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뒷모습

연재칼럼 지난칼럼
오소영
정동희
한일수
김준
오클랜드 문학회
박명윤
수선재
이현숙
박기태
성태용
명사칼럼
멜리사 리
수필기행
조기조
김지향
송하연
김성국
채수연
템플스테이
이주연
Richard Matson
Mira Kim
EduExperts
김도형
Timothy Cho
김수동
최성길
크리스티나 리
박종배
새움터
동진
이동온
피터 황
이현숙
변상호경관
마리리
마이클 킴
조병철
정윤성
김영나
여실지
Jessica Phuang
정상화
휴람
송영림
월드비전
독자기고
이신

그대 뒷모습

0 개 915 수필기행

■ 반 숙자 


서녘 하늘에 별이 돋는다. 마음이 잔잔해야 보이는 초저녁별, 실눈을 뜨고 별 속에 아는 얼굴이 있나 찾아본다.


지난겨울에는 눈이 자주 많이 내렸다. 눈이 내릴 때마다 우리나라 문화계의 큰 별들이 떨어졌다. 미당 선생이 떠나시고 얼마 후, 온종일 눈이 내리던 날 정채봉 선생이 눈 나라로 가셨다. 이어 운보 선생도 떠나셨다. 그 뒤로는 겨우내 하늘이 낮게 내려앉으면 또 누가 떠나실라 겁이 났다.


정채봉 선생이 떠나시고 때때로 맑은 눈 해맑은 미소가 그리워져 요즘《그대 뒷모습》을 다시 읽는다. 살아계실 때는 자주 만나거나 특별한 사이가 아니었다. 가톨릭 문우회에서 가끔 뵈었고 오래 전에 원고를 가지고 샘터사에 간 날, 본래 과묵하신지 선생은 환한 웃음으로 바라만 보고 나는 찻물만 젓고 있었다.


이윽고 건너다본 커다란 눈, 그 웃음 뒤에 끝 모를 서러움이 배어나는 것 같아서 가슴이 서늘했다. 어찌 보면 늘 배고픈 아이 같고 또 달리는 지구에 내려온 어린 왕자 같던 사람.


선생의 글을 처음 대한 것은 현대문학지에 연재했던《초승달과 밤》다. 성장소설이라 하고 성인동화라고도 한 글은 신선한 표현과 등장인물들의 착함에 다음 호가 기다려질 정도로 흡인력이 있었다. 그 후로는 선생의 작품집을 구하는 대로 읽으면서 감동적인 글 뒤에 감동적인 삶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오늘 저녁을 농막에서 보내며 별들을 만나려고 한다. 선생께서는 별이 되셨는지도 모르니까. 왜냐하면 해질녘을 좋아하는 스님을 찾아갔다가 찬물이나 한 바가지 떠 마시라는 말씀에 찬물을 받쳐 든 바가지에 별 하나가 돋았더라나.


그래서 천천히 버들잎인 양 별을 불면서 물을 마셨다는 것이다. 별을 불면서 물을 마시는 사람이 세상에 또 있을까. 그 뒤로 간혹 마음이 허할 때면 가슴에 별 하나가 떠오른다는 것이다.


선생께서 민방위 야간 훈련을 나간 날, “불을 끄시오, 불을 끄시오.” 외치고 다니다 보니 순식간에 하늘의 별들이 또록또록해졌다. 그때 “별님들도 불을 끄시오.” 하고서 혼자 웃었다는 분, 하늘 마음이 아니고는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 글을 읽으며 내가 선생을 두고 어린왕자를 생각하는 연유가 이런 데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짧은 만남이지만 글에서 만난 사람과 현실에서 만난 사람이 한결같은 느낌을 주어서 더 인상 깊었던 것 같다. 만남 뒤에는 행복했고 용기가 솟았으며 여운이 오래 갔다.


사람들이 자신의 뒷모습을 볼 수 없기에 신이 타인이라는 거울을 우리에게 주고 서로 비춰보며 좋게 살라 하신지도 모른다.


선생의 글 속에 자신을 두고 “비겁자, 나태한, 이중성, 가련한.” 이라고 표현한 구절이 나온다. 이러한 쓰라린 어둔 밤을 거쳐 하늘 마음을 찾은 것은 아닐지. 누가 나에게 당신의 뒷모습은 어떠하냐고 묻는다면 가만히 고개를 숙일 것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뒷모습은 아름다운 앞모습이 만들어낸다는 것에 희망을 걸고 기죽지는 않을 것이다.


이쪽의 죽음 순간은 저쪽에 막 태어나는 순간이라고 한 선생은 하얀 세상에 다시 태어나 그토록 그리워한 엄마랑 함께 오늘 밤 내가 보는 별을 바라보고 계실지도 모를 일.


하늘 마음으로 동화를 쓰고 동화 속으로 사라져간 뒷모습의 향기에 젖어 캄캄한 세상을 향해 나도 “별님들도 불을 켜세요.” 하고 웃어본다.


