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간 것, 그러나....

연재칼럼 지난칼럼
오소영
정동희
한일수
김준
오클랜드 문학회
박명윤
수선재
천미란
박기태
성태용
명사칼럼
수필기행
조기조
김성국
채수연
템플스테이
이주연
Richard Matson
Mira Kim
EduExperts
김도형
Timothy Cho
김수동
최성길
크리스티나 리
송하연
새움터
동진
이동온
멜리사 리
조병철
정윤성
김지향
Jessica Phuang
휴람
독자기고

사라져 간 것, 그러나....

0 개 1,182 오소영

52959c1d908944a628ea8b58615a72c3_1614047917_2737.jpg
 

초겨울,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이른 밤이었다. 어린 계집애는 따뜻한 요밑에 언발을 묻고 책가방을 끌어 당겼다. 숙제를 하려던 참이었는데 얼었던 몸이 녹는가싶더니 스르르 눈이 감겼다. 손에 쥐었던 연필을 떨군채 잠시 꿈나라를 헤매고 있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귓청을 때리는 바람에 소스라쳐 잠에서 깨어났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또다닥 또다닥.... 또다닥 또다닥...”


바로 문 밖 대청 마루에서 들려오고 있었기에 발딱 일어나 방 문을 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엄마와 언니가 마주 앉아서 신나게 다듬이질을 하고 있었다. 돌아앉은 언니의 곱게 땋아내린 긴 머리끝 댕기가 가볍게 리듬을 타고 팔랑거렸다. 그건 일이 아니고 재미나게 노는 놀이처럼 흥겹게 보였고 엄마와 짝을 잘 맞춰 하는 언니가 그리 부러울 수가 없었다.


방망이 네개가 질서정연하게 박자를 맞추니 또다닥 또다닥 소리도 경쾌해서 즐거웠다.


저만치 물러앉지 않으면 방망이에 얻어맞는다고 야단을 맞으면서도 가까이에서 얼씬댔다. 해보고 싶은 호기심 때문이었다. 배워서 엄마 언니에게 당당히 자랑하고 싶었다.


혼자서 집을 보던 어느 날이었다. 다듬잇돌 위에 얌전히 덮여있는 무명 보자기를 젖혔다. 가즈런히 접혀있는 빨래위에 방망이질을 했다. 뭔가 되는 것 같아 신이나서 팔이 아플때까지 두들겼다. 아니 힘껏 두들겨 팼다는게 더 맞는 말 일 것이다.


52959c1d908944a628ea8b58615a72c3_1614047950_9463.png
 

나도 할 수 있다는 성취감 때문이었을까? 힘은 드는데 왠지 기분이 좋아지는 걸 느꼈다.


감쪽같이 덮어놓고 시침이를 떼었다.


저녁 설거질을 마친 엄마와 언니가 다듬이질을 하려고 옷 을 다시 손질하다가 깜짝 놀라서 소리를 치셨다.


옷감이 터져버렸으니 이게 어쩐 일이냐며 난감해서 언니에게 물었다.


언니는 고개를 좌우로 살짝 흔들면서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띄었다. 엄마가 은연중 눈치를 챘다.


밖으로 끌려나온 계집애는 얼마나 혼이날까? 겁에 질려있었다.


엄마의 나들이 모시치마가 칼로 벤것처럼 갈라져 있었다.(세상에 이럴수가...) 못쓰게 버려놓은 것이었다.


어쩐담. 크게 야단을 맞을줄 알았는데 엄마가 기가 막히다는 듯 츳츳 혀를 차며 차분히 웃기만 했다.


이담에 지겹도록 할 일인데 그렇게 하고 싶었어? 혼자소리로 말하며 다시 부드러워진 눈길로 어린 딸을 용서했다.


아무렇게나 하는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불룩한 방망이 배를 잘 활용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린 마음이었지만 엄마 나드리 옷을 못쓰게 버린게 너무나 미안했다. 커서 돈벌면 엄마 옷부터 해 드려야지, 그런 생각을 했었다.


50년대 후반, 남자들도 쉽게 입을 수 없었던 제일모직 라벨이 찍힌 순모(純毛)로 어머니에게 두루마기를 해 드렸다. 기쁨에 들떠서 옷자랑 딸자랑을 했지만 아마도 십여년전 어린딸의 마음속 과제였음을 짐작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달빛고운 초 겨울밤, 어디선가 또다닥 또다닥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다듬이질 소리, 댓돌밑에 귀뚜라미 소리와 어우러져 청아한 메아리로 언제나 마음을 흔들었다.


