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5일(금)은 ‘ANZAC Day’이다. ‘ANZAC’은 ‘Australian & NZ Army Corps(호주 뉴질랜드 연합군)’의 약자로 이 날은 양국의 현충일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한 세기 전인 1915년의 제1차 세계 대전 중 터키 갈리폴리(Gallipoli) 반도에 호주·뉴질랜드 연합군이 상륙했던 날이기도 하다.
우리가 사는 뉴질랜드의 현충일을 맞이해 한편으로는 참전용사들의 헌신과 희생에 경의를 표하면서 이와 함께 안작데이의 유래, 그리고 이를 기념하는 양귀비꽃 등에 대해 소개한다.
<참혹했던 갈리폴리 상륙작전>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당시 대영제국은 프랑스, 러시아와 함께 동맹을 맺었으며 독일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함께 지금의 터키인 오스만 제국과도 동맹을 맺고 이에 대항하고 있었다.
전쟁 초기에 유럽 서부전선의 참호전이 교착 상태에 빠지고 러시아와의 통행이 차단되자 러시아의 출병 요청을 받은 영국은 지중해와 흑해를 통해 러시아까지 보급로를 잇기 위한 작전을 펼쳐야만 했다.
그러나 영국, 프랑스 함대가 다르다넬스 해협을 돌파하려던 최초 계획이 좌절되자 양국은 갈리폴리 반도에 상륙 후 이스탄불까지의 진격을 계획했는데, 갈리폴리는 현재 터키의 유럽 쪽 해안으로 지중해에서 흑해로 들어가는 다르다넬스 해협을 장악할 수 있는 전략요충이다.
4월 25일 시작된 상륙작전에는 무려 46만 8천명이라는 대 병력이 동원됐는데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호주와 캐나다, 그리고 뉴질랜드군도 동참했다. 캐나다는 3만, 호주군은 2만을 출전시켰으며 뉴질랜드 역시 1만 명이라는 대규모 병력이 참전했는데 뉴질랜드와 호주는 역사상 최초로 양국 연합군인 ANZAC을 편성했다.
격전 끝에 연합군은 어렵게 상륙에 성공해 이후 8개월 동안 그 지역을 방어했으나 이후 전선을 정비한 터키와 바다로부터 가해진 독일군 압력에 못 이겨 결국 이듬해 1월 9일에 철수하는데, 이 과정에서 안작군은 8천여 명이 전사하고 1만 8천여 명이 부상을 당하는 막대한 인적 손실을 입게 되었다.
당시 식민 종주국이었던 대영제국 역시 3만 3천여 명 전사자와 7천 600 명의 실종자를 비롯해 7만 8천여 명이라는 대규모 부상자를 기록했다. 터키군 역시 15만에 달하는 인명피해를 냈지만 전사에서는 연합군이 허술하기 짝이 없는 전략으로 인해 크게 패배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철수 이후에도 안작군은 프랑스와 중동에서 계속 싸웠는데 당시 총인구 100만명에 불과했던 뉴질랜드에서 1차 대전 동안 11만 명이 참전, 그 중 1만 8천여 명이 전사하고 5만 5천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뉴질랜드는 인구 비례로 당시 앵글로색슨 민족국가 중 가장 큰 인명피해를 당했으며 이웃 호주 역시 인구 500만 명 중 33만 명이 참전, 5만 9천여 명이 전사하는 큰 손실을 입었다.
이곳에는 현재 전사자 묘지와 박물관 등이 있으며 매년 이 때쯤이면 영연방 국가의 참전용사 후손들이 이곳을 직접 방문해 참배하는데, 특히 내년에는 상륙 100주년이 되는 관계로 큰 행사가 열릴 예정이다.
▲ 2차 대전 중 이탈리아 전선에서 숨진 형제를 추모하는 문구가 애틋하다
<안작데이는 뉴질랜드의 현충일>
현재 안작데이는 단순히 1차 대전만 기념하는 날이 아니라 이후 벌어진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 베트남전을 포함해 최근의 걸프전과 보스니아 내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전 등 뉴질랜드가 겪은 각 전쟁과 유엔 평화유지활동에서 참가한 군인들을 기리는 날로 바뀌었다.
이 날에는 수도 웰링톤을 비롯해 전국의 중소 도시들에서 각 지역에 있는 전쟁기념탑이나 참전기념비에 헌화하는 등 추모 행사가 진행되고, 일부 지역에서는 참전용사들이 새벽 퍼레이드를 벌이기도 한다.
이미 길거리에는 붉은 양귀비 꽃(poppy)과 모금함이 등장했으며 방송 진행자들이나 정치인들도 이 꽃을 패용하고 공개석상이 나서고 있는데, 일반 시민들 역시 가슴에 포피를 붙이고 기부와 함께 전몰용사들의 희생을 기리고 있다.
