벙어리 장갑

연재칼럼 지난칼럼
오소영
정동희
한일수
김준
오클랜드 문학회
박명윤
수선재
이현숙
박기태
성태용
명사칼럼
멜리사 리
수필기행
조기조
김지향
송하연
김성국
채수연
템플스테이
이주연
Richard Matson
Mira Kim
EduExperts
김도형
Timothy Cho
김수동
최성길
크리스티나 리
박종배
새움터
동진
이동온
피터 황
이현숙
변상호경관
마리리
마이클 킴
조병철
정윤성
김영나
여실지
Jessica Phuang
정상화
휴람
송영림
월드비전
독자기고
이신

벙어리 장갑

0 개 1,694 박지원

너는 장갑이 싫다고 했다. 장갑이 왜 싫으냐, 물었더니 장갑은 다섯손가락 모두를 만들어야 해서 어렵다고 했다. 그렇다면 장갑이 싫은 것이 아니라 장갑을 만들기가 어려운 것 아니냐고 물었더니 뭔 사람이 그리 복잡하냐며 싫다한다. 너는 이상하다, 고 내가 말했다.

 

나는 정말 장갑이 싫었다. 열이 많은 사람인지라 장갑을 끼면 늘 손에서 땀이 나곤 했다. 가죽장갑을 꼈다가 벗으면 손에서 가죽냄새가 났고, 털장갑을 꼈다 벗으면 손에 털이 묻어나왔다. 그게 싫었다. 예전에 담배를 피우던 시절에는 손에 밴 가죽냄새와 니코틴 섞인 냄새가 좋았는데, 이제는 가죽냄새 뿐이니 별 재미가 없었다.

 

벙어리장갑은 손가락이 말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벙어리이다. 움직일 수는 있으나 원하는 바의 제스처를 명확히 취할 수 없다. 그래서 말이 없다. 그래서 벙어리이다. 얼마나 잔인하게 표현된 장갑인가.

 

그 잔인하게 표현된 벙어리장갑을 선물 받았을 때, 때는 아직 여름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초가을이었다. 너무 이른듯 했지만 넣어두었다가 올 겨울에 사용하기로 했다. 벙어리는 말없이 나를 보았고, 나는 고마워서 너를 꼭 안아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겨울이 오기 전에 헤어졌다. 헤어짐의 이유라는 것을 돌이켜 생각하면 헤어지려고 헤어진 것 뿐이라는 생각이다. 그 뿐이다. 

 

오늘 나는 서랍의 구석에서 말없이 웅크리고 있는 파란색 벙어리장갑을 발견했다. 파란 적요 속에서 조용히 구석에 마치- 나는 장갑이 아닙니다, 하는 것처럼 앉아있었다. 서툰 뜨개 솜씨 탓에 한쪽은 엄지가 지나치게 컸고, 한쪽은 엄지는 맞는데 나머지 손가락 네 개가 꽤 힘겹게 들어갔다. 선물을 받을 때에는 몰랐는데, 지금 껴보니 그러했다. 우리의 기억은 여기저기가 너무 컸고 너무 작았다. 까실까실한 싸구려 털실의 벙어리가 어설픈 침묵 속에 내 두 손을 감싸잡고 있었다. 

 

벙어리장갑을 낀 손을 움직여보았다. 움직일 때마다, 이곳저곳이 헐렁해지거나, 금방이라도 튿어질 것처럼 꽉 당겨졌다. 복잡한 모양이었다. 복잡한 것을 싫어했던 네가 복잡한 것을 만들어 내게 주었었다. 복잡한 것을 싫어했지만 복잡했던 나는, 단순한 벙어리장갑을 받아들었었다. 그리고 이제는, 단순하리만큼 추운 겨울 날씨 속 서랍 앞에 나는 서 있었다. 반쯤 열려진 서랍에 금방이라도 눈이 쌓일 것처럼 눈 밑이 서늘해져왔다. 

 

싫어하면 만들지를 말든가. 

