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속의 아버지 그리고 갈대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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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속의 아버지 그리고 갈대와 나

0 개 1,897 오소영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집을 나설 때의 일탈감은 늘 새로워 설레이게 마련이다. 안 가겠다고 버티던 고집은 어디에다 숨겨 버렸을까?..

그 곳을 지날 때는 항상 반겨주는 나만의 친구(?)가 있다. 길게 기찻길을 따라 도열해 있는. 하얀 갈대들의 너울 춤에 반해 그들을 친구 삼은지가 오래 되었다. 짜릿한 낭만속으로 풍덩 빠져들게 하는 그 유혹을 뿌리칠 수 없어 불현듯 변덕을 부리고 나선 길이다.  

사실 지금은 제철도 아니다. 하지만 내 의식속에 자리잡은 추억이라도 더듬고 싶었다.  

출발지에서 먼저 타신 분들이 반겨주는 가운데 버스에 올랐다. 혼자서 넓은 창을 차지해 마음껏 자연을 끌어안을 수 있는 행운의 좌석이 뒤에 남아 있었다. 이렇게 좋은 자리가 나를 기다려 줄줄은 정말 몰랐다.

단체여행이란 언제나 시끌벅적 소란스럽기 마련이다. 늘 보던 만남이지만 오늘은 좀 색다른 기분으로 톤이 다소 높은 잡담들로 떠들석했다. 어느 남자 어르신께서 조용히 좀 하라고 한 말씀 하시어 분위기를 갈아앉혔다. 집 나서면 그래서 좋은 여자들의 마음을 못 참아주시는구나 하고 혼자서 웃었다.

한바탕 거친 비가 쏟아질 것 같이 잔뜩 내려앉은 잿빛하늘. 들판에 질펀이 깔린 초록의 융단은 눈을 마냥 시원하게 해 준다. 버스는 정신없이 달리고. 창 밖으로 핑핑 달아나는 풀을 뜯는 검은 소들. 흰 양떼들을 만나면서 아주 멀리 시골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잠시 여행고픔의 허기를 달래주기도 한다. 잠깐만 맘 먹고 나서면 느낄 수 있는 이 평화로운 풍광을 왜 우리는 자주 접하지 못하고 혼탁하게만 사는지?...

드디어 내 기다림의 친구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휘청거리는 길다란 몸에 미친듯이 너울거리는 흰 머리카락. 감질나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그 친구들 갈대. 여자의 변심을 갈대의 마음이라고 흔히들 비유하지만 나는 그렇게 가녀린 몸으로도 꿋꿋하게 허공에 떠서 아래로 내려다보며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 당당하고 멋져서 늘 경외스러움으로 좋아하고 즐긴다. 나그네의 마음을 휘어잡고 낭만을 일깨우는 기찻길 옆 갈대들. 한번도 지나치는 철마(鐵馬)를 본적없는 외로운 길인데 그들은 지치지도 않고 변함없이 지키고 있질 않은가.   

“너는 마치 갈대를 닮은게야. 왜 그리 가늘어. 힘이 있어야 거친세상 살아내지” 허약함을 타고난 딸의 모습이 안쓰러워 하시던 친정아버지의 걱정이셨다.

그런 동질감 때문일까? 내가 갈대를 좋아 하는건... 힘쓰며 사는 일은 안 해보고 살았기에 모르겠지만 비록 빈(貧)티나는 휘청거릴망정 지금까지 잘도 살고 있는데... 아버지 가신 나이보다 훨씬 긴 세월이 지나갔다. 내게 유난히 사랑이 깊으셨던 자상한 아버지. 왜 그리 서둘러 일찍이도 저 세상 가셨는지 모르겠다.   

아득하게 추억속으로 멀어져 간 아버지가 오늘따라 어린애처럼 그리워진다.   

며칠 전 추석 성묘하며 남동생이 찍어 보내준 어머니 묘소가 생각났다. 먼저 화장(火葬)으로 모셨던 아버지와 합장(合葬)으로 계신 묘소다. 묘소앞에 심어놓은 어린 화양목이 많이도 자랐다고 대견해 하는 동생에게 면목이 없었다. 오랜 세월 잊고 살아온 불효여식을 꾸짖는 것으로 들려 한동안 부끄럽고 가슴이 아팠다.

이 때다. 누군가 내 꿈을 깨는 사람이 있었다. 종아리에 이물감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을 때다. 건너편 좌석에 앉으신 어르신이 내게 뻗어왔던 지팡이를 걷우시며 손을 내밀어 뭔가를 건네주신다. 혼자서 창밖에만 시선을 두고 있는 내가 고독해 보이셨을까? 마치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허허로워 하는 내 기분을 빨리도 알아차리셨다. 손바닥을 펴 보니 우유빛깔 잴리 두개. 그 것을 입 안에 살며시 넣었을 때. 웬지 옛날 아버지의 체취같은게 절박하게 느껴졌다. 만날 때마다 애들을 챙기듯 무언가를 손에 쥐어주시는 정말로 아버지같은 자상한 분이시다. “고맙습니다.”

여행은 별것 아닌 사소한 것으로도 감동받고 현실과 먼 딴 세상과도 소통할 수가 있어 늘 좋다. 새로움을 경험하고 지나간 일들을 반추하면서 낭만이라는 멋진 말로 즐긴다.

바람처럼 바쁘게 스쳐가는 갈대들의 향연. 그들은 이 길을 지나칠 때 마다 흘리고 가는 내 마음속 여백의 말들을 기억하고 있을까?  

하얀 머리카락을 나풀거리는 속에서 문득 언니의 웃는 얼굴이 나타난다. 언제나 어머니처럼 동생을 챙겨주는 언니. “타국생활 혼자서 어떻게 사느냐고 잘 챙겨먹고 살라”고 신신당부 하신다. 형 만한 아우 없다더니 나는 언니께 해 드린게 없다. 그냥 열심히 살면서 그 분을 편케 해 드리자는 마음뿐. 언니의 머리카락도 이제 하얀 갈대를 닮아 내 가슴을 서늘하게 만든다. “언니 오래 오래 건강하셔야  해요”

제철엔 무더기로 어울려 군무를 출 그들. 그때를 기다릴 것이다. 꽃처럼 예쁜 아름다움이 없어서 사랑받지 못해도 항상 그들 위에 군림하는 위엄이 멋지다. 모진 바람에 휘청거려도 결코 쓸어지지않는 강인함도 나는 좋다.  

막힌데 없는 허공에서 맘껏 춤을 추며 살아가는 자유로운 갈대들. 그 영혼을 닮아 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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