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최대 도시 오클랜드는 항구에 떠 있는 수많은 요트와 강한 해양 문화의 특징을 부각한 ‘돛의 도시(City of Sails)’라는 아름다운 별명을 가지고 있다. 오클랜드는 세계에서 살기 좋은 도시를 매기는 연례 국제 조사에서 여전히 상위권에 이름을 내밀고 있지만 빈약한 도시 계획, 나아질 줄 모르는 생산성, 높은 생활비 등으로 비슷한 해외 도시들에 비해 점점 뒤쳐지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대로 가다간 ‘실패의 도시(City of Fails)’라는 오명을 얻게 될 것이라는 자조가 비등하다. 막 오른 지방선거에서 출마자들이 저마다 지역 발전을 위한 공약을 쏟아내고 있는 가운데 오클랜드가 무엇이 잘못돼 가고 있고, 보다 살기 좋은 도시로 거듭 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살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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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 막는 낮은 생산성
오클랜드의 여러 측면을 오클랜드와 비슷한 통치 방식과 산하기관 구조를 가진 세계 도시들과 비교.작성하여 최근 발표된 ‘도시의 상태’ 연례 보고서는 오클랜드가 낮은 생산성을 비롯한 여러 가지 문제로 점점 뒤쳐지고 있다고 경고했다.
오클랜드 위원회가 주관하여 ‘기회.번영’, ‘혁신.지식’, ‘문화.경험’, ‘장소.연결성’, ‘회복력.지속성’ 등 5개 대범주를 평가한 이 보고서에 따르면 오클랜드는 주택, 인프라, 비효율적 규제 등으로 인해 생산성이 개선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오클랜드의 낮은 생산성 문제는 오클랜드가 뉴질랜드 국내총생산(GDP)의 거의 40%를 차지하는 국가 경제의 엔진이라는 점에서 뉴질랜드 전체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는 지적이다.
오클랜드는 문화적 활기와 글로벌 연결성, 회복력 평가에서는 강점을 나타냈다.
하지만 낮은 생산성은 성장을 막는 중요한 장벽으로 작용하면서 오클랜드는 브리스번, 밴쿠버, 더블린 등 해외의 비교 대상 99개 도시들 가운데 1인당 경제 산출량이 가장 낮은 것으로 평가됐다.
또한 비효율적인 토지 사용과 느린 행정절차 등으로 주택 문제와 인프라 부족도 오클랜드의 주요한 문제로 지적됐다.
보고서는 오클랜드의 낮은 생산성을 ‘생산성 수수께끼’라고 칭하며, 그 주된 요인을 비효율적인 토지 사용으로 보았다.
토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하지 않아 자가용에 대한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고 주택가격이 높다는 분석이다.
오클랜드에서 소득 대비 렌트비 수준은 최근 몇 년 동안 개선됐지만 저렴한 임대주택을 구할 수 있다고 응답한 사람들의 비율은 비교 대상 세계 도시들 가운데 하위 25%에 속했다.
또한 오클랜드는 해외 근로자들이 고용 기회에 대해 느끼는 측면에서 40개 세계 도시들 가운데 37위였고, 직업 안정성과 보수 측면에서 38위에 그쳤다.
침체한 고급 부동산 시장과 비우호적인 세제 등으로 오클랜드는 부유층이 정착하는 세계 상위 50대 도시에서도 밀려났다.
생산성을 낮추는 다른 요인들로는 인구 500만명의 국내 시장에 대한 높은 의존도과 저조한 수출, 그리고 경영 능력 부족과 낮은 자본투자율 등이 꼽혔다.
보고서는 오클랜드가 불평등한 고용시장을 가지고 있어 많은 인재들이 오클랜드를 떠나고 있으며 오클랜드에 정착하는 부유층도 줄고 있다고 지적했다.
오클랜드 일자리의 31.6%가 생성형 인공지능(AI)의 영향으로 사라질 위험에 있는 점에 비추어 보다 탄력있는 부문의 일자리 마련이 필요한 것으로 지적됐다.
보고서는 오클랜드가 보다 살기 좋은 도시로 변모하기 위해 생산성 문제에 대한 대책 마련과 고성장 기업에 대한 지원, 인프라 개선 등을 가장 시급하게 처리해야 할 당면 과제로 꼽았다.
도심순환철도가 오클랜드를 구한다?
오클랜드 장관인 사이몬 브라운(Simeon Brown)은 내년에 도심순환철도(CRL)가 개통되면 오클랜드를 되살릴 것이라고 주장했다.