 

속 없이 속 좁은 말을 내뱉으며 장갑을 벗으려 했으나, 이내 팽팽했던 부분이 툭하고 열려져 새끼손가락과 약지가 옆으로 톡하고 삐져나와버렸다. 내 마음같던 벙어리장갑에 구멍이 나서, 말하는 손가락들이 우수수 머릿속으로 쏟아지는 기분이었다. 손가락들이 관절을 여닫으며 내 온몸의 신경을 눈처럼 건드려댔다. 기억이 한없이 깊은 곳으로 끌려들어갔다. 나는 무엇인가 소리를 내려다, 내가 끼고 있는 파란색 장갑을 보았다. 그리고 난, 장갑처럼 벙어리가 되었다. 장갑을 낀 손처럼, 감정이 일시에 단순해져오는 경험이었다. 

 

쓸데없이, 나는 미안하고 미안해졌다. 그저 장갑일 뿐인데.

 

나는 장갑을 벗어 서랍 속 구석에 다시 넣어두었다. 

오이

댓글 0 | 조회 1,701 | 2012.11.28
그는 지금 웰링턴에서 가장 바쁘다는, 조그만 식당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12평 남짓한 그 식당엔, 17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모두 일본, 뉴질랜드, 아르헨티나,… 더보기

현재 벙어리 장갑

댓글 0 | 조회 1,695 | 2016.05.26
너는 장갑이 싫다고 했다. 장갑이 왜 싫으냐, 물었더니 장갑은 다섯손가락 모두를 만들어야 해서 어렵다고 했다. 그렇다면 장갑이 싫은 것이 아니라 장갑을 만들기가 … 더보기

너의 스위치였다

댓글 0 | 조회 1,656 | 2013.08.14
딸깍. 열리는 암실의 문. 외면하고 싶은 현실은 때때로 순간을 아름답게 포착해내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아름다운 포착은 시간을 초월한 채 머리 한 켠에 걸어지는 … 더보기

반뼘

댓글 0 | 조회 1,615 | 2014.12.09
새벽 6시 30분에 일을 시작했다. 오후 2시쯤 퇴근해서 밥을 먹고 멍 때리다가 친구가 의뢰한 영화음악 작업을 했다. 작업을 했다가 밥을 먹었다가 작업을 했다가 … 더보기

침몰

댓글 0 | 조회 1,607 | 2014.11.12
“도” 음정이 맞지 않는 “도”가 또 한 번 울렸다. 청색 지붕, 처마 밑에 자리한 일곱 개의 검은색 확성기가 하늘 아래 햇살을 반사시키며 나란히 설치되어 있었다… 더보기

江(Ⅰ)

댓글 0 | 조회 1,581 | 2015.01.29
등산이 인생이다, 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때때로 나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혐오하는 습성이 있는데, 그래서인지 등산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산을 못 … 더보기

오늘

댓글 0 | 조회 1,575 | 2014.06.11
뜻하지 않은 일로 계획이 틀어져버렸다. 뭐랄까, 먹는 것보다 싸는 게 더 힘든 느낌이 든다. 오늘. 예정대로라면, 나는 발매계약을 했어야 했지만, 뮤직비디오 편집… 더보기

풋내기의 솔직한 노래

댓글 0 | 조회 1,562 | 2013.07.09
예전부터 “왜 그렇게 사람이 빡빡해요?”라는 말을 종종 들어왔다. 팍팍하다는 말은 다양한 의미의 관용구로 해석될 수 있으나, 나의 경우에는 … 더보기

자기소개서

댓글 0 | 조회 1,556 | 2013.06.11
본의 아니게 대학원에 입학하려는 사람의 자기소개서를 도와주게 되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대학원이 뭐하는 곳이었는지 헷갈릴 정도로 충격적인 초고를 이메일로 … 더보기

복종과 공격

댓글 0 | 조회 1,514 | 2012.12.24
1998년 6월,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은 빌 클린턴 앞에서 진정한 하의실종을 보여줬다. 당시 르윈스키와의 스캔들을 노골적으로 풍자했었던, 이 가학적이면서도 키치… 더보기

배탈

댓글 0 | 조회 1,504 | 2013.02.13
몇 년만에 아픈 건지 모르겠다. 이렇게 심하게 아픈 것은 군대 이후로 처음인 것 같은데, 지금이 조금 더 심한 것 같다. 3일 째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계속해서… 더보기

