 김준

요 며칠간 정원일을 좀 하다보니 얼굴이 꽤 많이 그을렸습니다. 선크림 바르라는 아내의 말을 귓등으로 스쳐들으며 ‘나는야~ 자연인~’을 흥얼거리더니만.. 댓가를 톡톡히 치르고 말았지요. 가을햇볕에 그을리면 님도 못알아본다더니 일을 마친 후 거울속에 제 얼굴을 보고선 화들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한층 자글해진 얼굴주름 골골이 채 그을리지 못한 속살들이 허옇게 줄을 그어서 눈가에 희멀건한 주름선들이 죽죽 그어져 있겠지요. ‘애구야.. 이래가지고는 학생들이 놀라 달아나겠다. ㅎㅎ’ 걱정이 되면서도 한편으론 ‘그래도 뭐.. 본판이 어디 가겠나.. 그 얼굴이 그 얼굴이지..’ 하며 어찌어찌 피부를 진정시키고 수업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글쎄 이 녀석들이 얼굴 달라진 것을 단박에 눈치채더라구요. 그 좋은 눈치를 시험문제 읽을때나 써 먹을 일이지... 


한창 말 많은 10대 아니랄까봐 한 녀석이 제 얼굴을 보고 뭐라뭐라 재잘대기 시작하니까 주변 서넛까지 함께 가세해서 도무지 진정이 되질 않았습니다. 그렇게 많이 이상했을까요? 워낙에 희꾸름하던 사람이 갑자기 검어져서 그런지 반응이 꽤 뜨거웠습니다. ^^ 아이들은 이제 제게 피부관리 꿀팁들을 알려주기까지 합니다. 


‘그러니까요 선생님. 이제는 선크림을 꼭꼭 바르셔야해요. 생활 자외선, 그거 무시 못해요.’


‘그리고 저녁에 주무시기 전에 보습크림을 바르고 에센스도 좀 바르세요.’


‘선크림이 끈적여서 싫으시면 일반 화장품처럼 깔끔한 제품도 있으니까 그런걸로 하나 사세요. 거 뭐 얼마나 한다고..’


‘애구..쯔쯔.. 쌤처럼 컴터앞에 오래 앉아있는 분들은 컴터 LED 불빛으로도 피부가 상해요. 선크림을 항상 바르셔야지요. 하루에 두세번은 덧바르는거 잊지 마시구요.’



그러잖아도 요 며칠전 지인들끼리 모인자리에서도 아직도 선크림을 안바르는 무지몽매한 야만인이라고 지청구를 들었는데 이젠 아이들까지 뭐라뭐라 지적질이네요. 심지어는 지들끼리 이 말이 맞네, 저 말은 그르네 하면서 언쟁까지 하지 뭡니까? 서로 주워들은 이야기가 다른 때문일까요? 하여간에 재미있는건 이 학생들이 피부에 관심이 많을 여학생들이 아니라 얼굴에 수염이 숭숭 돋은 사내아이들이라는 겁니다. 정말 신기했습니다. 도대체 이런 정보는 어디에서 들은 걸까요? 그래서 물었지요.


‘너희들은 이런걸 도대체 어떻게 다 아니? 너네들도 아침마다 뺨다구 찰싹찰싹 때려가며 로숀 서너가지씩 바르고 그러니?’


개중 제일 활달한 한 아이가 배시시 웃으며 대답합니다. 


‘에이~ 제가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지요. 그런데 요즘엔 남자들도 피부에 신경 많이 써요. 심지어는 화장을 하는 애들도 있는걸요. 유튜브 보면 남자 피부관리, 화장 하는법.. 그런거 다 나와 있어요. 이젠 남자도 외모로 경쟁하는 시대예요~’


그랬습니다. 모든것이 정보통신산업 발달의 혜택이었습니다. 온세상에 차고 넘치는 온갖 유익, 유해한 정보들은 각 개인의 취사선택에 의해 삶의 가지가지 영역속으로 침투해 무언가를 변화시키고 발전시키고 때로는 안타깝지만 쇠락시키고 있는 것이겠지요. 이런데 제가 잠깐 이런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이 녀석들 말하는 품새가 점점 점입가경입니다. 선크림으로 시작된 이야기가 남자의 화장에 대한 찬반으로 이어지더니 사회의 문화적 변화와 그 수용력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는, 급기야 정치적 성향의 차이까지 드러내며 논쟁의 비수를 휘드릅니다. 결국 제가 나서서 워~워~ 중재를 하고 말았네요. 이런.. 오늘도 또 연장수업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을 말리면서 들으니 생소한 단어를 하나 자주 사용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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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TMI야. 그렇게까지 말 할 필요는 없어!’


‘아니지. 이게 어떻게 TMI냐? 정확히 필요한 이야기인데..’ 


‘TMI? 트미? 이건 또 무슨 신조어일까.. 얘들아. 그게 무슨 뜻이야?’ 