이 날은 우리 교민들에게도 잊을 수 없는 날인데 그것은 이 날 새벽 행진 등 각종 행사에 한국전 참전 노병들이 다수 참석할 뿐만 아니라 헌화 및 참배 시에 한국전에 대한 언급이 빠지지 않기 때문이다.
뉴질랜드는 한국전에 연인원 6천 여명 이상이 참전해 43명의 전사자를 냈으며 이 중 34명의 유해는 현재 부산의 유엔군 묘지에 안치되어 있다.
<양귀비꽃(poppy)과 안작 비스켓의 유래>
양귀비 꽃은 갈리폴리를 비롯 전쟁이 벌어졌던 유럽의 여러 곳에서 자라는 야생화인데 특히 1차 대전 당시 처절한 참호전이 벌어져 수 많은 군인들이 목숨을 잃었던 프랑스 북부와 벨기에 등지에서는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는 꽃이다.
또한 이 꽃의 빨간색은 전장에서 피 흘리며 숨져간 군인들을 기억하게 하는데 특히 ‘플랜더스 들판에서’라는 시를 통해 전쟁과 그 희생자들을 상징하는 꽃으로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됐다.
1차 대전 당시 뉴욕에서 전쟁구호 봉사를 했던 조지아 대학 교수였던 모이나 마이클이 이 시를 접한 후, 전후에 빨간색 양귀비꽃을 참전군인들을 돕기 위한 상징으로 정하고 가슴에 꽂고 다니기 시작한 게 그 시초가 됐다.
▲ 한국전에 참전한 뉴질랜드 포병의 사격 장면
이후 이러한 전통이 영국과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를 비롯한 영연방 국가들로 번져, 1922년부터 전쟁 관련 기금 마련의 상징으로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현재 영국, 캐나다에서는 1차 대전 종전 기념일이자 현충일(Remembrance Day)이라고 할 수 있는 11월 11일에, 그리고 호주 뉴질랜드는 4월 25일을 전후해 이 꽃을 이용한다.
한편 이처럼 야생에 피는 양귀비꽃은 아편 채취용으로 전문적으로 재배한 것들과는 달리 마약 성분이 거의 없다고 한다.
한편 지금도 모금용으로 종종 쓰이고 시중에서도 팔리는 안작 비스켓은 안작군 결성을 기념해 만들었다고 하는데, 일설에는 만들기 쉽고 경제적이며 영양가 높고 저장도 용이하기 때문에 참전군인 가족들이 외국으로 보내는 구호물품으로 많이 쓴 데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시의 작가인 존 매크래>
전쟁 희생자를 기리는 시로 너무도 유명한 이 시는 캐나다 맥길대학 의대 교수이자 시인, 작가이며 군인이기도 했던 존 매크래(John McCrae, 1 8 7 2 ~1 9 1 8)가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중 죽은 전우를 기리며 지은 시이다.
온타리오 출신으로 토론토 대학을 나온 그는 내과의사였는데 1 8 9 0년대 중반부터 시를 발표했으며 41살 되던 해 제1차 세계 대전에 군의관으로 자원해 중령 계급을 달고 영국군 포병여단에 배속되었다.
1915년 5월, 그는 벨기에 서부 플랜더스(플랑드르) 지역에서 벌어진 제2차 이프르 전투에 참전했는데 이곳에서 전우이자 한때 제자이기도 했던 알렉시스 헬머 소위가 전사했다. 1차 대전에서 처음 독가스가 사용된 이 전투는 한 달 넘게 지속돼 전사자 7만 명과 3만 5천명 이상의 부상 및 실종자를 냈는데, 헬머가 전사했을 당시 군목이 없어 매크래가 그의 장례식을 집전해야 했다.
헬머를 묻은 그는 다음 날 트럭 뒤에 걸터앉아 참혹했던 전투가 끝난 들판에 지천으로 피어 있는 양귀비(poppy)를 보고 영감이 떠올라 이 추모시를 썼지만 너무도 비통한 심정에 다 쓴 시를 노트에서 떼어내 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를 주운 다른 군인이 그 해 12월 런던에서 발행되는 주간지 ‘펀치’에 익명으로 발표한 후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리다가 나중에 작가가 존 매크래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존 매크레는 이후에도 군의관으로 계속 현지에서 근무했으나 전쟁이 끝나기 전인 1 9 1 8년 1월에 폐렴으로 사망했으며 현재 프랑스 북부의 영연방군 묘지에 잠들어 있다.
<남섬지국장 서 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