어디에나 있는, 어디에도 없는

댓글 0 | 조회 1,496 | 2013.01.31
1.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찍은 단편영화: 늦어도 2월까지는 편집 완료! 2. 랭귀지 스쿨에서 한국말 가르치기: 교재 제작! 3. 정착: 워크비자 준비할 것! 4. … 더보기

질의응답의 시간

댓글 0 | 조회 1,479 | 2012.10.24
CV만 40장째였다. 차가운 웰링턴의 바람만큼이나 핸드폰 수화부에도 스산한 침묵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침묵이 내 머릿속을 파고들어 포화상태를 이룰 때쯤,… 더보기

지느러미

댓글 0 | 조회 1,458 | 2013.10.22
1. 나는 몇몇 여자들에게 미안함을 안고 살아가야한다. 허세, 조작, 이기가 엉켜서 나 스스로도 통제 못하던 때가 있었다. 나를 연출하는 것은 나의 처세가 되었었… 더보기

음악시간

댓글 0 | 조회 1,456 | 2013.04.24
다음 주까지 각자 음악적인 재주 하나를 가져오면 되는거야. 중학교 시절, 미치광이로 유명했던 음악 선생이 말했다.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어렵다며 불평불만, 투덜투… 더보기

종교

댓글 0 | 조회 1,448 | 2014.07.22
내가 기억하는 한으로, 처음 내가 접했던 종교는 불교였다. 10살 무렵 부모님의 손을 잡고 갔었던 산 속의 어느 조그만 절. 그 절은 정말 깊은 산 구석에 있었는… 더보기

소리

댓글 0 | 조회 1,442 | 2013.03.26
바람결에 흔들리는 투우사의 망토와도 같은, 서걱거리는 심장이 있었다. 영혼의 텍스트들이 두터운 긴장감으로 다다다다닥 머릿속을 훑어내고, 가느다란 담배연기가 시간 … 더보기

江(Ⅲ)

댓글 0 | 조회 1,440 | 2015.02.25
노로 어떻게든 뭍을 박차고 배의 방향을 겨우겨우 돌려, 우리는 다리를 저는 아저씨와 아일랜드 커플에게로 돌아갔다. 그들은 정말 걱정되는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았고… 더보기

생산자와 소비자의 시의성에 대하여

댓글 0 | 조회 1,421 | 2013.05.28
기차에서 피가 났다, 레일에서 피가 굉음을 내며 흐른다. 줄줄줄줄줄줄줄줄 흐른다 Medina의 You and I를 듣는다. I feel like. I’… 더보기

허세

댓글 0 | 조회 1,408 | 2013.05.14
내가 다녔던 대학교에는 커다란 잔디밭이 있었다. 오월의 광장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는데, 광장이 가져다주는 어떤 암울한 느낌을 5월이라는 봄 냄새 가득한 단어로서 상… 더보기

Boy A

댓글 0 | 조회 1,403 | 2013.08.28
초록빛 눈이 오는 날이다. 회개하기 위하여 떠나기가 쉽지가 않아 흔들흔들거린다. 너를 떠날 수 있는 날, 그리하여 다시 너를 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소년은 늘 … 더보기

작업기(Ⅳ) 기다림의 결과

댓글 0 | 조회 1,399 | 2015.03.25
기다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과정을 모르고 기다리는 기다림이 그러하다. 마치 누군가가 미래의 로또번호를 가르쳐주긴 했는데 몇 회 차인지 가르쳐주지 않… 더보기

크라이스트처치 기행 메모

댓글 0 | 조회 1,394 | 2013.01.15
1. 백패커. 나는 1층에 있었고 호주에서 왔다는 한국인은 2층에 있었다. 그는 침대 위에서 무언가를 먹고 있었고, 머리 위에 있는 할로겐 조명을 켠 채 노트북으… 더보기

찌꺼기 혹은 빛나는

댓글 0 | 조회 1,362 | 2012.11.14
그는 J로부터 한 통의 문자를 받는다. 한국에서 다니던 영화 관련 직장을 때려 치우고 외국으로 가야겠다는 것이다. 뒤이어 그는 한 통의 문자를 받는다. 워크비자 … 더보기

얼굴

댓글 0 | 조회 1,362 | 2013.04.10
영화 <접속>, <공감>, <8월의 크리스마스> 등등. 수많은 애틋한 만남들과 우연을 가장한 필연과 미필적 대본 속 우연들이 교집…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