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티

연재칼럼 지난칼럼
오소영
정동희
한일수
김준
오클랜드 문학회
박명윤
수선재
천미란
박기태
성태용
명사칼럼
수필기행
조기조
김성국
채수연
템플스테이
이주연
Richard Matson
Mira Kim
EduExperts
김도형
Timothy Cho
김수동
최성길
크리스티나 리
송하연
새움터
동진
이동온
멜리사 리
조병철
정윤성
김지향
Jessica Phuang
휴람
독자기고

팬티

0 개 1,630 수필기행

아슬아슬하다. 오늘은 분홍색에 흰 동그라미가 보일 듯 말 듯 숨바꼭질이다. 어저께는 짙은 파란줄무늬였었다. 나도 모르게 픽 웃으며 눈길을 거둔다. 나는 외간남자의 그것도 총각의 엉덩이를 훔쳐보는 여자가 되었다.

 

총각은 새로 얻은 직장의 팀장이다. 바로 내 직속상관이다. 손으로 지시를 해야 하는 그와 발로 움직여야 하는 나는 손과 발 같은 관계다. 손잡고 일일이 가르쳐도 알아듣기 힘든 나에게 간단한 지시를 던지고는 휙 돌아서기 일쑤다. 무엇을 어찌해야 하는지 몰라 멀뚱히 쳐다보다 어찌 눈치로 맞췄다 싶으면 틀렸다고 싸늘한 눈빛이 되돌아온다. 아줌마의 넉살도 통하지가 않는다. 일부러 눈을 맞추고 인사를 했지만 그는 도통 무덤덤한 반응이다. 업무상 일 이외에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지가 않은 듯하다.

 

사실 내가 일을 똑부러지게 잘 한다면 당연히 아무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것이 생소한 곳에서 발을 붙이기가 쉽지 않다. 간단한 일이라도 어느 정도 숙련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윤이 발등의 불인 작은 회사는 개인의 사정을 보아 기다려줄 여유가 없다. 그날 당장부터 노련하기를 원한다. 오직 카운트에 찍히는 숫자만을 근거로 삼는다.

 

이런 일도 있었다. 그 날은 눈에 익은 작업이라 혼자 일처리를 했다. 그런데 거의 끝나갈 무렵 화들짝 놀라 외치는 소리가 났다. 앞 공정도 하지 않았는데 모두 마무리해버린 것이다. 영문조차 모르는 나를 제쳐두고 팀장은 애꿎은 동료를 나무랐다.  그 동료는 나보다 선임이라는 이유만으로 대신 혼이 난 것이다.  얼굴이 벌개진 동료를 보고서야 상황 파악이 되었다.

 

그 뒤 한동안은 쥐구멍만을 찾았다. 회사에 큰 손해를 끼쳐서만은 아니었다. 팀장의 일처리 방법 때문이었다. 차라리 나에게 따끔한 주의를 준다면 그때는 부끄럽겠지만 곧 괜찮아졌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을 마주보지 않고 비스듬히 나무라는데 더욱 미안했다. 주눅이 들면 잘하던 것도 실수를 하게 된다. 완전히 숙달도 되기 전에 그런 일까지 있고나니 팀장만 보면 눈부터 피했다. 왕방울만한 눈이 나를 향할 때면 바위가 굴러 덮쳐오는 소리가 울리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 뒤 큰 소리 한 번 내지 않아도 그의 앞에서는 주눅이 들었다. 민망스럽기도 하지만 자존심이 상했다. 사람의 정이 우선이라 여기며 살아온 나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괜찮다는, 누구나 실수는 하는 거라는 위로의 말 한마디가 무어 그리 어렵다고 무표정으로 일관할까. 이렇게까지 다녀야하나 싶어 그만둘까 하는 생각도 여러번 했었다.

 

말수가 많은 사람은 싹싹하고 친절해서 쉽게 친해질 수가 있다. 반면 과묵한 사람은 속을 알 수가 없어 가까이하기가 어렵다. 팀장은 평소에 말이 많지 않다. 꼭 할 말만 하고 감정을 드러내지도 않을 뿐 아니라 얼굴에 항상 구름을 띄고 있어 농 한 마디 쉽게 건네지 못 한다.