과연 그럴까.
뉴질랜드 역대 최대 공사인 CRL은 지난 2016년 6월 당시 총리 존 키(John Key), 교통장관 사이몬 브릿지스(Simon Bridges), 오클랜드 시장 렌 브라운(Len Brown) 등이 참석해 공사 시작을 알리는 발파 작업을 할 때만 해도 25억달러의 공사비와 2022년 개통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해가 지날수록 공사비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당초 계획보다 두 배 이상 많은 55억달러로 추산되고 개통도 공사 개시 10년 만인 2026년으로 잡혔다.
여기에 문제는 또 있다.
CRL을 이용하는 승객 수가 당초 전망에 휠씬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
오클랜드 카운슬 산하기관인 오클랜드 트랜스포트(AT)는 최근 CRL 피크타임 이용객 전망치를 기존 시간당 2만7,000명에서 1만9,000명으로 크게 줄여 잡았다.
AT 측은 1만9,000명이 현행 도심의 시간당 철도 이용객수 1만명의 거의 두 배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AT의 마크 램버트(Mark Lambert) 철도서비스 부장은 “AT는 승객 열차망을 재정적으로 책임있게 운영해야 한다”며 “이는 과다 운행이나 초과 비용 발생 없이 수요에 맞는 열차 운행 간격과 수용 능력을 제공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1만9,000명의 승객 이용은 시간당 한 방향에서 3칸 또는 6칸의 최대 16개 열차들이 운행될 때 달성될 것으로 예측됐다.
램버크 부장은 이를 위해 열차 운행을 약 30% 늘리고 열차 운전사와 직원들을 채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시간당 2만7,000명의 승객 수송을 위해서는 한 방향에서 6칸 짜리 18개 열차 운행이 필요한 것으로 분석됐다.
CRL은 시간당 최대 수용 승객 5만4,000명을 목표로 설계됐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9칸 짜리 전기열차와 역사 확장, 신호 기술 업그레이드 등에 60억달러 이상의 투자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채택되지 않았다.
CRL 개통에 앞서 키위레일(KiwiRail)은 2023년부터 5억5,000만달러를 들여 통근 기차 서비스를 단기 또는 장기로 중단하면서 노후된 철도 네트워크를 정비하고 있다.
‘하트 오브 시티(Heart of the City)’의 비브 벡(Viv Beck) 대표는 “당초 전망보다 휠씬 낮은CRL 이용객 수는 도심의 경제 회복이 더욱 늦어질 것으로 우려되는 소식이다”며 “사업체들은 CRL 개통을 고대하고 있지만 이용객 수는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꼬집었다.
벡 대표는 이어 “지난 수 년 동안의 공사로 인해 도심의 많은 사업체들이 고통을 겪었고 문을 닫았다”며 “이제 도심에 있는 전체 인구 감소에 대해 우려된다”고 말했다.
혈세 낭비 과속방지턱
오클랜드 카운슬의 방만한 경영을 보여주는 사례들 가운데 오클랜드 도로 곳곳에 무분별하게 설치된 과속방지턱과 줄지은 오렌지 교통콘, 그리고 끝없는 도로 공사 등을 꼽을 수 있다.
오클랜드는 지난 2017년 ‘도로 사망자 제로’ 안전 프로그램에 따라 과속방지턱을 2017년부터 2021년 사이 4년 동안 거의 700개를 설치했다.
오클랜드 시민의 혈세 9,700만달러가 들어간 이 사업으로 오클랜드는 차량과 보행인 왕래가 뜸한 지역이라도 주변의 영향을 고려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과속방지턱을 설치하면서 지역 주민들의 원성을 사서 다시 제거하는 일도 벌어졌다.
작년 6월 35만9,600달러를 들여 티티랑기 지역의 사우스 린 로드(South Lynn Road)에 설치된 과속방지턱은 9개월 만인 지난 3월 제거됐다.
심한 진동 때문에 인근 주택 거주자들이 거센 항의를 했기 때문이다.
인근에 사는 한 주민은 버스나 대형 차량이 방지턱을 지날 때마다 집에서 작은 지진과도 같은 진동을 느꼈다고 털어놨다.
하루에 20~50차례 겪는 진동에 가족이 적응할 수 없었고, 집을 방문한 사람이 거실에 있을 때 버스가 지나가면 대화를 멈추고 “무슨 일이냐”고 묻곤 했다는 것이다.