제 질문에 또 아이들은 서로 앞을 다투어가며 설명을 하더군요. 아우성을 치는 아이들 목소리속에서 찾아낸건 결국 TMI라는건 Too Much Information 약자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지나치게 장황한 설명을 하려고 하면 그만 입 좀 닥치라는 의미로 쓴다고 합니다. 아하~ 그러니까 저 같이 뭔 말만하면 길게 길게 설명을 늘어놓는 사람에게 제발 입좀 다물라고 핀잔을 주는 말인거군요. 저도 어디가서 한번 써 먹어봐야겠습니다. ^^


한참 소란을 피운 아이들을 진정시켜 자리에 앉히고 나니 10여분이 훌쩍 지났습니다. 그동안 아이들은 선크림에 대해, 남자의 화장이 적절한가에 대해, 우리 사회가 문화적 다양성에 대해 얼마나 관용적인가에 대해, 우리가 정치세력의 세뇌에 길들여지는것은 아닌가에 대해... 장황한 TMI를 늘어놓았지요. 저도 이제 10대 후반의 아이들이 이렇게 많은 생각과 상식을 가지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었습니다. 


‘야.. 근데 너희들 참 대단하다. 이 정도로 상식공부하는 만큼 학교 공부를 했으면.. 이 중에 반은 여기 없겠는걸?? ㅎㅎ’


그러자 갑자기 교실분위기가 무거워집니다. 그렇지요. 공부이야기만 나오면 옴짝달싹을 못하는 녀석들이니.. 잠시 뒤, 침울해진 교실 분위기를 깨고 한 아이가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해요. 저도 그런생각 해봤는데요. 유튜브 보고 SNS 보고 뭐 간단하게 배우는것은 정말로 이해도 잘 되고 잊어버리지도 않는데 왜 학교나 학원에서 배우는건 이렇게 기억이 나질 않을까요?’


개중 그래도 공부에 힘 좀 쓴다는 아이가 대꾸하자 두런두런 공감의 메아리가 퍼집니다. 


뭐라 딱히 해 줄 말도 없고 해서 그냥 얼버무리며 다음 수업진도를 나갔지만 저도 사실 그게 궁금합니다. 어떻게 하라는 공부는 아무리 애써도  잘 되지 않는데, 별로 쓸따리 없는 잡다한 지식들은 어쩜 그리도 쏙쏙 전두엽에 와 박힐까요? 아무리 눈을 비벼가며 책을 파고 파도 세상엔 내가 모르는 것이 이리도 많다는 사실만을 절감할 뿐인데, 부엌에 물먹으러 나가다가 얼핏 들은 TV속 개그맨의 농담은 듣는 즉시로 두뇌에 각인되어 떠나질 않습니다. 두뇌는 참 불공평한듯 합니다.  


수업을 마친후 궁금한 마음에 학습에 관련된 심리학자료들을 찾아보았습니다. 이 또한 역시 인터넷의 힘을 빌리기로 합니다. 두어시간 자리에 앉아 이리저리 마우스를 클릭하다보니 제가, 그리고 우리 학생들이 궁금해하던 학습불공정성의 심리적인 이유를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꼭 필요하고 지속적으로 보관해야 할 지식보다는 별 쓸모없는 잡다스레한 상식만 늘어나는 이유를 심리학에서는 “선점의 법칙”이라는 용어로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심리학에서의 “선점의 법칙”은 학습과 기억 현상을 설명하는 중요한 원리 중 하나입니다. 이 법칙은 새로운 정보나 경험이 기존의 정보나 경험에 의해 통제되고 영향을 받는다는 법칙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머리속에 먼저 들어와 있는 정보에 의해 이후에 입력되는 정보의 양과 질이 영향을 받는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예를들어 어린시절에 개에게 물려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성인이 되어서도 개에 대해 막연한 저항감을 느끼에 되고, 한번 수학시험에서 낭패를 본 다음에는 수학문제를 보는 것 조차 싫어지는 것과 같은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아주 이해할 법 하지요. 하지만 진짜는 지금부터 입니다. 우리의 두뇌와 심리는 양적으로, 또한 질적으로 유한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정신세계가 무언가에 의해 잠식당하게 되면 마치 물이 꽉 찬 통처럼 다른 정보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게됩니다. 만약 억지로 돌을 집어넣는다면 결국 물이 넘쳐버리게 되고 말겠지요. 그래서 한쪽으로 편향된 사고를 하는 분들은 그 성향을 바꾸기가 쉽지않고 머리속을 온통 잡다한 상식으로 채운 사람은 고전적이고 진지한 공부를 하기가 어렵습니다. 두뇌가 이미 무언가에 의해 선점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선크림에 대해, 남자의 화장이 적절한가에 대해, 우리 사회가 문화적 다양성에 대해 얼마나 관용적인가에 대해, 우리가 정치세력의 세뇌에 길들여지는 것은 아닌가에 대해 정보를 습득하고 공감하고 ‘좋아요’를 누르고 알람을 설정하는 동안 이러한 단편적이고 별 쓸모없는 지식들은 아이들의 머리를 채워갑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먹 두개만큼 작은 뇌는 조잡하고 단편적인 지식으로 꽉 차게되고 이젠  더 이상의 학습적인 내용들을 받아들일수 없게 됩니다. 억지로 자리에 앉아 꾸역꾸역 지식을 쑤셔넣다보면 기존의 잡다스구레한 지식의 단편들이 의식의 표면을 비집으며 삐져나오고, 우리는 이것을 ‘자꾸만 딴 생각이 난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는 잡생각 때문에 공부에 집중하기 힘들다고 푸념하는거지요. 