 

전에는 내 일만 하면 된다는 사고방식으로 앞만 보았다. 그러나 이제는 자꾸 주위를 살펴보게 된다. 남이 하는 일과 다음에 해야 하는 일을 미리 보아 둔다. 나도 모르게 눈치를 살피게 된 것이다. 그러다 보게 되었다. 그의 작업복 속에서 드러난 팬티를.

 

한 자리에 서서 일하는 나와는 달리 팀장은 여기저기를 관리하고 정리한다. 혀끝으로 지시만 해도 되는 직책인데도 그의 입은 매번 꽉 다물려 있다. 말수가 적은만큼 그는 일보다 손발이 더 분주히 움직인다. 자연적으로 허리는 숙여져야 한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구부린 뒷모습 중심에서 팬티는 더욱 돋보였다. 일부러 보려고 한 것도 아니었고 평소 궁금해 본 적도 없었다. 성 도착증이 있어 희열을 느끼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한번 보아버린 부위에는 자꾸 눈이 간다.

 

하루는 줄무늬였다가 다음에 노란색이었다. 검은 작업복 사이로 드러나는 속옷 색깔은 더욱 선명히 도드라져보였다. 주로 사각 팬티를 즐기는 듯 하고 가끔은 넓은 탄력밴드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삼각팬티를 입기도 하는가 보았다. 그런데 요 며칠은 허연 살 아래 골까지 그대로 적나라하다. 무슨 조화일까? 혹? 내 머릿속이 상상으로 분주하다.

 

속옷은 옷만의 기능이 아니다. 보일까 싶어 단단히 단속을 하면서도 누군가에게 보일 때를 염두에 두고 색을 고르게 된다. 은밀하게 속내를 대변한다. 어쩌다 실수로 보아버리면 보여 준 사람보다 본 사람이 더 당황하게 된다. 무채색 작업복이 주인의 의도된 얼굴이라면 색 고운 팬티는 숨겨진 마음은 아닐는지! 직책상 무표정과 근엄을 흉내 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람들의 성격은 가지가지다. 처음부터 마음을 활짝 열고 대하는 사람도 있지만 서서히 조금씩 열어가는 사람도 있다. 저 사람의 성품은 이렇구나 싶다가도 어느 날 얼굴이 싹 바뀌는 경우를 허다하게 겪게 된다. 상황에 따라 필요에 따라 고무줄처럼 조절이 가능하기도 한 것 같다. 회사는 카멜레온처럼 적절한 대처에 능한 사람을 원한다. 특히나 말은 책임에 따라 그 강도가 세어진다.       

 

큰 둑도 작은 틈새가 있고 태산도 한 삽씩 퍼내면 언젠가 무너진다고 했다. 둑을 무너뜨릴 의도나 태산을 옮길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일을 하면서 자연스럽고 마음 편했으면 한다. 첫 발을 떼는 두려움도 컸지만 계속 걸어야 하는 수고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어차피 걸어야 하는 길이라면 동행과의 관계가 즐거웠으면 좋겠다. 사실, 그 총각팀장이 무슨 속옷을 입던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런데 어렵고 무서운 사람이 이제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 또 다시 팀장의 사나운 눈총을 받더라도 살짝살짝 보이던 팬티 같은 성격을 알기에 전처럼 그런 상처는 생기지 않을 것 같다.

