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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개 1,359 김 준
그 날도 요즘처럼 바람이 심하게 불던 날이었습니다. 

어느 누군가를 처음으로 방문하기엔 적합한 날씨도 적합한 시간도 아니었지만 직업 자체가 워낙에 일반적인 시간 프레임과는 맞지 않다보니 별다른 어색함이 없이 처음 들어서는 현관의 대문을 두드렸습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어린 학생과 그 부모님들을 만나는 일이 일년에 수십 번이 넘다 보니 그에 대한 두려움이나 어색함이 거의 없는 것이 오히려 어색하다는 생각에 슬며시 웃음이 났습니다.

약간의 경계심을 품은듯한 눈빛의 학생 어머니가 문을 여시고 그 뒤엔 엄마보다 조금 더 키가 큰 늘씬하고 예쁘장한 여학생이 서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 순간이었던 듯 하군요. 시간이 지나 P가 졸업할 때가 되어서 필자에게 남긴 카드를 보면 그 첫머리가‘이마가 예쁜 제자..’로 시작하는데 그런 O의 첫인상을 결정지었던 그 순간이 바로 어머니의 등 뒤에 서서 그 큰 키가 어울리지 않게 빼꼼히 필자를 바라보던 그 처음 만남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같이 공부를 하는 2년여의 시간 동안 필자는 O 의 이마가 너무나 예쁘다는 말을 자주 했고 그래서 카드에 그런 자기 묘사를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수필속의 한 장면 같은 첫만남의 순간 뒤엔 제겐 상당히 부담되는 미션이 하나 숨어 있었습니다. 

바로 O가 iB 과목으로 선택 한 물리 Higher Level을 Standard level로 낮추는 일이었습니다. 

대개의 경우 학생의 능력이나 적성을 살펴 standard를 higher로 올리라고 권하는 경우는 있어도 낮추라 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O의 경우는 의욕이 너무 과했는지 y12로 올라가면서 대뜸‘멋있어 보인다’는 이유로 물리 higher level을 선택했다는 겁니다. 

iB과정의 과목을 선정하면서 higher와 standard를 선택하는 일은 매우 전략적인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저는 물리에 대해 특별한 관심이나 대학 전공에 관련된 흥미가 없는 O의 선택을 극구 만류하다가 결국 만나서 이야기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야심한 시간에 낯선 집의 현관에 서 있게 된 겁니다.

현관을 들어서 따뜻한 거실에 앉아 챙겨주신 차를 마시며 차근차근 이야기를 풀어 놓았습니다. 

iB과정은 총점제의 과정이기 때문에 한국의 수능처럼 전체 점수를 잘 받는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물리 higher level은 어려서부터 물리를 공부해 온 친구들도 만점을 받기가 쉽지 않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은 현실인식으로 시작한 필자의 회유는 곧 겁주기 과정을 거쳐 최근 syllabus에 편입된 내용에 대한 간략한 소개로 이어졌습니다. 

현대 물리 파트에 불확정성 원리에 의한 계산부분이 추가되었고 옵션의 상대성 이론이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 일반 상대성 이론까지 확장되었으며 가장 기본적인 내용중의 하나인 전자기장 이론도 한층 보강이 되었다...등등... 이야기를 하며 슬금슬금 살펴보니 O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이 아무래도 며칠 안 남은 과목 조정기간이 끝나기 전 standard로 바꿔야 하겠다 결심하는 듯 보였습니다. 

저의 입장에서야 한국학생들이 한 명이라도 더 희망하는 대학에 진학하도록 돕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에 O의 그런 입장변화를 다행으로 받아들이며 집으로 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날 처음 본 이마가 예쁜 O가 어떤 성격을 가진 여학생인지...

다음날 걸려온 O 어머님의 말씀은 저의 멘탈에 충격을 주기 충분했습니다. 하루밤 동안 생각을 하더니 아침에 말하더랍니다. 

아무래도 higher level을 꼭 해야겠다구요. 처음엔 그냥 여학생이 어렵다는 iB 물리를, 그것도 higher level을 공부하는 것이 멋 있을것 같아서 선택을 했었는데 저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조금 겁이 나기는 하지만 꼭 열심히 공부해서 그 어렵다는 녀석을 정복해야 겠다고 말했다 합니다. 

Higher 라서 만점을 받지 못한다면 다른 과목에서 점수를 올리겠다며 입술 꾹 다물고 결연한 표정으로 이야기 했다 하더군요.

도전정신이 과한 걸까요 아니면 그 나이에 벌써 인생의 장벽을 넘어 설수록 자신의 경험치가 더욱 증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걸까요.. 애초에 딸의 고집을 꺽을 수 없어 연락을 하셨던 어머님은 거의 울상이 된 목소리로 제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시더군요. 제 이야기를 듣고 결심을 더욱 견고히 굳혔으니 말이죠.. 누가 들으면 딱 오해하기 좋은 이야기 입니다만..ㅎㅎ
이렇게 해서 이마 예쁜 O와 저의 인연은 시작이 되었습니다.