그렇습니다. 선점의 법칙이 문제였습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SNS에서 접하는 정보들을 그렇게 잘 기억하고 동화되면서 공부만 할라치면 갑자기 피곤하고 지치고 늘어지고 졸려지는 이유는, 우리의 아이들이 좋아하는 아이돌의 춤선은 기가막히게 외워서 따라하면서 몇십번을 되풀이해서 알려주는 용어의 정의하나 제대로 못 외우는 이유는.. 바로 아이들의 두뇌가 SNS에 의해, 그리고 아이돌의 춤에 의해 ‘선점’되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중점적으로 생각하느냐’ 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선호도를 우리는 우선순위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간혹 이 우선순위는 극단적으로 치닿기도 하는데요. ‘열 재주 가진 사람이 밥을 굶는다’는 속담은 열 가지 잔재주에 몰두하다보니 정작 자신의 입에 풀칠을 하게 도와주는 고유의 생업을 소홀히 한다는 뜻이고, 연구에 몰두한 나머지 자신의 결혼식마저 잊어버렸던 과학자의 에피소드는 사활을 걸고 진행하는 실험에 몰두한 나머지 ‘인생지대사’마저 까마득히 잊게되었다는 과몰입의 사례 입니다. 


이 이야기들을 모두 다 선점의 법칙이 우리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수 있는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무엇이 그 사람의 정신세계를 선점하고 있느냐에 따라 사람은 때로 이런 극단적인 행동을 하기도 하며 그래서  이러한 정신세계의 선점 요소가 우리 아이들의 학습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한것 또한 매우 당연합니다. 


인간의 의식이란 어느정도의 관성을 가지고 있어서 익숙한 경로가 설정되면 왠만해서는 그것을 바꾸고 싶어하지 않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를 심리학적으로 ‘경로의 법칙’이라 하는데요. 외식할만한 식당을 찾다가 마땅한 곳이 떠오르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단골식당으로 발길을 옮기게 되는 것도 모두 이 경로의 법칙 때문입니다. 이미 두뇌속에 설정되어 있는 경로는 따라가는것이 가장 편안하다는 이 법칙때문에 우리의 아이들은 학습장애를 겪습니다. 무언가 아이들의 의식을 선점하게 되면 그 이후의 정보들은 왠만해서는 정신세계를 선점한 그 무엇을 치환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정말로 정보가 넘쳐나는 사회입니다. ‘자타공인’ 혹은 ‘Only자칭’ 전문가라는 분들이 동영상을 통해, 


혹은 글과 사진을 통해 세상 온갖 크고 작은 문제들에 대해서 해결점을 제시하고 자신들의 주장을 설파합니다. 사회적인 TMI입니다. 거기다가 세상살이의 모든 희노애락을 섭렵한 Youtube의 인공지능 알고리즘 덕분에 한 방향으로 호도된 사상과 지식이 더욱 편향되어 주변인이 감당하기 힘든 사람으로 변모하기도 합니다. 이건 TMI의 강화버전이 되겠군요. ‘선점의 법칙’은 사회적인 TMI가 야기하는 이러한 현상들에 대해 이렇게 조언합니다. 


‘무엇으로 우리의 두뇌를 ‘먼저’ 채우는가 하는 ‘선점’의 문제는 단순한 우선순위와 가치관을 영역을 벗어나는 중요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으로 두뇌를 선점케하는 생활자세는 학생이 얼마나 뛰어난 학습능력을 갖출수 있는가, 그리고 어떠한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하는가에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볼수 있습니다.’


이전의 컬럼에서 소개해 드렸던 한 교수님의 실험이야기가 있습니다. 


골프공을 담은 맥주잔에는 모래를 붓고 이어서 물까지 부어도 넘치지를 않지만 물을 먼저 채운 맥주잔에는 골프공은 커녕 손톱만한 모래알 하나도 더 넣을수 없다는 실험이야기였죠. 


똑같은 물건들을 똑같은 크기의 용기에 집어넣지만 그 순서에 따라 맥주잔의 용량은 판이하게 달라집니다. 선점의 문제가 용량의 한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실험결과이지요.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과 시간이라는 용기에 인생의 굵직굵직한 요소들과 자잘한 요소들을  채울때 무엇을 먼저 집어넣어야 할지는 자명합니다. 그리고 이 자명한 원리가 우리 아이들의 학습과정에도 똑같이 적용될수 있을겁니다. 


2024년의 중반을 달리는 6월말입니다. 학사일정으로 본다면 이미 중반을 넘어섰지요. 그러니 이제 우리 아이들은 중반을 벗어나 한 해의 종반전을 준비해야 할 시기에 다다랐습니다. 부디 몇 개월 남지 않은 2024년의  소중한 삶과 인생을 TMI가 아닌 진짜 중요한 정보와 지식으로 선점시키는 우리의 아이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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