 

■ 김 영미 

계간 <<수필세계>>신인상, 김유정문학상 대상, 동서커피문학상 동상, 백교문학상, 포항소재공모전, 산림문학상 수상 

풍로초 2

댓글 0 | 조회 1,080 | 2020.02.11
■ 정 성화동생이 전화를 했다. 엄마가 요즘 말하는 것도 귀찮아하고, 매일 챙겨 보던 TV 드라마도 재미없다고 하며 그저 멍하니 창밖을 내다본다고 했다. 폐질환으… 더보기

수요일 애인

댓글 0 | 조회 1,337 | 2020.01.29
■ 김 혜정오늘도 전화벨이 울린다. 핸드폰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하는가 싶더니 입가에 미소를 짓는다. 눈살을 찌푸리는 나를 피해 후다닥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아… 더보기

‘빨리빨리’ 냐 ‘천천히’ 냐

댓글 0 | 조회 1,122 | 2020.01.15
■ 이 방주오늘은 바리나시로 가야 한다. 석가모니 탄생지인 룸비니에서 힌두교의 성지 바리나시까지는 340km라고 한다. 열두 시간을 가야 한다는 현지인 가이드의 … 더보기

어머님과 시에미

댓글 0 | 조회 1,017 | 2019.12.20
■ 류 경희시어머님은 무학의 시골 태생이었다. 겨우 당신과 자식들의 이름 정도를 어설프게 그리실 줄 아는 어머님이 처음엔 참 답답했다. 감히 드러내어 불평은 하지… 더보기

헌책방을 읽다

댓글 0 | 조회 1,367 | 2019.12.10
■ 김 이랑텅 빈 가게, 빛바랜 간판만이 여기가 한때 버림받은 책들의 처소였음을 알린다. 아무런 안내가 없는 것으로 보아 머지않아 지도에서 사라질 모양이다. 발품… 더보기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렸는가?

댓글 0 | 조회 1,250 | 2019.11.26
늙어지면 수시로 잠이 오고 또 수시로 잠이 깬다. 남들이 다 자는 한밤중에 도깨비처럼 깨어 거실을 어슬렁거리고 남들이 TV를 보는 시간에는 혼자서 꾸벅거리고 한밤… 더보기

그림자

댓글 0 | 조회 1,032 | 2019.11.12
■ 노 혜숙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거실 벽에 그림자를 만들고 지나간다. 길가의 벚나무가 베란다 유리창을 뚫고 벽에 부딪치면서 허리가 꺽인다. 잔가지들이 태풍에 휩쓸… 더보기

토마토 그 짭짤한 레시피

댓글 0 | 조회 1,470 | 2019.10.23
■ 배 혜숙토마토를 출고한다는 문자를 받고 농장의 홈페이지로 들어갔다. 겨울을 난 짭짤이 토마토는 그 맛이 일품이다. 부드럽게 녹아드는 약간의 짠맛이 입맛을 확 … 더보기

달빛 소풍

댓글 0 | 조회 1,573 | 2019.10.08
■ 안 경덕나만의 달이 있다. 밤마다 휘영청 밝은 달이 숲속에서 뜬다. 이 달은 날씨가 흐려도 눈비가 와도 천연덕스럽게 뜬다. 일 년 삼백육십오일을 하루같이 노숙… 더보기

비닐우산

댓글 0 | 조회 1,307 | 2019.09.24
■ 정 진권​언제 어디서 샀는지 모르지만 우리 집에도 헌 비닐우산이 몇 된다. 아시다시피 한 번 쓰고 나면 버려도 좋을 이 비닐우산은 한 군데도 탄탄한 데가 없다… 더보기

남편의 그녀

댓글 0 | 조회 1,388 | 2019.09.10
그가 슬며시 지나간다. 그녀를 만나러 나가는 것이리라. 눈치는 채고 있었지만 알은 척할 수 없다. 알은 척 했을 때 맞닥뜨리게 될 그의 반응이 두려워서다. 오히려… 더보기

일층 아저씨와 이층 아줌마

댓글 0 | 조회 1,576 | 2019.08.27
적막이 찾아든 어둠 속에서 호루라기를 분다. 그 소리에 일층에서 ‘휘리리’ 답이 온다. 일층에는 남편이 살고 이층에는 내가 산다. 만약의 경우, 골든타임을 놓치지… 더보기

포기하지 않으리

댓글 0 | 조회 1,022 | 2019.08.14
이상야릇한 감나무와의 만남은 나를 되돌아보게 했다. 내 안에 숨은 아픈 상처가 나타났다 서서히 사라져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내 운명의 주인이며, 나는 내 영… 더보기