■ 반 숙자 


3129f38f001c9758fdabc6802c448624_1635283002_7761.png
 

*약력

충북 음성에서 태어남, 청주사범 졸업, 청주대학교 행정대학원 졸업, 충북음성군내 초등교사 17년 역임, 과수원 경영

*문단 활동

주요경력: [한국수필] 수필천료(81), [현대문학] 수필천료(86), 수필문우회 회원, 가톨릭문우회원, 한국수필가협회, 한국문인협회,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음성문인협회 회장역임, 음성예총 회장역임

저서 및 대표작품: 수필집 <몸으로 우는 사과나무> 교음사 1986년, <그대 피어나라 하시기에> 외길사 1990년, <가슴으로 오는 소리> 고려원 1995년, 때때로 길은 아름답고, 천년 숲, 사과나무, 이쁘지도 않은 것이

*수상경력

현대수필문학상(91), 한국자유문학상 신인상(92), 충북문학상 수상, 음성군민대상 수상, 충북도민대상(문학부분)수상, 동표문학상(2004.3.20), 월간문학 제1회 동리상수상

바람의 말

댓글 0 | 조회 591 | 2023.05.23
누가 왔었나?마당이 어수선하다. 담벼락으로 기어오르던 호박은 넝쿨째 떨어져 뒹굴고 텃밭 고추는 밭고랑에 드러누웠다. 휘어지게 열매를 키우던 자두나무 큰 가지도 꺾… 더보기

제 2의 나

댓글 0 | 조회 584 | 2023.01.18
두 손을 펴서 활짝 벙글어지는 꽃잎 모양을 만든다. 손톱마다 살구꽃 배꽃이 하늘거리고 푸른 냇물도 흐른다. 손톱에 꼼꼼히 그림 그리는 게 참 즐겁다. 류마티스 관… 더보기

굄대

댓글 0 | 조회 622 | 2022.09.14
■ 최 현숙군불 지핀 방안이 후끈하다. 퀴퀴한 냄새가 훈기를 더하는 아랫목에 두레상이 놓여 있다. 갓 지은 햅쌀밥에 김장김치와 청국장. 농사철이면 동동걸음을 쳐도… 더보기

행복한 고구마

댓글 0 | 조회 811 | 2022.07.12
내가 강릉영림서 진부관리소 말단 직원일 때 월급이 칠천 몇 백 원이었다. 그 돈으로 어린 애 둘과 아내와 내가 한 달을 빠듯하게 살았다. 어떤 때는 아내가 담배를… 더보기

꽃보다 할매

댓글 0 | 조회 978 | 2022.05.24
천지가 꽃으로 들썩입니다. 호들갑으로 들었던 꽃 멀미라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날들입니다. 해마다 이맘때면 꽃구경 나온 사람들로 몸살을 앓는 강변에 오늘은 색다… 더보기

그리움

댓글 0 | 조회 902 | 2022.04.27
■ 최 민자전지를 갈아 끼워도 가지 않는 손목시계처럼 그는 그렇게 그녀라는 길 위에 멈추어 있다. 그녀와 관련된 기억들이 그에게는 여전히 아프고 쓰리다. 이별의 … 더보기

첫사랑

댓글 0 | 조회 1,084 | 2022.03.09
■ 노 혜숙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손에 들고 있던 도시락을 덤불숲에 던졌다. 딸그락, 빈 도시락에서 수저가 날카로운 쇳소리를 냈다. 가슴이 콩닥거… 더보기

내가 방랑자로 떠돌 때

댓글 0 | 조회 936 | 2022.02.22
■ 장 기오젊었을 때 나는 장돌뱅이처럼 세상을 떠돌았다. 한 달에 20일 이상을 보따리를 싸들고 이 도시, 저 항구로 배회했다. 내가 그렇게 떠돌면서 느낀 절경(… 더보기

명태에 관한 추억

댓글 0 | 조회 782 | 2022.02.09
늦가을이나 초겨울이면 우리집 부엌 기둥에 명태 한 코가 걸려 있었다. 산골 그을음투성이의 초가집 부엌 기둥에 한 코로 걸린, 다소곳한 명태 한 쌍의 모습은 ‘천생… 더보기

바둑이

댓글 0 | 조회 990 | 2022.01.27
■ 최 현숙내 방 벽에는 그림 한 점이 걸려 있다. 이사를 해도 같은 위치에서 눈을 맞추는 사십 년 지기 룸메이트다. 검정 바탕에 배와 목덜미로 하얀 털빛이 조화… 더보기

누비처네

댓글 0 | 조회 770 | 2022.01.11
■ 목 성균아내가 이불장을 정리하다 오래된 누비처네를 찾아냈다. 한편은 초록색, 한편은 주황색 천을 맞대고 얇게 솜을 놓아서 누빈 것으로 첫애 진숙이를 낳고 산 … 더보기

