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으로서의 사랑

연재칼럼 지난칼럼
오소영
정동희
한일수
김준
오클랜드 문학회
박명윤
수선재
천미란
박기태
성태용
명사칼럼
수필기행
조기조
김성국
채수연
템플스테이
이주연
Richard Matson
Mira Kim
EduExperts
김도형
Timothy Cho
김수동
최성길
크리스티나 리
송하연
새움터
동진
이동온
멜리사 리
조병철
정윤성
김지향
Jessica Phuang
휴람
독자기고

‘사건’으로서의 사랑

0 개 1,236 명사칼럼

인천의 한 마트에서 사건이 일어났다. 34세 아버지와 12세 아들이 마트에서 물건을 훔치다 적발됐다. 그들이 훔친 것은 우유 2팩과 사과 6개, 그리고 몇 개의 마실 것, 현금으로 환산하면 1만원 내외의 먹을 것들이었다. 

 

경찰이 출동했고 아버지는 벌벌 떨고 땀을 흘리며 ‘배가 고파서’ 이런 일을 저질렀다며 잘못을 빌었다. 경찰이 사정을 물으니 이들은 벌써 두 끼를 굶었고, 아빠는 기초생활수급자였으며 당뇨와 갑상선 질환이 심해져 6개월째 일을 그만둔 상태였다고 했다. 이들은 임대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집에는 홀어머니와 7세의 어린 아들이 있었다.

 

진짜 ‘사건’은 이제부터 일어난다. 먼저, 마트 주인은 처벌을 원하기는커녕 앞으로 이들에게 쌀과 생필품을 공급하겠다고 했다. 경찰은 이들을 훈방 조치하기로 했다. 아버지에게는 행정복지센터에 연락해 일자리를 찾아주기로 했으며, 아들에게는 무료급식카드를 발급하기로 했다. 경찰은 “요즘 세상에 밥 굶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라고 울먹이며 이들에게 따뜻한 국밥을 사줬다.

 

바로 그때 회색 옷차림의 어떤 사람이 들어와 아무 말 없이 부자에게 흰 봉투를 내놓고 나갔다. 아들이 황급히 쫓아나갔으나 이 사람은 손사래를 치며 사라졌다. 그 봉투에는 현금 20만원이 들어 있었다. 그 사람은 마트에서 우연히 이 장면을 목격하고 현금을 인출한 후 경찰과 이들이 있던 식당을 다시 찾아와 그것을 건네고 간 것이었다. 경찰은 이 사람에게 감사장을 수여하기 위해 수소문을 했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존재와 사건』의 저자인 알랭 바디유는 ‘사건(event)’을 잠재적인 것, 아직 실현되지 않은 것을 드러내는 것이라 정의한다. 그것은 ‘반복되는 현재’ 와의 근본적인 ‘결별’이며 “존재의 강밀도(强密度)를 실제로 변화시키는 것” 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지금 불공정과 불공평이 ‘반복되는 현재’에 살고 있다. 일반 시민들에게 있어서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법칙은 ‘객관적 사실’이자 관행으로 여겨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라면 10개를 훔치고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받는가 하면, 70억원대의 횡령•배임으로 기소된 어떤 대기업 회장의 아들은 징역 3년을 선고받는다. LSD 등 마약을 대량 밀반입하다가 적발된 전 국회의원의 자식은 불구속 처리되고, 구속된 재벌 회장들이 얼마 지나지도 않아 마스크를 쓰고 휠체어에 앉아 유유히 풀려나는 모습은 얼마나 익숙한 풍경인가. 반란수괴죄로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전직 대통령이 며칠 전, 하필 반란 40주년이 되는 날에 반란의 측근들, 종교계의 원로와 1인당 20만원짜리 회식을 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는 수중에 29만원밖에 없다며 아직도 1000억원이 넘는 추징금을 갚지 않고 있다.

 

이제 우리 사회는 정직이나 사랑이 ‘사건’인 ‘희한한’ 시대에 살고 있다. 앞에 예로 든 일이 바디유적 의미의 ‘사건’일 수 있는 것은,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사악한 관습과 전혀 다른 방향의 ‘놀라운’ 일이, 게다가 집단적인 조합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사건’은 수많은 주체에게 선한 영향을 끼친다. 바디유가 ‘사건’을 “존재의 강밀도를 실제로 변화시키는 것” 이라고 정의한 것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사건’은 주체를 변화시키며,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진리를 구현한다. 이 과정을 바디유는 “진리 절차”라고 부른다. 바이유가 볼 때 진리 절차는 크게 네 가지 조건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예술•사랑•과학, 그리고 정치다. 그 중에서도 사랑은 바디유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진리 절차의 조건이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이름의 모든 행위가 다 ‘사건’은 아니다. 바디유는 사랑을 두 종류로 나눈다. 그 중 하나는 ‘위기(위험)’나 손실을 스스로 감수하는 사랑이며, 다른 하나는 ‘위기 관리’ 차원의 사랑이다. 후자는 그 흔해 빠진 ‘러브’ 일지는 모르나 ‘사건’은 아니며, ‘비즈니스’다. 그것은 위기나 손해를 절대적으로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에서 보여준 ‘사건’으로서의 사랑의 주인공들은 (위기까지는 아닐지라도) 손실을 스스로 감행한다. 자기 주머니를 털어 가난한 부자에게 따뜻한 국밥을 사주는 경찰, 신분을 밝히지 않으며 현금을 건넨 행인, 처벌은커녕 생필품을 대주겠다는 마트의 주인은 ‘사건’의 주체들이고, 새로운 진리를 만드는 사람들이며, 이미 그 진리 절차에 돌입한 주체들이다. 누가 뭐래도 사랑이 진리다. 모든 예술과 과학과 정치는 사랑에 복종해야 한다.

