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담하지 말고, 지치지 말고

연재칼럼 지난칼럼
오소영
정동희
한일수
김준
오클랜드 문학회
박명윤
수선재
천미란
박기태
성태용
명사칼럼
수필기행
조기조
김성국
채수연
템플스테이
이주연
Richard Matson
Mira Kim
EduExperts
김도형
Timothy Cho
김수동
최성길
크리스티나 리
송하연
새움터
동진
이동온
멜리사 리
조병철
정윤성
김지향
Jessica Phuang
휴람
독자기고

냉담하지 말고, 지치지 말고

0 개 1,591 명사칼럼

553c429a7b8aff1d211c5dc35aa7101b_1598418440_5473.png
 

법(法)의 옛글자는 灋(법)이다. 이 글자는 물을 의미하는 水(수)와 상상의 동물인 廌(태), 그리고 물러남을 의미하는 去(거)가 결합한 것이다. 해태 또는 해치라고도 하는 廌는 옛 문헌인 '이물지(異物志)'에서 시시비비를 가리는 뿔달린 짐승으로 기록한다.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法은 본래의 형태에서 廌가 빠져 있는 셈인데, 필자에게는 마치 法이 상상 속의 짐승을 통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주술적 관점을 벗어나 근대적 합리성을 추구하는 노력으로 읽힌다.

실상 법의 근대성은 개인이 자신의 판단하에 행위를 하고 그 결과를 스스로 책임지게 함으로써 개인의 주체성과 자율성을 핵심으로 한다. 칸트는 실천이성 개념을 통해 자기입법의 의지로서 도덕법칙과 보편 입법의 원리를 강조함으로써 근대적 개인의 철학적 토대를 정립하였다. 여기에 사회계약이라는 이론을 통해 근대적 개인의 생명, 신체, 자유, 재산이 보호된다. 특히 부르주아적 시민의 등장으로 개인의 재산권이 강조됨에 따라 재산에 대한 자기결정권 침해는 민사 분쟁을 넘어 국가의 형벌을 통해 처벌되는 범죄가 되었다. 절도(竊盜)는 소유권자의 동의 없는 재산의 불법적 이전이고, 여기에 폭행과 협박을 수단으로 하면 강도(强盜)가, 기망 내지 위계를 수단으로 하면 사기(詐欺)가 성립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동안 신체에 대한 자기결정이, 재산에 대한 자기결정에 비해, 상대적으로 촘촘한 보호를 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특히 성(性)은 국가나 사회의 것, 이른바 풍속(風俗)으로 다루어지면서 자기결정의 영역 밖으로 밀려났다. 엄밀히 말하자면, 모든 성이 그렇게 취급된 것은 아니다. 여성의 성만이 국가나 사회의 것으로 취급되었을 뿐, 남성의 성은 철저하게 자기결정의 영역으로 강조되었고, 심지어 가부장의 권리로서 엄격하게 보호되었다. 

우리 법의 사정도 다르지 않아서, 입법을 통해 형법 제32장이 “정조에 관한 죄”에서 “강간과 추행의 죄”로 바뀐 것은 비교적 최근인 1996년부터다. 이때부터 형법은 여성(부녀)의 ‘정조’가 아닌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호할 수 있었다. 이후 성적 자기결정권은 빠르게 법적 개념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2013년에는 성폭력 범죄의 객체를 ‘부녀’에 한정하지 않고 ‘사람’으로 규정함으로써 남성의 성적 자기결정권과 동등하게 보호받게 되었다. 친고죄 규정이 삭제됨에 따라 피해자가, 합의를 종용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2차 가해를 피할 수 있었던 것도 자기결정권의 관점에서 타당한 변화였다.  

올해부터는 강간 등의 예비ㆍ음모를 처벌하는 조문이 신설되었고 미성년자 의제강간 연령기준이 13세에서 16세로 상향됨으로써, 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다 두텁게 보호될 여지가 마련되었다.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호하려는 노력은 해석을 통해서도 지속되었다. 부부 강간을 처벌함으로써 부부 사이에도 성적 자기결정권이 존중되어야 함을 확인했고, ‘성인지 감수성’ 이라는 개념을 통해 통상 여성인 피해자의 자기결정권이 수용될 여지가 확보되었다. 이른바 ‘기습추행’ 처럼 폭행 자체가 추행인 경우 폭행의 정도는 ‘반드시 상대방의 의사를 제압할 정도임을 요하지 않고 그 의사에 반한 유형력의 행사가 있는 이상 힘의 대소강약은 불문’ 함으로서 성적 자기결정권의 침해를 폭넓게 인정할 수 있었다. 

