江(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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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Ⅷ)

0 개 1,821 박지원
일어났다. 4일 째. 아침. 강 위에서의 마지막 숙박지로 이동을 시작했다. 이제는 중류에서 하류로 접어들고 있었다. 배를 타고 오는 동안, 강의 흐름은 조금씩 조금씩 느려졌고, 선장님의, 급류발견! 소리도 줄어들었다. 급류가 줄어든 항해. 여전히 이어지는 끝없는 중력과 부력 그리고 배와 강, 노의 마찰. 우리는 이상하게도, 처음 강에 노를 딛을 때는 그렇게나 두려워했었던 급류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이것은 달콤쌉싸름한 기분이었다. 

아주 약간의 빠른 유속이 나타나면 노를 저으며 달려가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뭍 근처의 얇은 물결에서 흘러나오는 자갈 부딪히는 소리일 뿐이었다. 가까운 듯 먼 듯한, 자극에 대한 그리움. 강과 우리의 항해가, 어느덧 만추에 다가듦을 알리는 낙엽처럼, 둥그런 자갈들이 수면 아래 비치었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속도감에 대한 향수에 실망하며 배를 돌리는 우리의 모습을, 야생염소들이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걸음마를 하다가 넘어지는 아이는 중력과 근육을 배우며 세상 모서리에 자꾸만 무릎을 찧는다. 세계의 호흡이 자신의 걸음보다 크다는 것을 깨달아가며 아이는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자꾸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붙잡으며 일어나려 한다. 자신의 손아귀에 무엇인가 잡혀질 때, 아이는 그것에 의지하며 작은 몸을 가누려 한다. 무언가를 붙들고, 마침내 자신의 곧은 무릎을 내려다볼 때, 아이는 자신의 손 안에 있는 것이 의지해야할 대상이자 자신이 지켜야 할 대상임을 동시에 깨닫는다. “소중함”이라는 것을 배워가는 첫 번째 기록인 것이다. 그리고 그 기록은, 인생이라는 조그만 바늘이 검고 거대한 레코드 홈을 천천히 돌아나갈 때 - 이제는 무릎의 아픔이 아닌, 그저 “아픔”이 자신의 텅 빈 마음 끝에 부딪힐 때- 계속해서 이어지는 미래의 기억이 된다. 

그 날 강물 아래에서 구명조끼의 버클과,  노란 Explorer 31호를, 노를, 그리고 N의 손을 잡았을 때- 세상에는 소중한 것이 그리 많지는 않음을 깨달았다. 세 번을 그렇게 물 속에서 버둥거린 끝에야, 조금은 위험했던 순간들을 지난 뒤에야, 몇 가지를 분실하고 나서야, 나는 안심할 수 있었다. 거친 물살 너머 강 저편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져버렸다. 그저 조그만 손에 잡히는 소중한 것 하나하나가 안식이 되어 배 위에 가득히 고여감을 조금씩 깨달아갔던 상류의 시간. 그리고 그 침식의 틈에서, 때때로 빨라지는 유속 위를 질주하는 우리를 발견했을 때의 소소한 기쁨. 

그것은 우리를 감싸고 있는 공기와 색채와 소리에 비하면, 실로 소소한 기쁨일 뿐이었다. It’s alright. 강은 늘 그렇게 얘기하고 있었다. 소소한 기쁨 뒤에 찾아오는 고요한 완성과 허탈한 평화로움은 우리를 달래듯 어루만져주었다. 하낫둘하낫둘, 강의 흐름에 맞추어 노를 저었던 것도 과거가 되어 머릿속에는 그 때의 둥실, 만이 잔해처럼 남았다. 물론 첨벙, 하는 침몰의 기억도 함께.

중류에 다다르고, 소년과 소녀는 어른이라도 된 듯 능숙하게 속도를 이겨내며 앞으로 나간다. 작고 큰 강들이 만나며 물살을 이룬다. 하얀 거품들이, 마치 물 위를 우르르 달려오는 조그만 사람들처럼 보인다. 조그만 사람들을 노로 가만가만 만져가며, 계속해서 앞으로 전진한다. 배의 양 옆으로 병치된 지구의 도저한 모습에 매료되어, 잠깐 가던 길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본다. 옆을 보고, 뒤를 돌아본다. 앞이든, 옆이든, 뒤든, 가끔 한자리에 머물러 있는 느낌을 받을 때면, 다시 노를 저어 목적지를 향해 나아간다. 처음 겪는 역류, 처음 보는 풍경, 처음 듣는 새의 지저귐, 처음 느끼는, 물 위에 떠 있는 아담한 공간의 풍요로움. 시작을 짐작조차 못할 복잡한 뿌리로 가득차 있을 나지막한 언덕배기에, 자신의 몸을 반쯤 강 아래로 드리운 나무들. 눈으로는 셀 수 없을 수많은 호흡으로 잔잔하게 서 있는 산의 아침. 소년과 소녀는 그 사이에서 중류를 빠져나간다. 유속이 빨라짐을 찾아 노를 저으며, 난항에 도전하는 풋내기 사공 둘의 노질. 이제 배는 뒤집어지진 않는다. 뒤집어질 듯 안 뒤집어질 듯,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배는 중류를 통과해낸다. 물살이 약해짐을 느끼고, 모든 풍경이 익숙해질 때쯤, 하류에 다다른다.

하류의 삶은 느리다. 모든 것이 느리기 그지 없다. 배를 찢을 듯이 날카롭고 예리했던 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크고 작은 몽돌들로 변해있었다. 그저 노를 저으면 되는 삶. 해가 지고 뜸에 따라 종착지가 가까이 다가오는 삶. 중류와 상류 위에서의, 빼곡하고 두서없는 스케쥴 같았던 급류가 그리워지는 삶. 침몰한 배를 뭍에 대고 빗속에서 오들오들 떨며 초코바를 먹을 때 망연하게 강을 바라보았던 눈빛조차, 애틋한 순간으로 남는 삶. 심지어는, 등산이 인생이다, 라고 비유하던 어른들의 말이 조금씩 이해가 되는 삶. 강 위에- N과 나의 소리를 새겼던 기억의 반추를 오물오물 삼키듯 노를 젓는 삶. 강의 “마지막” 이라는 것이 실감이 날 정도의, 저속재생. 하류에서의 삶. 

걸음마를 하던 아이는 그렇게 결국 마지막 숙박지에 도착했다. 내일이면 우리는 이 길고 긴 강과 좁은 텐트를 벗어나, 오하쿠니의 따뜻한 호텔 위 침대에서 잠이 들 것이었다. 쉬지말고 가라했던 상류와 중류의 아우성들도, 또한 It’s alright의 속삭임도, 그리고 소리없이 우리를 인도하는 하류의 고되고 아늑한 한숨소리도 이제는 일상이 아닌 특별했던 기억으로 남을 터였다. 물론 핸드폰 두 개를 다시 사야하니까, 통장에는 꽤 큰 아픔이 남을 터였다. 우리는 텐트를 치고, 첫 날 숙박지 이후 늘 그랬듯이- 우선 물부터 나오는지 확인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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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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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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