원체 성격 자체가 털털해서 주변에 여자 아이들보다는 남자 친구들이 더 많았던 O는 너무도 성실한 학생이었습니다. 다른 여학생들이 외모 때문에 고민하고 이거 저거 찍어 바르는 시간에 타고난 미모를 감사해 하며 아예 신경을 안 쓰고 살아도 된다는 장점도 있었고 10 후반의 가장 예쁠 나이를 더욱 빛나게 하기 위한 다이어트나 운동 또한 거의 끊고 살아도 될 만큼 출중한 체격 조건을 소유하고 있었으니 그것도 하늘이 도우신 최적의 공부환경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공부를 위한 O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공부에 대한 겁이 없고 무엇을 배우든 열린 자세로 경계심없이 받아들인다는 사실 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수업시간 그는 항상 최고로 편한 자세로 앉아있었고 시험 결과인 점수는 다만 숫자일 뿐 내가 진짜로 무언가를 알아간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뭔가 해탈한 듯한 심적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공부를 너무 건성으로 하는것 아니었느냐 하고 질문하실 독자도 계시겠지만 전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한번은 수업을 하던 주말 오후 한참 대화를 하며 내용 설명을 하고 있는데 순간 방이 슬쩍 움직이는 듯 어지럼증이 돌았었습니다. 

살짝 놀라긴 했지만 뭐 그리 큰 일은 아닌 듯 했기에 O에게 아무것도 못 느꼈냐고 물어봤지만 O는 제 얘기를 듣느라 뭔지 못 느꼈다 합니다. 그런가 보다 하고 수업을 계속하고 헤어지려 하는데 O의 어머님이 그러시더군요. 한참 수업하는 중에 지진이 났었다구요. 

너무 큰 지진이어서 깜짝 놀랐는데 정작 저와 O는 조용하길래 별일도 다 있다 싶었다 하시더군요. 집에 돌아와 보니 아이들과 아내는 난리가 났습니다. 집이 부서지는 줄 알았다.. 침대에서 굴러 떨어졌다... 하지만 제게는 그런 기억이 없었습니다. 아주 가까운 장소였는데 말이죠.. 

O와의 수업은 그렇게 강한 흡인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를 하면 그 말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은 아마도 저처럼 교육을 해보신 분들은 잘 아실겁니다. 얼마나 수업이 신나고 재미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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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년말이 되어 마지막 시험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O는 애석하게도 만점인 7점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 동안의 노력과 집중을 익히 알고 있던 필자는 너무도 안타까웠는데 정작 O는 덤덤하더군요. 원하고 지원한 대학에 장학생으로 합격했고 물리를 공부하며 배운 것이 많은데 뭐가 서운할 일이 있느냐는 거죠.

하긴 그렇습니다. 요즘엔 공부는 성적을 위해, 성적은 진학을 위해 그리고 진학은 취직을 위해 존재하는 세상이 되어서 그런지 학생이나 학부모님이나 또한 저 같은 사교육자나 모두 한결같이 기름칠 안 한 돌쩌귀처럼 뻑뻑한 마음으로 살지만 원래 공부의 목적이 자신의 능력과 지식을 배양해 세상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과정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O의 마지막 말은‘어록’에 올려도 모자라지 않은 명언일수도 있겠습니다.

책상 서랍을 뒤적여 보물상자를 열었습니다. 몇 되진 않지만 제 삶의 보람으로 남은 카드며 손 편지들.. 그 중에 하나 O가 준 카드를 열어봅니다.

사인을 남겨 놓을테니 나중에 자기가 성공해서 유명해지면 자신이 10대 후반에 남긴 사인이라고 경매에 올려 돈 좀 만져보랍니다. 자랑도 좀 하구요.

다른 학생들이 그랬으면 실없는 농담으로 여겼을텐데 O가 한말은 왠지 믿음이 갑니다.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날 것만 같습니다. 단지 그의 어마어마한 자신감과 도전정신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 날도 역시 바람이 많이 불던 비 오는 날이었습니다. 늦은 시간에 걸려온 O의 어머님의 전화.

울먹하는 목소리로 말씀하시더군요. O가 지금 방안에서 울고 있다구요. 선생님이 그만 두라 할 때 진작에 Standard로 바꿀걸 물리를 시작한지 1년이 지나니 이젠 너무 어려워져서 공부가 힘들다구요.. 그래서 눈물이 난다고.. 하지만 포기하지는 않을 거라 했답니다. 오늘 밤만 한번 울고 또 다시 해 볼거라며..

그래서 기대해 봅니다.
어느 날 오랜 후 유명인 O의 사인을 팔아 한 몫 챙겨보는 행복한 날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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