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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한 no! no!.--그리고 sorry!

0 개 2,560 오소영
지금 내 처지에 ‘공’까지 잘 맞기를 바란다면 그건 분명히 지나친 과욕이다. ‘십팔 홀’을 거뜬히 걷기만 해도 그것으로 만족. 감사하면서 기분이 좋아진다. ‘골프장’에서 따끈한 물로 샤워까지 마치고 집으로 돌아 올 때는 종일의 피로가 싹 가셔버려 몸이 더욱 가볍다. 차창을 통해 들어오는 석양에 빗긴 노을빛이 아름답다. 목에 감기는 엷은 햇살이 상큼한 어깨에 아이의 손길처럼 부드럽다. 뱃속도 가벼워져 얼른 집에 가서 맛있게 저녁만 먹으면 오늘 일과는 끄읕...

날아가는 기분으로 집에 도착했는데. 이게 웬 일?... 내 파킹 자리에 다른 차가 서 있는게 아닌가. 가끔씩 방문객들의 차가 비어있는 자리에 대어 있다가 가곤 하기에 그러려니 하면서 임시로 아무데나 세워놓고 집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웬지 느낌이 이상했다. 아주 낯설지 않은 차 같아서다. 다시 나가서 확인을 해 보니 그 차는 며칠 전부터 우리 단지안에 머물러 있었던 ‘밴’으로 차 안에는 아직도 정리안된 이삿짐이 그득했다.  

누군가가 새로 이사를 온 모양이다. 그렇다면 그냥 묵과할 수 없는일. 마음이 다급 해 졌다. 옆 집으로 달려가 ‘캔’에게 물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내 뒤를 가리켰다. 바로 얼마 전에 이사왔다고 어제 아침 집 앞에서 만나 반갑다고 인사를 건네오던 그 60대쯤. 남자의 집이었다. 내 정당함을 주장하려는데 망서릴 필요가 없질 않은가, 한달음에 달려가서 문을 두드리고 그 남자를 불러냈다.  

“당신 차를 빼 줘야겠다”라고 얼버무려 의사전달을 분명히 했다. 당연히 그런다라고 ‘키’ 들고 나설줄 알았는데 이건 또 무슨 괴변이신가. 한마디로 그냥 ‘no’란다. 어제 보았던 그 상냥함은 어디로 사라지고 반쯤 벗겨진 대머리에 안경 속에서 마땅찮아하는 표정이 영 눈에 거슬렸다. 문득 어렸을 때 보았던 만화속의 못된 ‘스쿠리지’ 영감이 떠올랐다.

내가 10년 넘어를 한결같이 쓰던 자리라고 조금 높은 소리로 항변을 했지만 그는 듣는둥 마는둥 강력히 ‘no no’만 외쳐대며 밀어내듯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 가 버린다.

어깨에 힘이 쭉 빠졌다. 견딜 수 없는 낭패감에 분통이 터졌다. 여자 혼자. 물론 영어도 잘 안되는 동양 여인이라는걸 알았으니 슬쩍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을 했을 그 사람이 너무나 괘씸했다. 이럴 때. 아무도 대변 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외롭기도 하고 만감이 교차했다. ‘캔’이 도와줄 줄 알았는데 모른척 하는 것도 야속해서 이제 여기를 떠날 때가 되었나 라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그냥 돌아설 수 밖에 없는 자신의 뒷 모습을 누구에게 들킬까봐 조심스러운 발걸음을 옮기는데 방금 얼굴을 내민 달빛이 긴 그림자를 드리운다. 가뜩이나 볼륨없는 내 모습이 그렇게나 가늘게 보이는지 초라하고 처연 해 보였다.   

내가 말할 자격도 없는 것이었을까? 단지 안에 공용으로 되어있으니 먼저 대는 사람이 임자? 하지만 공동생활에 규칙도 있고 질서도 있는법. 지금까진 별 문제없이 잘 지내왔지 않은가. 맨 처음 ‘캔’이 자기 자리를 양보해서 편하게 쓰라고 내 준 거였는데... (차만 빼봐라 내가 당장 갖다 댈테니까) 하지만 차는 내가 더 자주 쓰는 편이니 그것도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한번도 있어본 적 없는 일로 고민을 할 줄이야...

어디서 굴러들어 온 돌이 박힌 돌을 빼려구 해. 혼자 씨근덕거리다가 문득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 사람도 나보고 그런 생각을 했겠지.(너는 먼 나라 동양에서 왔지. 네가 굴러들어 온 돌이잖아)라고.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질서같은 것 무시한다면 나도 해 보자. 나는 달려나가 남의 빈 자리를 찾아 얼른 차를 대놓고 들어왔다. 내 본의가 아니기에 부담 느낄 필요도 없는 것. (이 에는 이. 눈 에는 눈.)이라고 하던가. 게운친 않았지만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 수가 있었다.

아침 일찍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아니나 다를까 내 차를 빼달란다. 아랍계의 젊은 부부의 파킹 자리인걸 모를리 없었다. 긴 말이 왜 필요한가. 당당하게 앞 집을 가리켰다. 현장을 보고 다 알면서 확인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그는 알았다면서 그 집으로 향했다.  

내 가슴이 왜 이리 후련할까? 내가 못했던 말을 그 젊은이가 시원하게 대신 해 줄 생각을 하니 얼마나 통쾌한지....(어디 잘들 싸워봐라...) 한참 지나서 젊은이가 돌아왔다. 양쪽 엄지 손가락을 추켜들며 활짝 웃어주었다.  

그 뒤로 당차게 ‘no’를 외치던 남자가 많이 겸언쩍은 표정으로 이번에는 ‘sorry’로 머리를 주억거리며 따라 나왔다.  

내 판단이 그릇되지 않았음이 우선 반가웠다. (그러면 그렇지.) 이럴때 우리는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말을 쓴다.

잠시 흐트러졌던 무질서가 바로 잡히고 모두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니 다시 편안 해 졌다. 하마터면 영원히 내 자리를 잃을뻔 했다. 그건 곧 내 자존심을 지켜낸 것이라고 생각하니 너무나 다행스럽다.     

하루저녁 거친 바람이 물러가니 다시 잔잔한 이웃과 이웃으로 서로를 이해하면서 평화스럽게 살아간다. 치사하지만 부당함을 저질러서라도 정당함을 인정 받았으니 이젠 아무도 나를 함부로 보지 못 할 것이다. 남의 땅에 뿌리 박는게 이렇게 어렵구나 다시한번 실감했다. 고약스럽게 ‘스쿠리지’ 같던 남자가 이젠 과한 친절 서비스로 볼 적마다 환하게 웃어준다.  

누구에게나 실수는 있는법. 앙징한 키에 웃을 때 보이는 하얀 치아가 유난히 눈에 띠는. 소년같이 귀여운 아저씨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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