어느때는 슬프게 또 어느때는 경쾌하게... 답을 알 수 없는 마력의 음율이었다.


시집살이 고되었던 옛 여인들은 가슴속 응어리를 다듬이질로 풀었을 것만 같다. 사나운 시어머니, 미운 시누이 옷들은 더 모질게 때리면서 서러움을 달래지 않았을까?. 일상적인 일을 하면서 동시에 스트레스를 해결할 수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낮 일은 바쁘기 때문에 다듬이질은 주로 밤에 많이했다.


검푸른 달빛속에 마주앉은 두 여인의 다듬이질 모습과 청아한 소리는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이며 예술이었다.


누가봐도 멋드러진 서정시가 한편 써 질것만 같은 한국적인 정서였다.


명주나 비단같은 고급 옷감은 홍두깨에 감아올려서 돌려가며 다듬었다. 더욱 곱게 살을 입히는 예사롭지 않은 지혜였다. 단단한 박달나무 홍두깨 소리는 더 가볍고 경쾌해서 가슴이 뻥 뚫리는 시원함까지 느끼게 했다.


우리 여인들의 애환의 숨결이 담겨 대대로 이어져온 아릿함, 그러나 음악처럼 아름다운 음율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추억이었다.


종전 후, 귀환치 못한 피난지에서의 일이었다. 우리의 생계는 어머니의 바느질로 시작되었다.


염색솥에서 바로 건져 검은 물이 줄줄 흐르는 마대를 한짐씩 지고와서 마루에 풀어놓는 사람이 있었다. 더운김이 남아있는 그것을 빨랫줄에 널어 대충 말려서 축축할 때 손질을 해야했다.


꺼칠하고 투박한 마대가 다듬이돌 위에서 흠씬 두들겨 맞고나면 제법 천 구실을 했다. 그 다듬이질 몫이 언니와 나 였다. 지어입을 옷감도, 사서 입을 옷도, 있을리 없는 시절이었다. 


어머니는 그 천으로 마름개질을 해서 손틀로 몸빼바지를 수도없이 박아냈다. 수공업 몸빼바지 공장구실을 한거였다.

집 안은 온통 검은 물이 들었고 여자들 손이 몽땅 까매져서 밥하기가 민망했다. 그러나 깡수수밥 먹기도 어려운 때에 식구들이 배불리 먹고 살 수 있었으니 참으로 다행이었다.


어렸을 적 고운 정서로 들었던 다듬이질의 청아한 음악은 거친 세파에 휘둘려 잊혀졌다. 그리도 하고 싶었던 일이 오직 팔 아프고 지치는 고달픈 작업일 뿐이었다.


다듬잇돌을 어디서 구했는지 그건 지금까지 숙제로 남아있다. 아마 재수가 좋아 그 집 어딘가에서 찾아낸 거였을 것이다. 우리는 남유달리 반질하게 얌전한 제품을 만들수가 있어서 환영을 받았다. 다른 사람들보다 언제나 일이 많아서 시샘을 받기도 했다.


등이 젖도록 물건을 져날랐던 뫼산이 아저씨는 돈을 알뜰히 모아서 부자가 되었다고 들었다. 이북 평양에서 피난 내려온 홀아비가 큰 집을 사서 괜찮은 여인과 폼나게 결혼도 했으니 얼마나 대단한 성공인가.

 

세태가 바뀌고 변해서 이제 다듬이질은 한낱 옛 일이 되어 버렸다. 지금 우리들 세대가 그걸 경험한 마지막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리듬과 청아한 소리는 영원히 우리곁에서 사라질리가 없다.


그럼 그렇지, 예술로 승화해서 공연까지 하는 단체가 여러지역에 있는 것을 알게되니 너무나 반가웠다.


여인들 수십명이 어우러져 다듬이질을 하는데 노동의 흔적이라곤 없었다. 정말로 예술적인 감각이 물씬 묻어나는 멋진 공연이었다. 우리만의 독특한 타악기로서의 손색없는 음율이 참으로 자랑할만 했다. 가슴이 뭉클하다.


다알리아 꽃이 고개숙이고 달빛 곱게 창틈으로 빗겨드는 초저녁, 어디선가 청아한 다듬이질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아 귀를 기우려본다.


그러나 내 지난 시절을 몰고온 회오리 바람일 뿐, 그것은 한자락 추억이었다.


