江(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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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Ⅱ)

0 개 1,731 박지원
배에 배럴들을 묶는 법을 확인한 후, N과 나는 대머리 아저씨의 낡은 버스를 타고 숙소로 이동했다. 버스에서는 강 냄새가 났다. 비린 버스였다. 거리를 달리는 동안 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창 밖에는 거대한 주황색 당근 하나가 초현실주의적으로 그럴싸하게 바닥에 꽂혀있었다. 운전 내내 입을 다물었던 대머리 아저씨가 저 당근이 오하쿠니의 상징 같은 것이라고 했다. 오오. 우리는 감탄했다.

대머리 아저씨가 내려준 숙소에 내렸다. 큰 잔디밭 위에 많은 집들이 있었는데, 부자들의 별장들처럼 보였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집들 중 하나인 우리 숙소의 구조는, 1층은 식당으로, 2층을 숙소로 쓰는 백패커 같은 곳이었다. 곳곳에 달려있는 박제된 순록의 머리가 인상적이었다. 겨울에는 사람이 많은데, 아마 오늘은 너희 둘 밖에 없을 거야. 대머리 아저씨는 그 말과 더불어 5일간 배를 탈 때 먹을 것을 사두라고 하고는 비린 버스를 타고 떠났다. N과 나는 짐을 풀고 배럴 별로 들어갈 것들을 의논하고 그날그날의 메뉴를 간단히 정했다. 이미 많은 즉석식품들을 사왔기에 살 것은 그렇게 많지 않았지만, 오하쿠니 구경도 할 겸 거리로 나섰다.

오하쿠니의 뉴월드는 정말 작은 곳이었다. 두 명의 캐셔들이 조금 우울한 표정으로 바코드처럼 바코드를 찍고 있었다. 오는 사람들도 관광객과 동네 사람 정도인 것 같았는데 지루할 것도 같았다. 그들이 지루하다고 해서 내가 딱히 뭘 해줄 것은 없었고, 그냥 지루하겠구나, 생각을 했다. 지루하면 생각을 많이 비울 수 있다. 생각을 많이 비우면 생각을 풍경으로 채울 수 있다. 남들이 보기에는 조금 멍해보일지 모르겠지만, 정작 본인에게는 지루하고 우울한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

N과 나는 뉴월드 가방을 들고 태양 아래를 걸어서 숙소로 향했다. 지글지글 승천하는 투명한 뱀들이 검은 도로 위를 빼곡히 점령하고 있었다. 더운 날씨였다. 거대한 당근도 햇빛에 익어가듯 꽂꽂이 서 있었다. 당근 주변의 그네와 미끄럼틀 같은 것들로 인해서인지 그것은 팀 버튼 영화처럼 보였다. 심지어 저 편에는 만년설이 쌓여있는 통가리로 국립공원이 또렷하게 잡힐 듯이 보였다. 그러니까, 깔끔하고도 환상적인 시골마을이었다. 드넓은 잔디밭, 우리는 사진을 몇 장 찍은 후, 길을 잃어서 한 시간을 뛰어다니다가 겨우 집을 찾았다. 그래도 우리는 즐거웠다. 당장 내일 우리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른 채.

다음 날 아침 6시, 우리를 왕가누이 강의 상류로 픽업하기 위해 대머리 아저씨의 머리만큼이나 매끈한 승용차가 숙소 앞에 멈춰섰다. 한 시간 정도를 간다기에 멀미약까지 챙겨먹었는데, 비린 버스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조금 흐린 날이었다. 비몽사몽한 상태로 승용차로 어느 창고 옆 공터 같은 곳으로 이동했는데, 배들이 아주 많이 있었다. 우리는 차를 봉고차로 옮겨 타고 뒤에 매달린 트레일러에 두 척의 배를 실었다. 대머리 아저씨 대신 다리를 저는 아저씨가 운전대를 잡았다. 약간 불안했지만 우리는 미리 잠을 자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함께 가는 아일랜드 커플이 우리와 같은 코스라고 운전사가 잘 움직여지지 않는 듯한 입술로 얘기했다. 우리는 뒷자리에 앉은 아일랜드 커플과 인사를 했다. 내가 잠깐 축구선수 로이 킨 이야기를 했더니 좋아했다. 그렇지만 N과 나는 우선 잠이 들기로 했다.

잠에서 일어났을 때, 잔잔해 보이는 녹색 강이 우리 앞에 있었다. 아무도 없는 녹색 강이 있었고, 다리를 저는 아저씨가 구명조끼와 배럴들을 배에 실어주고 약간의 주의사항을 가르쳐주었다. 배는 두 명이 앉을 수 있었고, 노란색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진 낡은 것이었다. 우리 배의 이름은 Explorer 31이었다. 한 명은 앞을 보고 한 명이 뒤에서 방향조정을 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마주보는 것을 상상했었지만, 그것은 아니었다. 아저씨가 노를 저어본 경험이 있냐고 물어보았다. 아일랜드 커플은 바다에서 타보았다고 했고 우리는 한 번도 그러한 경험이 없다고 대답했다.

아저씨가 배를 강 위에 띄어주었다. N과 나를 향해 앞으로 먼저 가보라고 했다. 우리는 당당하게 배 위에 앉았다. 노를 저었다. 배가 뒤로 가기 시작했다. 앞자리에 앉은 N이 세게 저어보자고 했다. 배가 뭍의 나무들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저 멀리 조그만 선착장에서 아일랜드 커플과 아저씨가 우리를 향해 돌아오라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돌아가고 싶었다. 배는 다시 다른 쪽의 뭍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뭍 앞 강 위에 조그맣게 잠긴 나뭇가지에 붙어있던 벌레들이 놀라 우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N과 나는 절규하며 노를 휘둘렀다. 아저씨와 아일랜드 커플이 여전히 돌아오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여전히, 우리도 돌아가고 싶었다.

댓글 0 | 조회 2,061 | 2015.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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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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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 | 조회 1,988 | 2013.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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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 | 조회 1,957 | 2015.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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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 | 조회 1,768 | 2014.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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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에게 갖는 기대가 나를 미치게 한다. 기대는 구름처럼 내 머릿속을 횡횡하고 있었다. 심해 속에 가라앉는 돌덩이처럼 무겁고 무서운 까만 재 같은 것들이 구름…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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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 | 조회 1,732 | 2015.02.11
배에 배럴들을 묶는 법을 확인한 후, N과 나는 대머리 아저씨의 낡은 버스를 타고 숙소로 이동했다. 버스에서는 강 냄새가 났다. 비린 버스였다. 거리를 달리는 동… 더보기

서바이벌

댓글 0 | 조회 1,728 | 2014.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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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댓글 0 | 조회 1,715 | 2013.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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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한 고양이

댓글 0 | 조회 1,709 | 2013.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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