* [출처: 중앙일보]

 

=========

■ 오 민석 시인·단국대 영문과 교수 


충남 공주 출생.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이며 현재 단국대학교 영미인문학과 교수로 문학 이론, 현대사상, 대중문화론 등을 가르치고 있다. 1990년 월간 <<한길문학>> 창간기념 신인상에 시가 당선되어 시인으로 등단하였으며,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이 당선되며 평론활동을 시작하였다. 

시집 <<굿모닝, 에브리원>>,  <<그리운 명륜여인숙>>,  <<기차는 오늘밤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다>>,   문학이론서 <<현대문학이론의 길잡이>>, <<정치적 비평의 미래를 위하여>>, 문학연구서 <<저항의 방식:캐나다 현대 원주민 문학의 지평>>, 대중문학 연구서 송해 평전 <<나는 딴따라다>>, <<밥 딜런, 그의 나라에는 누가 사는가>>, 시 해설 서 <<아침 시:나를 깨우는 매일 오 분>>, 산문집 <<경계에서의 글쓰기>>, <<개기는 인생도 괜찮다>>, 번역서 바스코 포파 시집 <<절름발이 늑대에게 경의를>> 등을 냈다. <단국문학상>, <부석 평론상> 등을 수상하였다.

 

857b4af401b1e0388db981035e908a50_1580165297_0239.jpg
 

생활 속의 붓 문화

댓글 0 | 조회 1,169 | 2020.02.12
해가 바뀌어 2020년, 경자년(庚子年)이 되자 설 날을 맞이하는 서예 전시회 하나가 열렸다. 연향회(=한우리교회 문화센터의 서예교실) 회원들이 마련한 16번째의… 더보기
Now

현재 ‘사건’으로서의 사랑

댓글 0 | 조회 1,237 | 2020.01.28
인천의 한 마트에서 사건이 일어났다. 34세 아버지와 12세 아들이 마트에서 물건을 훔치다 적발됐다. 그들이 훔친 것은 우유 2팩과 사과 6개, 그리고 몇 개의 … 더보기

뉴질랜드 시내버스 이야기

댓글 0 | 조회 3,092 | 2020.01.14
머리말2019년 11월 11일 (월요일)과 13일 (수요일) 이틀동안 오클랜드 남동부 지역을 운행하는 버스회사 Go Bus의 East Tamaki and Airp… 더보기

간디와 Salt March

댓글 0 | 조회 1,001 | 2019.12.23
해외여행이 요즘처럼 쉽지 않았던 20여 년 전… 해외출장은 또한 그 나라의 문화와 역사의 한 토막을 엿보며 상식과 상담(商談)의 자료를 쌓는데 더 없이 귀한 기회… 더보기

‘무재팔자’에 대해서

댓글 0 | 조회 1,558 | 2019.12.10
무재팔자도 돈 만지는 직업 가능 단, 거의 쓰지 않는 ‘짠돌이’ 성격기업 자금담당이나 금융업 해도 이득 없는 분야엔 한푼 안 써팔자 걸맞은 소박한 생활하며 자족감… 더보기

다양한 상속제도

댓글 0 | 조회 1,985 | 2019.11.27
인류역사상 가장 널리 퍼진 상속제도는 부계상속이다. 장남의 특권적 지위를 인정하는 장자상속을 비롯해, 막내아들이 재산을 상속하는 말자상속, 여러 아들들이 고루 나… 더보기

배리(背理)를 견디기 혹은 극복

댓글 0 | 조회 1,058 | 2019.11.13
존재론적 배리를 견디는 운명사회적 배리에 저항하는 숭고성정치가 일상이 되어야 하는 이유배리(背理)를 경험하지 않을 때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가. 모든 것이 논리대로… 더보기

지금 당신이 꽃입니다

댓글 0 | 조회 1,688 | 2019.10.22
땅에 쑥 돋아납니다. 해 뜨면 쑥 잎 끝에 보석 같은 이슬방울이 반짝이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자연은 무궁무진무구입니다. 우리의 눈과 마음이 가 닿지 못한 … 더보기

꿈이 멎어 있는 곳

댓글 0 | 조회 1,091 | 2019.10.09
■ 유 승재“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윤해영 작사 조두남 작곡의 선구자에 나오는 영감과 솟구치는 힘이 숨어 있는 멋 있는 구절이다… 더보기

우리는 영원히 이방인일까?