이에 더 나아가 ‘비동의 간음죄’의 신설이 논의되고 있다. 폭행과 협박을 수단으로 하지 않더라도 ‘동의가 없거나’ ‘상대방의 의사에 반한’ 간음을 처벌하자는 것이다. 동의없이 이루어지는 재산 침해를 절도나 횡령으로 구성함으로써 재산권을 보호하는 것처럼, 동의없는 성적 행위를 처벌함으로써 성적 자기결정권을‘온전히’보호하려는 것이다. 물론 최근 발의되는 비동의 간음죄의 경우, 법정형 등이 기존 강간 및 강제추행과 정합적이지 않고, 법문언으로서 ‘동의’ 개념의 구체성이 떨어진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성을 개인의 선택과 결정이 아닌 국가와 사회의 산물로 보아온 그동안의 문화 또한 비동의 간음죄의 도입을 주저하게 만든다. 그러나 반사회적인 것이 아닌 한, 자기의 선택과 결정은 온전하게 존중받고 끝까지 보호되어야 한다. 이는 결국 주체의 자율성을 회복하는 것이며 언젠가 우리가 도달해야 할 미래이기에, 이 노력은 미완의 프로젝트로서 계속되어야 한다. “Ne pas se refroidir, Ne pas se lasser” (냉담하지 말고, 지치지 말고, 김연수, ‘일곱 해의 마지막’ 중에서)  

출처 : 한국일보 <형형색색>

■ 김대근

한국 형사 정책 연구원 & 경제범죄 연구실장

553c429a7b8aff1d211c5dc35aa7101b_1598418531_3229.jpg
 

누가 감히 우크라이나를 조롱하는가

댓글 0 | 조회 1,605 | 2022.03.23
“여기저기서 기관총을 조준사격하고 있었다. 거리에 쓰러진 시민을 구하기 위해 얇은 양철 방패에 의지해 이동하던 시민군에 또 사격이 가해졌다. 임시로 설치된 야전병… 더보기

침묵은 파시즘이다

댓글 0 | 조회 1,596 | 2019.03.14
지난해 한국인들은 <택시운전사>라는 영화를 보고 모두 감동했습니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그 영화의 주인공은 바로 여기 독일 제1공영방송의 … 더보기
Now

현재 냉담하지 말고, 지치지 말고

댓글 0 | 조회 1,592 | 2020.08.26
법(法)의 옛글자는 灋(법)이다. 이 글자는 물을 의미하는 水(수)와 상상의 동물인 廌(태), 그리고 물러남을 의미하는 去(거)가 결합한 것이다. 해태 또는 해치… 더보기

소통이 고통인 당신… 완벽, 승리, 주역 욕심을 버려라

댓글 0 | 조회 1,571 | 2021.01.27
소통은 직장생활 내내 화두였다. 나는 스트레스에 매우 취약하다. 소통이 안 되는 조직에서는 불안하고 답답했다. 직장생활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소통 잘 되는 조직이 … 더보기

‘무재팔자’에 대해서

댓글 0 | 조회 1,567 | 2019.12.10
무재팔자도 돈 만지는 직업 가능 단, 거의 쓰지 않는 ‘짠돌이’ 성격기업 자금담당이나 금융업 해도 이득 없는 분야엔 한푼 안 써팔자 걸맞은 소박한 생활하며 자족감… 더보기

효도계약서라도 써야 하는가

댓글 0 | 조회 1,566 | 2019.03.27
지난 30년 동안 인간사회에는 뜻밖의 변화가 많이 일어났다. 빠른 속도로 진행된 노령화도 그중 하나다. 나라마다 사정은 다르지만 국가채무가 급증한 것도 눈에 띄는… 더보기

한국, 세계에서 가장 개인주의적 사회?

댓글 0 | 조회 1,565 | 2024.02.14
저는 직업상 식민지 시대 사회주의적 독립 운동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 시대의 투사들에 대한 자료를 읽다 보면 이 분들이 정말 “초인”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더보기

강원국의 리더가 말하는 법

댓글 0 | 조회 1,525 | 2020.04.06
리더는 갈등을 ‘변화의 디딤돌’로 만든다 나는 늘 갈등한다. 짜장면과 짬뽕 사이에서, 택시와 지하철을 놓고, 그리고 청소기와 세탁기 중 하나를 택하라는 아내 앞에… 더보기

역사적인 결정, 초중고 뉴질랜드 역사 교육 의무화 - 역사교육 시리즈 (1)

댓글 0 | 조회 1,523 | 2021.06.10
머리말최근 지인으로부터 초중고교 뉴질랜드 역사교육 의무화에 대한 설명회가 있으니 관심 있으면 참가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선약이 있어 참가는 못했지만, 과연 무슨 … 더보기

약 오르면 진다

댓글 0 | 조회 1,521 | 2019.04.24
어릴 적에 보았던 연속극의 한 대목이 지금까지 기억난다. 어떤 큰 부자가 집사에게 큰일을 해결하고 오라고 파견하면서 한 말이다.“약 오르면 진다.” 심리적으로 동… 더보기

‘양심을 찍는 도끼’와 ‘쇤네 근성’

댓글 0 | 조회 1,517 | 2020.09.23
코로나 사태 이전 이야기다. 문학 관련 행사가 있어서 사전 답사차 안상학 시인과 강화도엘 갔다. 강화도 토호 함민복 시인의 안내와 지시를 따를 참이었다. 강화대교… 더보기

유머감각이 리더십이다

댓글 0 | 조회 1,486 | 2020.07.29
“당신은 웃기는 사람입니까”간디가 영국 유학할 때 이야기다. 식민지 청년이란 이유로 그를 업신여기는 영국인 교수가 있었다. 어느 날 학교 식당에서 옆자리에 앉은 … 더보기

아빠, 내 이름은 무슨 뜻이야?