낙타 이야기

댓글 0 | 조회 846 | 2021.12.22
■ 최 민자까진 무릎에 갈라진 구두를 신고, 털가죽이 벗겨진 엉덩이로 고고하게 걸어가는, ‘머리는 말 같고 눈은 양 같고 꼬리는 소 같고 걸음걸이는 학 같은’ 동… 더보기

동생을 업고

댓글 0 | 조회 1,170 | 2021.12.08
■ 정 성화박수근의 그림 ‘아이 보는 소녀’를 보고 있다. 이마를 일직선으로 가로지른 상고머리에다 까맣게 그을린 얼굴의 소녀는 동생을 업은 채 해맑게 웃고 있다.… 더보기

먼길

댓글 0 | 조회 934 | 2021.11.23
■ 노 혜숙나는 물과 불처럼 서로 다른 부모님 사이에서 맏이로 태어났다. 아버지를 닮아 지극히 내성적이었고, 어머니를 닮아 감성이 넘쳤다. 밴댕이처럼 좁은 속은 … 더보기

겨울 편지

댓글 0 | 조회 1,041 | 2021.11.10
​■ 반 숙자방금 우체부가 다녀 갔다. 요즘 부쩍 늘어난 우편물에 우체부는 영문 모를 의아한 눈길을 보낸다. 오늘로서 편지는 65통을 채웠다. 9월, 10월 두 … 더보기
Now

현재 그대 뒷모습

댓글 0 | 조회 916 | 2021.10.27
■ 반 숙자서녘 하늘에 별이 돋는다. 마음이 잔잔해야 보이는 초저녁별, 실눈을 뜨고 별 속에 아는 얼굴이 있나 찾아본다.지난겨울에는 눈이 자주 많이 내렸다. 눈이… 더보기

사라지는 것은 시간이 아니다, 우리다

댓글 0 | 조회 968 | 2021.10.12
■ 장 기오요즘도 나는 수시로 발 앞꿈치의 굳은살을 면도날로 베어 낸다.이렇게 안 하면 발바닥이 아프다.함께 일하는 연출진이라고는 달랑 연출, 조연출 둘 뿐이었던… 더보기

『유년 기행』 자전거

댓글 0 | 조회 777 | 2021.08.24
여느 때처럼 맴생이 두 마리를 끌고 들로 나왔다. 얼마 전 아버지가 암컷 맴생이 한 마리를 사와 맴생이 친구가 하나 더 늘었다. 산과 들이 기지개를 펴고 응달 진… 더보기

돼지불알

댓글 0 | 조회 1,460 | 2021.08.11
■ 목 성균상달 저녁 때, 사랑에 군불을 지피고 앉아서 쇠죽솥의 여물 익는 냄새를 맞으면 잔잔한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다. 잘 마른 장작이 거침없이 불타는 평화로… 더보기

콩 심은데 콩 나고

댓글 0 | 조회 984 | 2021.07.28
■ 반 숙자미명(未明)이다. 가만히 뜨락을 내려 밭으로 나선다. 우리집 과수원은 뽀얀 안개 숲을 헤엄쳐 나오느라 수런수런하고 있다. 가슴을 펴고 폐부 깊숙이 싱그… 더보기

유년 기행

댓글 0 | 조회 806 | 2021.06.22
■ 이 한옥동녘이 열푸름히 열리고 희끗희끗한 서리가 엷어지고 있었다. 나는 아침 새를 쫓으러 논으로 향했다. 추수를 앞둔 즈음의 새쫓기는 내가 맡은 임무였다. 옷… 더보기

말하고 싶은 눈

댓글 0 | 조회 911 | 2021.06.10
■ 반 숙자우리 집 파수꾼 미세스 짜루는 해마다 한 번씩 출산(出産)을 한다. 정월 대보름쯤이면 휘영청 찬 달빛 아래 연인을 찾아온 미스터 견(犬)공들이 여기저기… 더보기

소풍

댓글 0 | 조회 829 | 2021.05.25
■ 이 한옥소풍 가는 날은 기분이 붕붕 떴다. 다른 날보다 훨씬 일찍 일어나 나설 차비를 했다. 어머니는 벌써 하얀 쌀밥 도시락을 준비했다. 멸치볶음, 콩자반, … 더보기

사진첩

댓글 0 | 조회 1,052 | 2021.05.12
■ 최 현숙‘똑똑, 택배입니다.’아들이 보냈군요. 큼지막한 두 개의 상자가 사진첩으로 빼곡하네요. 웬만한 것은 버린다더니 추억까지 버릴 수는 없었던 모양이지요. … 더보기

가을 탓인가?

댓글 0 | 조회 972 | 2021.04.29
하늘은 눈물이 날 만큼 투명했다.태풍 ‘산바’가 지나간 며칠 후부터 그랬다. 아침마다 안개가 자욱이 산허리를 감아 피어오르고 나무들은 비릿한 냄새를 풍겼다.마당에…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