이 주민은 처음에는 자기 집만 영향을 받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점차 다른 이웃들도 같은 문제를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14개 가구들과 접촉했다고 밝혔다.
웨인 브라운(Wayne Brown) 오클랜드 시장은 거액을 들여 설치한 방지턱을 1년도 안돼 제거한 일에 대해 돈 낭비라고 지적했다.
2023년 6월 아본데일의 애쉬 스트리트(Ash Street)와 와이라우 애비뉴(Wairau Avenue)의 교차로 부근에 설치됐던 과속방지턱도 인근 주민들의 진동에 대한 항의로 최근 철거됐다.
주민들은 방지턱 철거에 안도했지만 설치와 철거하는데 200만달러의 비용이 쓰여졌다는 사실을 알고 오클랜드 카운슬이 혈세를 낭비하고 있다며 비난했다.
인근에 사는 주민 닉 왕(Nick Wang)은 “사업 시작 전 여론 수렴 과정에서 주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AT가 밀어부치더니 이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조용하게 뜯어냈다”며 “이는 완전히 공공의 세금 낭비이다”고 비난했다.
케린 레오니(Kerrin Leoni) 오클랜드 시의원은 과속방지턱은 필요하지만 세금을 낭비해서는 안된다고 가세했다.
레오니 시의원은 “제대로 설계되지 않은 과속방지턱을 설치하는 일은 용납될 수 없다”며 “AT는 자동차나 인근 주택에 피해를 주지 않도록 과속방지턱을 설계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AT 측은 무거운 차량들이 방지턱을 지나갈 때 기층이나 땅 속 토양 구성이 진동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 가운데 하나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방지턱을 설치하기 전에 토양의 구성을 이해하기 위해 통상 표면 2미터 아래의 토양을 시험한다고 덧붙였다.
작년 1월에는 40년 사용 목적으로 쓰리 킹스 지역 헤이 로드(Hayr Road)에 설치된 방지턱이 설치 1년 만에 인근 주택에 심각한 피해를 주는 원인으로 지목돼 철거됐다.
메도우뱅크에 사는 피트 윌리엄스(Pete Williams)도 인근 세인트 존스 로드(Saint Johns Road)에 2022년 설치된 과속방지턱에서 발생하는 진동 때문에 100년된 그의 집에 금이 가는 등 피해를 입어 2년 넘게 AT와 공방을 벌이고 있다.
트럭이 방지턱을 지날 때마다 집 전체가 흔들린다는 윌리엄스는 그의 집 침실, 부엌, 주방 등 곳곳에 발생한 금의 원인이 방지턱에서 발생하는 진동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윌리엄스가 지난 2023년 1월 AT에 처음으로 민원을 제기한 이후 AT는 방지턱을 좀더 낮게 고쳐 진동은 감소했지만 트럭이나 버스 등 대형 차량들이 지날 때 진동은 여전했다는 것이다.
윌리엄스는 지난 5월 전문업체에 용역을 맡겨 피해를 정밀 조사한 결과 모든 방에서 발견되는 금의 최소 80%는 외부 진동이 원인이고, 수리 비용으로 4만814달러가 들어가는 것으로 나왔다고 밝혔다.
그는 “AT와의 싸움에 지쳐가고 있다”며 “2년 여에 걸친 수많은 항의와 상세한 증거, 독립적인 전문업체의 보고서에도 불구하고 AT는 늦장 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뒤쳐지는 오클랜드 구원해줄 시장 나올까?
오클랜드가 세계의 살기 좋은 도시 경쟁에서 뒤쳐지고 있는 가운데 3년마다 실시되는 지방선거가 다시 다가왔다.
오클랜드 시장 후보로는 현 오클랜드 시장인 브라운을 비롯하여 11명이 등록했다.
지난해 한 여론조사에서 오클랜드 시민들이 가장 원하는 후보로 꼽혔던, 국민당 대표를 역임했고 현 오클랜드 상공회의소 소장인 사이몬 브릿지스는 이번에 출마하지 않았다.
재선이 유력시되는 브라운 시장은 개혁, 주택, 관광 등 3대 핵심 분야의 성장에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브라운 시장에 맞설 가장 유력한 후보는 레오니 오클랜드 시의원이 거론된다.
레오니 후보는 더욱 푸르고, 안전하며 살기 좋은 오클랜드를 만들겠다는 공약을 내놨다.
지난 9일부터 우편 투표로 실시되고 있는 이번 지방선거는 10월 11일 정오에 마감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