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風流)를 좋아하는 우리는 모이면 술을 곁들이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어야 직성이 풀린다. 예로부터 음주가무(飮酒歌舞)라는 말이 전해져 오고 술 익는 마을 마다 감칠 맛 나는 좋은 술이 있었다. 농악이나 민요와 어울리던 막걸리가 있었고 70년대 청년문화를 유행시킨 청바지, 통기타 세대의 생맥주 그리고 소주는 서민들의 오랜 친구로 우리와 동고동락하며 지내왔다. 반면에 서양 술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와인은 신화시대부터 등장하여 종교의식에 사용한 술로 사실은 왕족이나 귀족들의 입맛에 맞게 발전해왔다. 그냥 마시면 그만인 것을, 마시는 데 있어서 복잡한 절차나 형식이 있는 것처럼 인식되어 아직까지 누구나 쉽게 접근하기는 어려운 술로 여겨지고 사치스러운 낭만주의자들이나 즐기는 시고 떨떠름한 술이라는 편견을 가진 이들도 있다.
하지만 낭만이란 것이 한가하거나 먹고 살만한 사람들의 전유물은 아니다. 삶이 힘들 때 미래를 꿈꾸고 동경하면서 위안을 삼는 것 또한 낭만이기 때문이다. 라면에 소주를 마시다가 커피포트에 남은 부스러기를 부어 넣고 국물을 만들어 마시던 눈물겹도록 낭만스러웠던 젊은 날의 한 시절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진하게 농축된 시간은 지나고 나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리움이 되기도 한다.
“궂은 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잔에다 짙은 섹스폰 소릴 들어보렴” 낭만을 노래한 최백호씨의 가사처럼 실연의 달콤함도 청춘의 미련도 없지만 바바리코트를 걸치고 선창가 뱃고동소리에 서글퍼하며 첫사랑 소녀를 그리워하거나 가슴에 잃어버린 것과 다시 돌아오지 않을 곳에 대한 짙은 향수를 끄집어내는 것 또한 낭만이다.
낭만(浪漫)을 떠올리면 예술가들이나 그들 옆에 나뒹구는 술병들을 자연스럽게 떠올린다. 특히 사람의 감정을 쉽게 표현할 수 있는 음악은 술과 운명을 같이 한다고 해도 무리한 표현은 아닐 듯싶다. 왜냐하면 술의 발전과 음악의 변천은 인간문화의 다양성과 함께 오랜 세월을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술과 방탕 그리고 자유로운 정신을 고집하는 이들의 고삐 풀린 상상력 곁엔 와인이 있다. 독일의 화이트와인을 마시면서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듣고 프랑스 보르도의 묵직한 레드와인과 베토벤의 교향곡 그리고 상-송을 들으면서 샴페인 잔을 마주치는 즐거움은 술과 음악의 조화를 아는 사람만이 가지는 특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와인이 클래식음악과 잘 어울리지만 재즈와는 그 분위기가 독특한 다른 맛을 경험하게 한다. 흉내 낼 수 없는 복잡한 선율은 때론 절묘하며 때론 지극히 아름다운 특유의 굴절과 긴장으로 가득 차 있다. 풍부한 감정과 저마다의 개성을 가지고 한 음 한 음이 이어지면서 뮤지션의 기억의 파편 속에 남아 있는 것으로부터 방금 연주한 한 음을 고려해 다음의 한 음이 연주된다. 이 직감적인 미학적 균형은 전체 곡을 만들어 가면서 완벽을 이루어 나간다. 와인도 그런 의미에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일회용 컵 라면이나 커피 자판기에서 느껴지는 지루한 정형성과는 달리 재즈가 주는 즉흥성과 자유 그리고 잘 정제된 와인 한 잔은 또 다른 술 문화의 키워드라는 얘기다.
섹스폰은 고사하고 풀피리를 불지라도 이 여름엔 와인 한잔을 마주한 채 낭만을 채워야 할 여유가 필요하다. 이러한 시간이 결코 헛된 것은 아니다. 이성적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었던 마음의 세계가 열리고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던 일들의 실마리가 실타래 풀리 듯 쉽게 풀려지는 기적이 일어나기도 한다. 바쁘게 달려야 하는 이유로 우리의 상상 속에서만 떠올리던 꿈이나 미래 따위의 단어들처럼 낭만에 잘 버무려진 당신의 희망이 다시 되살아난다. 풀려지지 않을수록 옥죄지 말고 베짱이처럼 느긋하게 낭만을 노래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