댓글 0 | 조회 1,466 | 2021.11.23
최근에 한글학교에 입학하는 학생 중 특히 나이 어린 학생들이 많이 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민 2세가 태어나 자라고 있어 자랑스럽고 이들을 위한 우리 말과 글의… 더보기

말에도 뿌리가 있다

댓글 0 | 조회 1,463 | 2020.10.14
■ 강 진모말에도 뿌리가 있다. 어떤 말은 뿌리가 얕아 유행처럼 사라지는가 하면, 어떤 말은 뿌리가 깊어 왕조가 무너져도 살아남는 말이 있다. 그렇게 뿌리깊은 말… 더보기

화순 학포당

댓글 0 | 조회 1,438 | 2020.05.04
의(義)란 무엇인가, 두 번 보여준 양팽손 .천하에는 두 가지 큰 기준이 있다. 시비(是非)와 이해(利害)가 그것이다. 여기서 네 등급이 나온다. 옳으면서 이익을… 더보기

직업인과 직장인

댓글 0 | 조회 1,428 | 2019.08.13
나는 내 직장 길 건너에 있는 아파트에 산다. 아파트 지하 1층에는 운동할 수 있는 시설이 갖춰져 있는데 그곳에서 운동을 하던 어느 날 아침에 있었던 일이다.큰 … 더보기

문외한의 영시(英詩) 산책

댓글 0 | 조회 1,390 | 2020.09.09
얼마 전 아내와 함께 흰 구름도 눈 부신 오후, 봄 향기 가득한 동네길을 걷고 있었다. 쇼핑몰과 상점이 있는 마을 중심가까지 갔다가 돌아오는데 짓궂은 한줄기 소나… 더보기

부끄러워 할 줄 안다는 것

댓글 0 | 조회 1,387 | 2020.08.12
“부끄러움 아는 자기반성 능력, 인간적 활동의 출발점”일만 하면서 앞만 보고 달리던 사람이 어느 날부터 낯선 질문에 빠지기 시작한다. 나는 왜 사는가? 삶의 의미… 더보기

멘토는 없다

댓글 0 | 조회 1,378 | 2019.06.12
젊은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는 자리에서 반복해서 듣게 되는 질문이 하나 있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멘토가 누구였느냐. 처음엔 이 말을 인생 스승이 있느냐는 말로 들… 더보기

선비들에게서도 배울 점이 있는가?

댓글 0 | 조회 1,368 | 2019.07.24
서양 중세의 기사와 영국 근대의 젠트리는 시골에 살더라도, 자신을 마을 사람들과는 완연히 구별되는 특수한 존재로 인식하였다. 일본의 사무라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더보기

하늘과 우편

댓글 0 | 조회 1,342 | 2019.02.13
다시 새해다. 새해는 언제나 우리에게 설레임과 기쁜 희망을 준다. 우리들의 인생이 무언가 새해에는 달라지고 더욱 새로워지고, 바라고 원하는 것들을 기대하게 되기 … 더보기

꽃필수록 아프다

댓글 0 | 조회 1,328 | 2019.07.09
오래 전, 누가 바다 멀리 어느 섬에서 흐느껴 우는 소리가 자꾸 환청처럼 들려온다고 했다. 거기 섬사람들의 목쉰 통곡이 분명한데, 위험해서 아무도 건너가 위로해주… 더보기

영웅은 없다

댓글 0 | 조회 1,305 | 2020.12.23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비극의 주인공은 “훌륭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가 말하는 훌륭한 사람이란 결함이 없는 인품의 소유자가 아니라 사회적 신분이 높은 사람을 의… 더보기

위대함의 원천

댓글 0 | 조회 1,289 | 2020.11.25
인간은 근본적으로 문화적 존재다. 자신의 생각을 반영하여 인간과 관계없이 존재하던 자연의 세계 위에 무늬를 그린다.무늬를 그리면서 자연 세계를 변화시키는 인간의 … 더보기

두터워지는 새해를 위하여

댓글 0 | 조회 1,278 | 2019.02.26
우리는 한국 사람이고, 한국 사람으로 산다. 이런 점에서 이젠 한국 사람이 무엇인지도 알려고 노력해야 한다. 새해에는 함재봉의 책을 읽는 것부터 다시 시작하자.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