내가 대통령이라면

댓글 0 | 조회 1,473 | 2019.07.23
글쓴이:정 임표사람은 나면 서울로, 말은 나면 제주도로 보내라는 말을 믿고 아이들을 전부 서울로 보내 공부시킨 나는 요즘 망연자실한다. 2018년 8월, 서울의 … 더보기

하필이면

댓글 0 | 조회 1,016 | 2019.07.10
‘하필이면~’ 이라는 말 속에는 인간의 뿌리 깊은 이기심이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일단 존재의 가능성을 전제로 한다.‘하필이면 소풍가는 날 왜 비가 오는가’ 라고… 더보기

Gloomy Monday

댓글 0 | 조회 1,323 | 2019.06.25
월요일은 대체로 우울하다. 종일 혼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전에 잠시 취미 삼아 배우는 서예교실에 가서 글씨 몇 자를 쓰고 오면, 이후의 시간을 채울 수가 없… 더보기

풍로초

댓글 0 | 조회 1,830 | 2019.06.11
꽃집 앞에는 유치원 앙처럼 이름표를 단 꽃모종이 열 지어 있었다. 그 중 ‘풍로초’라는 이름이 내 눈에 들어왔다. 오종종한 잎이 무성해져 줄기도 보이지 않는 야생… 더보기

오지랖

댓글 0 | 조회 1,332 | 2019.05.28
나에게는 지병이 있다. 그것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반사적으로 작동되는 오지랖병이다. 병이되 병으로 여기지 않고 평생을 살아왔지만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발병하는… 더보기

유전자도 마음을 바꾼다

댓글 0 | 조회 964 | 2019.05.14
만약에 내가 유전학자라면 꼭 한 가지 밝히고 싶은 게 있다. 사람의 유전자에 내재해 있을 이타적 사랑에 대한 것이다. 아직은 누구도 시도해보지 않아서 그렇지 마음… 더보기

길 위에서

댓글 0 | 조회 1,013 | 2019.04.23
낙엽 진 도심의 거리가 스산하다. 그 속을 비집고 다니는 사람들의 표정이 무덤덤하다. 저마다 목적지를 향해 바쁘게 걷다보니 남의 일에 관심이 없는가 보다. 시청 … 더보기

현재 팬티

댓글 0 | 조회 1,631 | 2019.04.10
아슬아슬하다. 오늘은 분홍색에 흰 동그라미가 보일 듯 말 듯 숨바꼭질이다. 어저께는 짙은 파란줄무늬였었다. 나도 모르게 픽 웃으며 눈길을 거둔다. 나는 외간남자의… 더보기

영원한 갑은 없다

댓글 0 | 조회 1,111 | 2019.03.26
나는 대체로 ‘갑’이었다. 자유직업인 탤런트들은 오로지 드라마에 출연해 출연료를 받아야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연출자들은 ‘갑’이다. 선택을 받아… 더보기

황사

댓글 0 | 조회 1,062 | 2019.03.13
한낮인데도 사방은 어둑어둑하다. 황사가 심하겠다는 일기예보가 있었지만 우리는 예정대로 집을 나섰다.강원도로 접어들자 황사 바람이 거세졌다. 전조등을 켰지만 제 구… 더보기

댓글 0 | 조회 1,390 | 2019.02.27
'참’이라는 말은 사실이나 어긋남이 없고, 그 바탕이 진실하다는 뜻을 가진 참 괜찮은 말이다. 참기름, 참개구리, 참조기, 참깨처럼 어떤 낱말의 앞에 붙어서는 그… 더보기

길 위에서

댓글 0 | 조회 1,175 | 2019.02.14
어느 해 초가을, 땅끝 마을 갈두리(葛頭里)에 갔다 돌아올 때 생긴 일이다. 나는 토말(土末) 전망대에서 바라본 환상적인 가을 바다의 감동에 잠겨서 서서히 차를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