52959c1d908944a628ea8b58615a72c3_1614048014_3749.jpg
 


그냥 그때처럼, 오빠....

댓글 0 | 조회 1,359 | 2021.12.21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 . . .댓돌밑에 귀뚜라미 울어대는 쓸쓸한 계절도 아닌데 늙은 여동생은 주책없이 오빠 생각이 간절합니다.코스모스 출렁대고 감이 … 더보기

이 가을, 뒷동네 여인들

댓글 0 | 조회 1,358 | 2021.04.28
이슬도 마르지 않은 축축한 이른 아침부터 마당 의자에 나와 앉아있는 여인이 있군요. 볼품없이 뚱뚱하고 거칠게 생겨서 나이를 짐작하기도 어려운 마오리 아줌마였습니다… 더보기

립스틱 곱게, 더 화사하게...

댓글 0 | 조회 1,325 | 2019.02.27
내 안에 이렇게 속물스런 치기가 있을 줄은 몰랐다.“여기 영화관에서 55세 이상 어르신은 단돈 2000원에 영화를 볼 수 있다네요”문자 첫마디에 찍혀왔다. 아니 … 더보기

6월을 서성이게 하다. 축대 높은 뜨락

댓글 0 | 조회 1,318 | 2020.06.24
깎아지른 언덕바지 위에 어깨동무를 하듯 촘촘한 건물들. 아래서 올려다보면 아슬아슬해서 앗찔한 현깃증이 온다. 몇가닥 철주를 의지해서 공중에 천장처럼 매달린(?) … 더보기

술 석잔이 있는 풍경화

댓글 0 | 조회 1,295 | 2017.09.26
지루할만큼 질척이던 날씨가 모처럼 화창하다. 비 속에서 외롭게 피어난 자목련의 을씨년스러움도 오늘은 화사하다.성급하게 봄 냄새가 그리워지는 한나절이다.“거긴 요즘… 더보기

검은 보석같은 친구‘릴리앙’

댓글 0 | 조회 1,285 | 2018.02.27
여름이 저만치 물러나면서 손짓해 불러들인 다음 손님. 가을이 왔다. 따가운 햇살속으로 안겨오는 바람이 제법 상큼하다.이 때 쯤일게다. 다알리아 꽃이 흐드러지게 피… 더보기

아버지의 겨울

댓글 0 | 조회 1,284 | 2018.09.25
친정집에서 그리 멀지않은 곳에 살던 시절이었다. 어느날 아버지의 부름을 받았다. 어머니가 병이 나셨나? 자주 있는 일이 아니어서 무슨 일인지 약간의 긴장을 하면서… 더보기

봄바람 타고 온 가을 선물

댓글 0 | 조회 1,276 | 2017.10.25
몇 년 전이었다.나른하게 지쳐가는 몸을 추스르러 한국에 나갔다.좋은 보약 준비해 놓겠다는 딸애의 보챔도 한 몫을 하긴 했지만 그동안 여기서 못 먹었던 입에 맞는 … 더보기

영원한 나그네의 빛바랜 여행 일지

댓글 0 | 조회 1,275 | 2018.06.27
“엄마 어제 여행 떠나셨어요.”“또? 누구랑..”“아빠와 함께요.”쎄게 뒤통수를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처음 듣는 말도 아닌데 충격이 대단했다. 거침없이 나다… 더보기

침묵의 방

댓글 0 | 조회 1,256 | 2020.02.25
일주일에 한번만 가는 학교이지만 나도 어엿한 학생임엔 틀림이 없다. 무지개 경로 대학생.연말 방학이 길어 몸이 비틀리는데 중국에서 발생한 신종 코로나가 빠르게 뉴… 더보기

더도 말고 덜도 아닌 오늘만같은 일상을...

댓글 0 | 조회 1,255 | 2021.01.27
한 해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날, 달랑 한장으로 남은 달력을 내리고 새 것을 바꿔 걸었다.바람처럼 지나가는 무심한 세월이 야속했지만, 붙들어도 잡을 수도 없으니 안… 더보기

춘풍낙엽(春風落葉)

댓글 0 | 조회 1,212 | 2018.10.24
양지에 나서도 한기를 느끼는 봄바람. 품 속을 파고드는 첩의 바람이 두려운 9 월. 벚꽃 화사하게 피었는가 싶더니 아쉽다.세상구경 급해서 밀고 나오는 것일까?파아… 더보기