댓글 0 | 조회 2,242 | 2019.09.24
머리말1세대는 백프로 이방인(other)으로 살다 생을 마감한다고 본다. 이는 본인이 뉴질랜드를 얼마나 사랑하고 또 얼마나 많은 키위 친구들이 자기를 아끼는가 여… 더보기

나이 들어서는 음•체•미

댓글 0 | 조회 1,637 | 2019.09.10
10대 후반에 학교 다닐 때는 ‘국어•영어•수학’ 과목이 중요하다. 여기서 결판이 난다. 명문대학에 들어가는 것도 국•영•수가 좌우한다. 진로와 직업은 명문대학을… 더보기

어느 나무의 이야기

댓글 0 | 조회 997 | 2019.08.28
“우둔한 영혼들아. 나를 보렴”다 무너진 후에야 비로소 아는 것낮고 약한 것들의 푸르른 생명성나무는 자신도 모르게 이 세상에 심어졌습니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누군… 더보기

직업인과 직장인

댓글 0 | 조회 1,419 | 2019.08.13
나는 내 직장 길 건너에 있는 아파트에 산다. 아파트 지하 1층에는 운동할 수 있는 시설이 갖춰져 있는데 그곳에서 운동을 하던 어느 날 아침에 있었던 일이다.큰 … 더보기

선비들에게서도 배울 점이 있는가?

댓글 0 | 조회 1,355 | 2019.07.24
서양 중세의 기사와 영국 근대의 젠트리는 시골에 살더라도, 자신을 마을 사람들과는 완연히 구별되는 특수한 존재로 인식하였다. 일본의 사무라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더보기

꽃필수록 아프다

댓글 0 | 조회 1,320 | 2019.07.09
오래 전, 누가 바다 멀리 어느 섬에서 흐느껴 우는 소리가 자꾸 환청처럼 들려온다고 했다. 거기 섬사람들의 목쉰 통곡이 분명한데, 위험해서 아무도 건너가 위로해주… 더보기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

댓글 0 | 조회 1,728 | 2019.06.26
“올해 다들 환갑이라며?” 국어 선생님께서 물으셨다. 원탁에 둘러앉은 우리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네” 라고 답했다. 선생님 말씀 잘 듣던 모범생의 목소리도, 그… 더보기

멘토는 없다

댓글 0 | 조회 1,368 | 2019.06.12
젊은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는 자리에서 반복해서 듣게 되는 질문이 하나 있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멘토가 누구였느냐. 처음엔 이 말을 인생 스승이 있느냐는 말로 들… 더보기

그저 그런 사람이 되는 이유

댓글 0 | 조회 1,859 | 2019.05.29
현실만 해결하려는 혁명은 높은 곳에 다다를 수 없어꿈을 가진 학생이 더 큰 열매를 맺듯이 낮은 시선은 작은 결과 낳아머물고자 하면 머물고 날고자 하면 나는 것이 … 더보기

‘보여주기’ 와 ‘보기’

댓글 0 | 조회 1,181 | 2019.05.15
‘보여주기’는 자신을 소진하고 ‘보기’는 충전하는 행위대표적 ‘보기’ 습관인 독서ㆍ여행ㆍ산책은 영혼의 충전소​우리의 일상은 ‘보여주기’와 ‘보기’로 구성되어 있다… 더보기

약 오르면 진다

댓글 0 | 조회 1,511 | 2019.04.24
어릴 적에 보았던 연속극의 한 대목이 지금까지 기억난다. 어떤 큰 부자가 집사에게 큰일을 해결하고 오라고 파견하면서 한 말이다.“약 오르면 진다.” 심리적으로 동… 더보기

1954년 2월, 한국에 온 마릴린 먼로

댓글 0 | 조회 1,752 | 2019.04.09
매년 2월이면 세기적인 매혹의 헐리우드 스타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 M.M)가 떠오른다. 노마진 모텐슨이란 본명으로 가난한 고아로 태어나 195… 더보기

효도계약서라도 써야 하는가

댓글 0 | 조회 1,556 | 2019.03.27
지난 30년 동안 인간사회에는 뜻밖의 변화가 많이 일어났다. 빠른 속도로 진행된 노령화도 그중 하나다. 나라마다 사정은 다르지만 국가채무가 급증한 것도 눈에 띄는… 더보기

침묵은 파시즘이다

댓글 0 | 조회 1,589 | 2019.03.14
지난해 한국인들은 <택시운전사>라는 영화를 보고 모두 감동했습니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그 영화의 주인공은 바로 여기 독일 제1공영방송의 … 더보기

두터워지는 새해를 위하여

댓글 0 | 조회 1,271 | 2019.02.26
우리는 한국 사람이고, 한국 사람으로 산다. 이런 점에서 이젠 한국 사람이 무엇인지도 알려고 노력해야 한다. 새해에는 함재봉의 책을 읽는 것부터 다시 시작하자. … 더보기

하늘과 우편

댓글 0 | 조회 1,331 | 2019.02.13
다시 새해다. 새해는 언제나 우리에게 설레임과 기쁜 희망을 준다. 우리들의 인생이 무언가 새해에는 달라지고 더욱 새로워지고, 바라고 원하는 것들을 기대하게 되기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