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려도 황소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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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려도 황소걸음

0 개 1,415 김준

그 즈음도 요즘처럼 비가 많이 내리는 계절이었다. 오클랜드에 그런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있는것을 처음 알게된 필자는 마치 금방 시골에서 올라온 촌뜨기 마냥 어두운 아파트 건물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학생 집을 찾고 있었다. 한국 같은 동 호수 개념이 아니라서 한참을 헤메다가 결국 전화통화를 하며 찾아 간 집엔 얼굴이 동그랗고 웃음이 참으로 선해 보이는 덩치 큰 남학생 하나가 문간에 서 있었다. 그리 추운 날씨는 아니었지만 비바람에 밖을 헤메느라 오들거렸던 때문인지 집안에 들어섰을 때 몸을 감싸던 온기에 나도 몰래 가늘고 긴 숨이 흘러 나왔다. 그리고 그 따듯한 분위기가 학생과의 상담시간에도 이어져 대화하는 내내 부드럽고 온화한 분위기 였으면 참으로 아름다웠겠으나…

 

J가 말했다.

“Extended Essay를 쓰고 있습니다.” 

뭔가 불길함이 뒤통수를 타고 올랐다.  

“응, 그렇구나 어떤…. 과목으로?”

“네. 화학 입니다.”

예의 그 온화하고 다정한 미소를 얼굴에 지으며 J가 명랑하게 말했다. 

역시나.. 하긴 화학선생을 모셔놓고 다른 과목을 이야기할 턱이 없지 않은가..

“주제는 잘 정했니? 지금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니?”

속으로 간절히 원했다. 제발 학교선생님이 결정해 준 걸로 진행해 왔길..

“네, 제가 인터넷 서치 하다보니 재미 있을 것 같은 주제가 있길래 그걸로 결정해서 confirm을 받았고 이제 일정상 주제를 바꿀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필자에게는 아주 심각한 이야기를 평온하고 침착한 어조로 얼굴에 미소까지 살짝 띄우며 이야기하는 J가 순간 얄미워 보이기 시작했다. 

“화학으로 EE를 쓴다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

“아뇨. 몰랐습니다. 그런데 실험을 디자인하려니 이제 알 것 같습니다. 도와주십쇼”

그리고 웃음.

“……”

 

J는 IB 1년차 공부의 마지막 부분을 달리고 있는 한 사립학교 학생이었는데 처음 만날 당시 EE 때문에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학교에 따라 약간의 시기적 차이는 있지만 IB과정의 커리큘럼중엔 Extended Essay 라고 하는 학생들의 지적 능력을 한계까지 밀어 부치는 과제가 있는데 흔히 현지인들은 영어나 경제, 역사 등의 과목에서 주제를 잡는데 반해 상대적으로 영어가 약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권 학생들은 수학, 물리, 화학 등의 과목에서 주제를 찾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필자의 경험상 과학과목에서 EE를 쓸 토픽을 찾는다면 가능하면 화학은 피하는 것이 좋았다. 왜냐하면 그 학생이 다니고 있는 학교가 학생들이 충분한 시간 동안 실험을 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해 주질 않았었고 중간 중간의 과정 체크도 많이 허술 했으며 무엇보다도 화학 실험을 통해 의미있는 결과를 도출하고 결론을 맺는 것이 학생들에겐 다른 과목에 비해 많이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물리, 화학 과목에서 EE를 쓰고자 하는 학생들에겐 항상 이렇게 주지한다. 처음 주제를 정할 때 이미 그 결과와 결론을 예상하고 있어야 한다. 실험을 하고 나서 그 결과를 보고 분석과 결론을 쓰겠다고 맘 먹으면 실패할 확률이 105% 조금 넘는다… 라고. 

 

그런데 J는 필자를 만나기 이전 굉장히 독특하고 누구도 건드려보지 않았음직한 주제를 이미 정해 제출을 한 상태였고 그 뒷감당을 못해 쩔쩔매는 중이었다. 

 

우리는 이 후 말 그대로 최선을 다해 사태를 수습해 나갔다. 이건 말이 EE지 그 평가 기준에 맞추어 필요사항들을 누락하지 않고 메꿔 넣는 작업에 불과했지만 필요한 실험 장비를 직접 만드는것 부터 시작해서 해야 할 일은 산더미 같았다. 거기에다 원서를 쓸 날은 하루하루 다가오니 공부 또한 여유롭게 설렁설렁할 수는 없지 않은가.. J의 얼굴이 한 주 한 주 더 동그래져 갔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살이 찌는 체질이라나…

 

하지만 이런 과정이 아주 헛고생만은 아니었나 보다. 공부를 하며 또 한편으론 EE를 진행해 가며 가만히 J가 공부하는 방식을 살펴보니 이 학생은 자신의 페이스관리를 아주 잘하는 학생이란 것을 알게 됐다. 하루 하루 자신이 공부할 수 있는 양을 정해 놓은 듯 싶었고 심지어 숙제를 하다가도 제가 할 만한 양을 넘어섰다 싶으면 과감하게 손을 놓아버리기도 했다. 그런 자세가 들쭉날쭉 이었으며 당장에 혼구멍을 냈겠지만 J의 경우는 그런 습관이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던 듯 항상 일정한 수준을 유지했고 오히려 필자가 그에게 맞추어 나가며 Pace making을 할 수 있는 기준이 되었다. 시험기간이라고 밤을 지새는 적도 없었고 그렇다고 시험이 끝났으니 하루는 무조건 쉬어야 한다는 예외도 없었다. 꾸준히 그리고 천천히 우직하게 공부해 나가는 모습을 묘사해보려 필자는 ‘느려도 황소걸음’ 이라는 말을 떠 올렸는데 사실 달리 표현할 말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느날 인가 시험을 마친 당일, 오늘은 날씨도 그렇고 하루쯤 쉬었으면 좋겠다 해서 J에게 전화를 했다. 오늘을 하루 쉬는게 어떻겠냐.. 물어보기 위해서.

 

전화기 너머로 밝고 명랑한 웃음기 띈 목소리로 J가 말했다. 

“오늘 그래도 공부해야죠”

그런데 그 이야기가 내게는 이렇게 들렸다. 

“안됩니다. 선생님. 오늘 오셔야 합니다. 선생님이 그러셨잖아요. 제가 Pace 관리하면서 공부하는 모습이 아주 좋고 분명 성공할 거라구요. 선생님도 황소걸음 걸어서 성공하셔야죠”

 

지금 쯤 J는 홍콩에서 뭘 하고 있을까… 아직도 황소걸음을 걷고 있는지 꼭 한번 만나 확인해 보고 싶은 친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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