무대 뒤의 풍경

댓글 0 | 조회 1,196 | 2017.12.19
마치 동굴 속에 갇힌 느낌이었다. 침침하고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다. 밖으로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맘대로 되지가 않았다. 안간힘을 쓰다가 눈이 떠졌다. 다행히도 꿈… 더보기

혼자 신들려 춤추는 여인

댓글 0 | 조회 1,194 | 2021.11.24
어느 날 이른 아침이었다. 늘어지게 긴 하품을 하면서 무심중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다. 낯선 풍경이 눈을 사로잡았다.느닷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깔깔깔 미… 더보기

글쓰기, 맑은 영혼으로 다시 깨어나다

댓글 0 | 조회 1,194 | 2018.07.24
여자로 태어나서 일생을 사는 동안 주부라는 역활은 주역임이 분명하다. 그 주역에서 밀려난지도 오래다. 아줌마라는 호칭이 할머니로 바뀌었다. 검던 머리에는 흰서리가… 더보기

색동 꼬까옷에 신들렸네 “DO DREAM”

댓글 0 | 조회 1,189 | 2021.03.24
지난 2월 마지막 주 토요일 아침이었다.특별한 일탈을 꿈꾸며 무던히도 가슴졸였었는데 그 기다리던 날이 무사히 밝아왔다.(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가슴을 쓸어내리… 더보기
Now

현재 사라져 간 것, 그러나....

댓글 0 | 조회 1,183 | 2021.02.23
초겨울,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이른 밤이었다. 어린 계집애는 따뜻한 요밑에 언발을 묻고 책가방을 끌어 당겼다. 숙제를 하려던 참이었는데 얼었던 몸이 녹는가싶더니 … 더보기

어설픈 여행, 엉터리 효도

댓글 0 | 조회 1,153 | 2022.09.28
바람이 맵고 차다. 벌써 봄바람이 인사를 왔는가보다.바로 엊그제 산책길에서였다. 시커멓게 묵은 나무에서 삐죽빼죽 솟아난 여린 연둣잎이 너무 예뻐 사진에 담아 왔으… 더보기

9월에 그리는 비정상 자화상

댓글 0 | 조회 1,141 | 2019.09.24
한 달에 한번씩 꼬박 가는 길이어서 낯설지는 않았다. 오늘은 좀 더 특별한 목적으로 가고 있으니 기분은 많이 달랐다.겁보가 할 수 있는 기우는 모두 다 생각이 났… 더보기

돈이 운다구요

댓글 0 | 조회 1,108 | 2022.11.22
돌고 도는게 바로 돈 이어서 그 호칭도 돈 이란 말인가.수없는 사람들의 손과 손으로 옮겨 다니는 것 이기에 위생적으로 보면 더럽기 짝이없는게 돈이다. 그렇더라도 … 더보기

늦바람 노풍(老風)에 미친(美親) 행복

댓글 0 | 조회 1,107 | 2023.04.25
세상의 중심에서 떠밀려난 소외감. 자식들 떠난 겨울나무로 나목되어 쓸쓸히 홀로선 외로움.우리만의 정서로 교감이 아쉬운 사람들이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함께할 수… 더보기

보리밭

댓글 0 | 조회 1,073 | 2021.05.26
몸집이 만만치 않은 외국 여가수가 우리가곡 ‘보리밭’을 열창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가수 ‘발레리 쉬티’란 여인이라고 자막에 떴는데 노래를 잘 불렀다.외국 사람이 … 더보기

순임이의 순정 연애

댓글 0 | 조회 1,069 | 2021.08.25
어느모로 보나 깜도 안되는 여자가 배우가 되겠다며 미용실을 제 집처럼 드나들던 친구가 있었다.생머리를 고집하던 내가 허파에 바람든 그 친구덕(?)에 처음으로 미용… 더보기

손 가는대로 행복지수 높아지는 내 세상

댓글 0 | 조회 981 | 2021.06.22
가끔씩 오래 전에 알았던 사람들을 만나면 아직도 글 을 쓰고 있냐고 내게 묻는다. 전에는 글재주가 조금 있어서 재능봉사 차원에서 쓰는거라고 생각 했었다. 팔십이란… 더보기

돌빵구지는 지금 어찌 변해 있을까? 궁금하네요

댓글 0 | 조회 966 | 2022.05.25
촘촘한 집들 사이로 골목길을 빠져 나가면 갑자기 시원한 바람과 함께 시야가 환해진다.멀찍이 앞을 가로막는 뚝길이 길게 뻗어있다. 그 뚝엔 들풀들이 지천으로 엉켜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