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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상이라는 심리 방어기제

새움터 0 993 2018.05.10 17:14

■ 새움터 회원: 정인화(심리 상담사 / 심리 치료사)

심리 치료를 오랫동안 받으면서 방어기제로부터 매우 자유로워졌다고 자부한다. 예전에는 무의식적으로 사용했던 방어기제를 이제는 의식적으로 골라 쓸 수 있을 정도로 내공이 늘었다. 방어기제를 의식적으로 선택한다고 해서 내가 달관했다는 말은 아니다. 횟수는 줄었지만, 아직도 툭하면 발끈하고 짜증도 부린다.  

 

방어기제는 무의식적으로 사실을 왜곡하거나 거부하면서 스트레스나 불안의 위협에서 사람을 보호한다. 사람들은 방어기제가 안 먹힐 때도 자신을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과거의 기억 때문에 죽으라고 똑같은 방어기제를 사용한다. 이런 방어기제로 인해 생활이 많이 불편해질 때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심정으로 상담실을 찾는다. 

 

동양사람인 나하고 상담할 때, 파케하(유럽계 백인)가 눈에 띄게 사용하는 방어기제는 이상화(idealization)와 투사(pro jection)이다. 나를 무술이나 불교사상에 조예가 높은 사람으로 보거나 영어도 제대로 못 한다고 무시하기도 한다. 과거에는 피상담자가 쓰는 방어기제에 따라 기분이 변했는데, 지금은 방어기제를 통해 그들이 무엇을 보호하려는지 빠르게 알아챈다. 그러다 보니, 그들과 앉아 있는 게 불편하지는 않다. 하지만, 동료들하고의 관계는 다르다. 불편한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내가 일하는 곳에는 팀장과 슈퍼바이져를 포함해 열일곱 명의 상담원이 있다. 이들도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따스하고 착한 얼굴 뒤에 숨겨 놓았던 방어기제를 쓴다. 그중의 하나가 전치(displacement)인데, 이는 비교적 안전한 대상에게 자신의 심리적 불안을 해소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팀장이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 몰라도 아침부터 별문제도 아닌데 침소봉대해서 팀원에게 화를 내는 경우가 전치일 가능성이 높다. 이럴 때는 조직에서의 역할을 인격의 우월로 착각하여 팀원을 무시하고 모욕을 준다. 

 

전치라는 방어기제를 보게 되면, 과거에는 욱하는 성격에 같이 큰소리치고 싸웠다. 지금은 상처를 주고받지 않으려고 내 생각과 감정을 잘 추슬러서 표현하려 노력한다. 때로는 즉각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응수한다. 내가 영어 때문에 충돌을 무서워 피하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건강한 심리 방어기제인 유머도 섞으면서 얘기한다.

 

“너는 한국에 있었으면 팀워크를 못 맞춘다고 진작에 쫓겨났어. 여기 사니까 다행이야”라고 친구들은 말하며 부러워한다. 그들의 말을 귓가로 흘려들으며, ‘상담센터니까 할 말은 해야지’라고 나의 행동을 정당화 또는 합리화한다. 

 

시간이 지나도 기분이 가라앉지 않으면 공상을 한다. ‘로또에 당첨되기만 하면’이란 전제 속에, 사표를 팀장에게 집어 던지는 모습을 그린다. 이렇게 공상의 날개를 펼치면 현실의 아픔이 적어지면서 마음이 평안해진다. 이러한 이유로 로또를 주기적으로 산다. 

 

지난밤에 꿈자리가 좋았거나, 보이는 숫자가 온종일 11과 3일 경우에는 로또 몇 장을 더 사야 하나라고 고민도 한다. 로또신이 나에게 사인을 보내는 거라고 해석하면서 공상과 망상 사이에서 줄다리기도 한다. 아직도 로또를 일주일에 한 번씩 한 장 정도 사는 것을 보아 내가 사용하는 공상이라는 방어기제가 망상증으로 발전하지 않았다고 확신한다. 망상증은 일종의 비정상적인 사고방식으로 망상을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확신하는 정신병 증상이다. 

 

로고테라피(Logotherapy)의 창시자인 빅터 프랭클은 공상이 사람에게 앞으로 살아갈 힘을 더해 준다고 했다. 그는 2차 세계 대전 기간에 강제 수용소에서 희망을 품고 미래에 대해  상상을 했던 사람들이 그 지옥같은 생활을 꿋꿋이 견뎌냈다고 주장한다.   

 

어떻게 보면 공상은 심리 방어기제로서 마음속의 고통을 줄여준다. 하지만 그 효과는 순간적일 뿐 오래가지 않는다. 로또를 통해 팀장에게 받는 스트레스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영구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아마도 장기적인 방법은 빅터 프랭클이 주장한 대로 의미 없이 세상을 사는 게 아니라 미래의 목표를 발견하면서 인간 존재의 의미를 찾아 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한 과정에서 본인의 불편이나 상처를 팀원들에게 무의식적으로 옮기는 팀장을 연민의 눈으로 쳐다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과거에는 로또에 당첨되면 유람선을 타고 세계 여행을 한다고 했다. 지금은 로또를 맞아도, 의미 있게 살기 위해 많은 사람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교류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 사는 게 힘들어도 너무 혼자만의 공상의 세계로 빠져들지 말자고 다짐을 한다.

 

 *새움터는 정신 건강의 건전한 이해를 위한 홍보와 교육을 하는 단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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