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눈 먼 소녀를 위한 소나타 (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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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눈 먼 소녀를 위한 소나타 (Ⅱ)

0 개 5,254 한일수
월광곡.jpg

어느 눈 먼 소녀의 영혼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 월광곡, 어느 날엔가 나에게도 눈 먼 소녀가 있어, 그녀의 영혼이 허전하다고 느낄 때……

서양 음악가 중에 우리에게 어렸을 때부터 익숙해진 이름은 아마도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일 것이다. 초등학교 5학년 국어 책에 소개된 월광곡 이야기는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이들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이야기의 내용이 사실에 바탕을 둔 것인지 월광곡의 내용에 맞게 상황 설정을 해서 글로 작성한 것인지는 차치하고라도 월광곡의 작곡의도가 절실하게 드러난 글임에는 틀림이 없다. 작곡가이면서 연주자, 글 솜씨까지 뛰어난 홍난파 선생이 발표한 글을 해방 후 문교부에서 채택해 국어 교과서에 실은 것이라 한다. 

베토벤이 어느 쌀쌀한 가을 저녁 달빛을 받으며 산책하고 있었다. 어디서 들려오는 가느다란 피아노 멜로디가 들리기에 그 곳을 찾아 갔다. 어두컴컴한 오막살이집에서 눈 먼 소녀가 악보도 없이 낡은 피아노를 치고 있었고 옆에는 그녀의 오빠가 헌신짝을 꿰매고 있었다. 너무나도 신기해서 자초지종을 물어봤다. 

소녀는 전에 살던 집 건너 쪽의 백작 부인이 치는 피아노 소리를 듣고 흉내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에게는 오라비와 다 깨진 피아노만이 유일한 위안이며 베토벤의 피아노 연주를 듣는 것이 평생소원이었다. 베토벤이 자기의 멜로디를 연주하자 남매는 꿈을 꾸듯 환상의 세계로 빠져들고 소녀는 찾아온 손님이 바로 베토벤임을 알아차리고 감동해마지않았다. 

아물거리던 촛불마저 꺼지고 방안에는 환한 달빛이 피아노 건반위에서 춤추던 밤, 한곡만 더 들려달라는 소녀의 애원에 답하듯 베토벤은 마음속에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달 속의 여인이 춤추듯 고요하고 감미로운 선율이 흐르더니 갑자기 멜로디가 변하여 사나운 비바람이 내려치듯, 불길이 튀어 오르듯, 천지가 뒤흔들리는 듯이 베토벤의 두 손이 건반을 두들겼다. 다시 가볍고 부드러우며 아름다운 멜로디가 두 남매의 가슴속에 평화와 포근한 사랑을 안겨주었다. 

베토벤이 집에 돌아와 밤새도록 그 멜로디를 악보에 옮겨 적었는데 그게 바로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는 피아노 소나타 제14번 월광곡 이라는 이야기이다. 

월광곡(Moonlight Sonata, No.14 C# 단조)은 베토벤이 완전 귀머거리가 되기 전 1801년 그의 나이 31세 때 14세 연하의 연인 줄리에타 귀차르디(Giulietta Guicciardi)에게 헌정한 곡이다. 줄리에타는 베토벤에게서 피아노를 배운 제자였는데 베토벤은 그녀와 결혼까지도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줄리에타는 백작과 결혼해버리고 베토벤은 실의에 빠지고 만다. 돈도 없고 신분도 낮고 귀까지 멀어가고 있는 나이 많은 베토벤에게 시집 올리는 만무한 일이었다.

베토벤은 이 곡을 ‘환상곡 풍의 소나타’라고 불렀을 뿐인데 월광이라는 이름은 후에 비평가 렐슈타프(Ludwig Rellstab)가 이 작품의 1악장이 스위스 루체른 호반의 달빛이 물결에 흔들리는 조각배와 같다는 비유에서 붙인 이름이다. 쇼팽의 ‘야상곡 2번’, 마스네의 ‘타이스의 명상곡’ 등과 함께 한국의 음악 애호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클래식 30곡에 포함되고 있다. 

뉴질랜드에 이민 와서 오클랜드 변두리 농장주택에서 살아보게 됐다. 대지는 넓은데 옆집은 100m 건너 드문드문 배치되어 있어 밤이 되면 삭막하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어스름한 달밤에 창밖을 내려다보면서 월광곡 피아노 연주 소리를 떠올려봤다. 이민 올 때 짐이 될 것 같아 후배에게 넘겨준 피아노를 아쉬워 하다가 마침 115년 된 중고 피아노를 들여놓게 되었다. 가문비나무 몸체에 오리지널 상아 건반이니 요새는 구경할 수 없는 골동품이다. 북유럽에서 수백 년 동안 자라온 가문비나무를 채취해 자연 건조로 8년 이상 묵힌 다음에 몸체를 제조했고 건반에 상아를 입혔으니 거기서 탄생하는 음이 영혼을 움직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집에서 혼자 연습 삼아 치다가 제대로 배워보겠다는 각오로 초보부터 정규 레슨을 받기 시작한 지 6년이 되었다. 나이 들어 배우는 피아노 솜씨가 금방 향상되어 갈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꾸준히 계속하고 있다. 앞으로 30년 이상 더 배울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서두를 필요도 없다. 단지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이 되도록 하루하루를 자기 연마를 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음악을 감상만 할 때보다 자기가 연주를 하며 들을 때는 작가의 의도를 더욱 심도 있게 이해할 수 있으며 특히 클래식 음악은 작곡가의 영혼과 교감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언젠가 나에게도 눈 먼 소녀가 있어 그 소녀가 영혼이 허전하다고 말할 때, 나는 그 소녀를 푸푸케(Pupuke) 호숫가로 안내하고 싶다. 손등에 스치는 저녁 바람을 피부로 느끼며 내가 연주하는 월광곡을 들려주고 싶다.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호숫가에 비친 저녁 달 빛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녀가 마음의 눈으로 감상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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