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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를 마감하는 뉴질랜드의 연말연시는 친구나 동료들과 술잔을 기울인다기보다는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지는 여름휴가철이 된다. 꽃이 만발하고 녹음이 짙어가는 화창한 여름에 맞는 크리스마스를 보내려니 하얀눈이 쌓인 화이트크리스마스의 추억이 가물가물해져가고 시즌분위기가 실감나질 않는다. 그럼에도 연말연시가 되면 가장 보고싶은 사람이 가족이다. 더구나 멀리 가족과 친구를 둔 이민자의 외로운 마음이야 오죽하랴. 전화기를 붙들고 목소리로라도 질기고 질긴 그리움을 달래보지만 가슴 한구석이 뻥뚫린 먹먹함이 쉽게 가시진 않는다.
신뢰하기엔 오랜 친구가 좋다고 하듯이 와인도 ‘오래될 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와인이든 친구든 보관과 관리를 소중히 잘 한 경우에만 적용되는 말이 아닐까. 믿었던 오랜 친구에게 몹쓸 일을 당했다는 이도 있고 와인도 상온에서 오래되면 식초로 변하기가 쉬운 음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말 숙성이 오래될 수록 깊은 맛이 난다는 장맛처럼 와인도 그런 것일까. 발효주인 와인은 증류주와는 달리 병에 담긴 후에도 계속 숙성이 진행되다가 일정기간이 지나면 맛이 퇴화하는 특징이 있다. 숙성이 더 필요해서 마실 시기가 안됐거나 반대로 마실 시기를 놓쳐버린 최고급 와인보다는 2-3년내 빈티지의 중저가 와인의 맛이 훨씬 더 훌륭하다. 수백년된 보르도와인이 후손의 창고에서 발견되어 경매에 나오곤하지만 엄청난 가격에 비해 그 맛은 실망스럽게도 약간의 떫은 맛을 가진 밋밋한 쥬스일 가능성이 높다.
와인의 보관수명(Cellar Potential)에 크게 관여하는 요소가 탄닌성분의 많고 적음이다. 탄닌의 함량이 높아 떫은 맛이 강한 프랑스 최고급 보르도의 경우는 6-15년, 부르고뉴, 꼬뜨 뒤론은 4-10년을 지나야 맛과 향이 부드러워지고 풍부해진다. 하지만 보통의 경우 적포도주 중에서 탄닌이 많은 카베르네 소비뇽이나 메를로는 4-6년, 화이트와인은 2-4년내의 빈티지가 마시기 적당하다. 그러므로 평소 우리가 마시는 테이블와인 같은 경우에는 오래둔다고 숙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변질될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절반쯤 마시고 놔둔 와인이야 말해 무엇하랴. 그 다음은 보관상태인데 적당히 서늘한 온도(섭씨 15도 이하)와 습도(75퍼센트 이상)가 유지되는 어두운 장소에 뉘여서 보관하는 것이 가장좋다.
취할 목적으로 술을 마시던 시대는 지난 듯하다. 독한 술 몇잔을 제조해서 마시고 곤드레 만드레 똑 같은 얘기 반복하는 풍토가 사라져 가는 것이다. 술을 음미하며 함께한 이들과 오래토록 마음을 나누는 술문화가 자리 잡아가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도수가 낮은 술의 대명사인 와인을 가장 잘 보관하는 방법은 사실은 매우 간단하다. 당분과 산의 농도가 잘 어우려져 있고 그윽한 향기가 가득할 때, 빨리 마시는 것이다. 물론 좋은 이들과 행복하게 나누어 마시고 맛은 기억속에, 추억은 가슴속에 보관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사는 동안 나의 슬픔, 기쁨 그리고 외로움까지도 함께 할 수 있는 이가 곁에 있다면 무엇이 더 부러우랴. 살아보면 멀리둔 식구보다 가까운 이웃이 더 살갑지 않던가. 여러사람이 감동을 공유한 헌책이 좋은 것처럼 내 치부를 드러내도 정겨운 눈길로 대해주고 시선맞춰 줄 오랜 친구가 있다면 오죽 행복하랴.
타향살이가 외롭고 힘들다고 연말연시가 더 그렇다고들 한다. 하지만 순간이 고통스럽다고 인생전부를 회색빛으로 만들 이유는 없다. 곧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진한 향기와 자태를 뽐내는 한 송이의 꽃에서 삶을 자신의 의지로 선택해 살아가는 당당함을 배우게 된다. 그 꽃이 죽어져 사그라져야 열매가 나듯이 우리의 2세들이 이땅에서 든실하게 자라나고 있다. 한없이 늙지 않고 젊게 살고 싶은가. 그렇다면 새해에는 기억에서 과거를 줄이고 가슴에 설레이는 미래를 늘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