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강을 뒤엎는 술, 복분자(Black Raspber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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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강을 뒤엎는 술, 복분자(Black Raspber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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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약 30년 전의 서울시 시민들의 이야기가 리얼하다. ‘연탄불, 성문종합영어, 골목길, 카스텔라’. 응답 받고 싶은 1988년도, 나의 대학시절이기도 한 그 시절 시대적 아픔과 청춘들이 겪었던 성장 통을 TV드라마를 통해 진솔하게 보여준다. 그 시절의 낭만과 첫사랑의 아련한 추억을 불러 일으키며 빛 바랜 컬러사진을 보는 듯하다. 

죄송스런 말씀이지만, 우리 조상님들 매사에 간단치가 않았다. 염치가 중했던 지라 ‘측간과 처갓집은 멀리 있어야 한다’고 큰소리를 쳐 놓고는 사르륵사르륵 함박눈이 쌓이던 그 춥고 긴 겨울 밤 몰래 큼지막한 질그릇 하나 숨겨 들어와 밤새‘멀리 둔 측간’을 드나드는 수고를 덜었으니, 요강이란 것이 얼마나 은근하고 천연덕스럽게 인간적인 생활용품이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시골의 장날이면 괴성과 함께 손바닥과 이마로 벽돌을 깨고 입으로 불을 뿜어내며 원숭이나 구렁이 뱀쑈를 보여주면서 약을 파는 차력사들이 있었다. 그들에겐 전설처럼 내려오는 정해진 멘트가 하나 있었으니 ‘애들은 가라. 이 약 먹고 소변볼 때 조심해. 요강이 깨지고 자갈이 튀어’라며 기염을 토한다. 그 소리에 뭐가 그리 재미난 지 주변을 둥그렇게 가득 메운 어른들이 애들은 모르는 그들만의 비밀이 부끄럽기라도 한 듯이 키득키득거린다.

아무튼 나의 고향은 겨울이면 유난히 눈이 많던 고창 선운 산이다. 봄에는 동백과 벚꽃, 여름에는 상사화, 가을에는 오색단풍으로 유명하다. 더욱이 오백 년 묵은 동백꽃은 가수 송창식의 노래에도 등장해서 ‘눈물처럼 후드득 지는 꽃’으로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알싸하게 물들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고창의 특산물은 복분자 술과 선운사 입구 인천 강(풍천 강)에서 잡히는 뱀장어다. 예로부터 고창일대에서는 야생 복분자로 술을 담아 먹었으며 풍천 장어는 뛰어난 영양식품으로 각광을 받아왔다. 이 장어를 안주 삼아 복 분자 술을 마시지 못하면 고창여행은 허사인 셈이다. 대학시절 동아리 선후배가 어울려 계곡의 오솔길을 오르면 도솔암과 낙조대에 닿았다. 낙조대에서 마주하는 서해의 일몰을 뒤로 하고 산밑에서 꼼꼼하게 싸온 장어를 펼쳐놓고 복분자 술을 마셨다. 복분자 술을 마시고 있노라면 소박한 선 분홍 빛깔에 눈이 먼저 취하고 장미 꽃 같은 부드러운 향기에 코가 취했다. 그리곤 결국엔 혀끝부터 마비시키는 부드러운 술 맛에 입이 정신을 잃고 만다. 그리고 나서 푸짐하게 덤까지 준 장어 집 아줌마의 인심에 마음까지 취해서는 붉은 단풍에 묻혀 벌겋게 달아오른 술기운으로 마냥 행복해 했다.

나무딸기의 일종인 복분자(覆盆子)의 유래에 대해서는 명나라 때 한의서인 본초강목(本草綱目)에 두 가지의 설이 있다. 첫째는 열매의 생김새가 물동이(盆)를 엎어놓은 것 같은 데서 생겼다는 설이다. 둘째는 복분자 술 애호가들이 좋아하는 이야기로 복분자를 먹고 소변을 누면 요강이 엎어질 정도로 원기가 강해진다는 것이다. 아무튼 복분자는 혈액 순환을 돕고 강장제로 알려져 있다. 장미과의 복분자 딸기는 달고 신맛이 나며 성질은 따뜻하다. 주로 간(肝)과 신장을 보호해 주고 눈을 맑게 하는 효능이 있다. 또한 태양의 에너지를 가득 담은 안소시아닌계의 붉은 색소는 노화방지와 암 예방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반적으로 과실주라고 하면 각종 과실에 소주를 부어 숙성시킨 것으로 인식돼 왔다. 하지만 복분자 주는 90% 이상이 유기농법으로 재배한 열매를 그대로 발효시킨 발효와인이다. 나는 한 여름 밤에 복분자 주로 만든 온더락(On the Rock)을 좋아한다. 방법은 무척 간단하다. 술잔에 복분자 주를 따르고 한 두 개의 얼음을 넣은 후 마치 칵테일처럼 마시는 것이다. 얼음을 가라앉힌 온더락은 술 맛을 시원하게 하고 얼음이 녹을수록 선 분홍 빛깔과 맛이 더욱 순해진다.  

오락실에서 갤러그 오락을 하다가 손가락에 쥐가 나고 자다가 연탄가스를 마시고 김칫국을 한 사발 들이키던 대목에서 새벽에 몽롱해진 내 몸을 일으키시던 아버지의 두툼한 손아귀가 떠올라 뭉클했다. 30년 전 과거로 날아가서 추억의 파편들을 들춰내며 오래된 사진첩을 넘겨가는 것 같은 드라마 한편을 보면서 우리는 웃고 운다. ‘바보 같은 세상에 바보가 아닌 것이 바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의 각박한 세상에 살면서 돈은 없었지만 남을 배려해 주고 서로를 위로해 주는 방법을 알았던 그 시대가 그리운 게다. 

‘아이고 김사장, 반갑구먼 반가워요.’ 복분자에 장어를 구워먹던 그 시절 옛 친구가 연락 온 것처럼 정말 반갑고 설레는 밤이다. 한 여름 밤 무더운 하루를 보내고 한가하게 마시는 온더락 한잔이면 정말 세상 남부러울 게 없다. 다만 꼬들꼬들하게 숯불에 구워낸 풍천 장어가 없는 것이 한(恨)이로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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