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은 지나야 뿌리 깊은 나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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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은 지나야 뿌리 깊은 나무가 된다

0 개 1,420 한일수

1976년 발표된 알렉스 헤일리의 소설 ‘뿌리’는 드라마로도 전 세계인들에게 방영된 바 있는데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1767년 아프리카 잠비아에서 노예로 팔려온 주인공 쿤타킨테와 그 후손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기술한 내용이다.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Ronald Reagan, 1911-2004)은 캐나다를 통해 미국에 온 아일랜드계 이민자의 증손자라고 한다. 그가 재임 시(1981-1989) 자기의 뿌리를 확인하기 위해 아일랜드를 방문했다는 기사를 접하고 잔잔한 감동을 받은 기억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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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에 미국에서 개봉된 영화 ‘미나리’는 1980년대 미국으로 간 한 이민자 가족이 시골에서 농장을 만들어 가는 이야기이다. 함께 있다면 새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하루하루 뿌리 내리며 살아가는 어느 가족의 여정을 담은 내용이다. 놀랄 만한 반향을 일으키고 여러 가지 상을 휩쓸다시피 했는데 한국인 최초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아내는 쾌거도 이룩했다.         


1997년 5월에는 교민 일행이 기스본 산업시찰 여행을 다녀 온 일이 있었다. 기스본은 마오리 종족들이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토지를 움켜쥐고 전통적인 마오리 생활양식을 고수하고 있는 지역이다. 기스본 근교의 Williams 농장을 방문했는데 농장 규모가 5천 에이커 즉 600만평으로 서울 여의도 넓이의 약 7배에 해당하는 땅이다. 농장주의 저택으로 안내되었는데 마당의 잔디가 초록색 유리판 같이 다듬어져 있어 인상적이었다. 전형적인 영국식 주택으로 건물이 200평쯤 되어 보이는 규모였다. 거실에는 이 농장을 개발한 초대 선조부터 대형 초상화 사진이 게시되어 있었는데 깊은 감동을 받았다. 약 100년 전에 이곳에 정착하였는데 현재의 농장주는 5대째인데 자녀들은 기숙학교에 보내 놓고 부부간에 농장을 지키고 있다고 한다.          


뿌리는 생명의 근원, 역동성과 강한의지, 사회체계의 근간으로서의 상징성을 함유하고 있다. 용비어천가에서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리므로 그 꽃이 아름답고 그 열매가 성하도다’라고 말하고 있다. 나무는 뿌리에 바탕을 두고 가지와 잎이 무성해지며 열매가 풍성해지는 법이다. 인간사회도 마찬가지이다. 조상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바탕위에 후손들이 번창할 수 있는 것이다.


민들레 씨앗이 뉴질랜드라는 땅에 각자 날려 와서 뿌리를 내려 삶의 터전을 가꾸어나가는 과정에 있는 우리의 처지이다. 1990년대에 본격적인 한인들의 유입이 진행되었고 그 때 온 이민 1세대들은 현재 60-80대의 연령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부는 이미 유명을 달리한 경우도 있으며 앞으로 계속 늘어날 전망이다. 1990년대에 출생한 2세대들은 나이 30대를 바라보는 성인이 되어 가고 있다. 이들은 사회에 진입하여 뿌리를 더욱 공고히 뻗어 가고 이들이 결혼해서 낳은 3세대들은 한민족의 혼을 지켜나가며 뉴질랜드라는 다민족, 다문화의 토양에 동화하여 인류사회에 기여할 사명을 실천해나갈 것이다.


흔히 이민생활의 진행 과정을 이주-정착-적응-문화변용-동화의 5단계로 설명하고 있다. 모든 것이 다른 뉴질랜드 문화권에 이주한 한인들의 경우 완전히 뿌리내리는 데는 100년이 소요될 거라는 판단이다. 1세대를 보통 30년으로 보는데 3세대를 거쳐야 된다는 이야기이다. 이민 1세대들은 앞으로의 우리 후손들이 정체성(正體性, Identity)을 잃지 않고 뿌리를 깊이 내려 갈 수 있도록 문화적, 정신적인 유산을 남겨줄 준비를 해야 되겠다. 한국에는 뿌리공원, 족보 박물관이 형성되어 크나큰 호응을 얻고 있다. 이는 이민사회에서 더욱 절실히 요청되는 사업이다. 


한국에서는 출산율의 급격한 저하로 국가적, 민족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경제적으로 번창하는 것 보다 자손의 번창이 더욱 중요하겠다. 자녀 출산은 양육의 어려움이 따르기는 하지만 자녀들의 성장을 보면서 부모들은 꿈과 희망을 갖게 되고 보람을 느끼게 된다는 면에서 가치가 있다. 종족 보존의 본능은 모든 생물의 기본적인 본능이다. 다행히 교민 사회는 한국보다는 더 높은 출산율을 보이고 있다. 뉴질랜드에 이민 온지도 27년이 되었고 외손자는 봤어도 친손은 없는 상태였다. 하나뿐인 아들이 늦게 결혼한데다 아이가 생기지 않아 걱정이 많았다. 한국에서 모든 걸 정리하고 뉴질랜드로 귀국했는데 신(神)의 조화인지 바로 아이가 생겨 2020년에 손녀를 봤는데 지난달에는 손자를 보는 행운을 맞았다.       



1993년 백두산 천지에 도착했을 때는 민족의 정기가 핏줄을 타고 온 몸에 전율하는 감동을 맛보았다. 금년은 마침 검은 호랑이의 해인데 호랑이 상의 손자를 나이 81에 보게 되었으니 고마운 마음이다. 선친을 중심으로 4대째에 대가 끊기는 줄 알았는데…… 아이가 성장하는 걸 보려면 내 나이 100세가 넘어야 되고 증손까지 보려면 내 목표 나이 108세가 빠듯할 듯싶다. 그래도 이민 1세대로서 자손들이 정통성을 이어갈 수 있도록 자료를 정리하여 물려줄 생각이다. 


성장기 아이들은 대개 고등학교 다닐 때쯤이면 자기의 정체성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왜 내 모습은 다른 키위들과 다른가?‘ 아무리 뉴질랜드에서 태어나 성장했어도, 아무리 영어를 잘해도 우리들을 키위로 인정해주지는 않는다. 그런 현실을 인정하고 우리들 뿌리를 인식하며 다민족 사회의 당당한 일원으로서 이 사회에 동화되어 공동선을 펼쳐나갈 일이다. 뉴질랜드에서의 한일수 가계(家系)를 이어갈 손자에게 이 세상을 떠날 때 부탁을 해놓아야겠다. 2095년 12월(그 때에 손자 나이는 73세가 된다)에는 ‘뉴질랜드 이민 100주년 기념행사’를 꼭 실행해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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