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느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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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느러미

0 개 1,750 박건호
1. 나는 몇몇 여자들에게 미안함을 안고 살아가야한다. 허세, 조작, 이기가 엉켜서 나 스스로도 통제 못하던 때가 있었다. 나를 연출하는 것은 나의 처세가 되었었고 그것이 연애에도 적용되기도 했다. 사회에서의 정치적으로는 좋았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의 진심마저 처세로 대해 버렸던 나의 모습이 가끔은 후회스러울 때가 있다. 차가움과 뜨거움을 번갈아 오가던 말도 안되는, 훗날 사과조차 못할 연애들이 살인자의 노래처럼 내 귀를 울린다.
 
2. <Gravity>를 보았다. 내가 본 헐리우드 영화 중 가장 고독한 블록버스터였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3D 안경 너머로 눈물을 흘렸다. 우주에 홀로 버려진 그 영상들. 살려고 어떻게든 발버둥치는 모습은 실상 우주를 배경으로 한 지구와 다를 바가 없었다. 내 방도, 내 머릿속도 하나의 우주가 아닌가. 결국 외부에서 오는 시련들을 맞아가며 살아내려 버티고, 소중한 인연들을 생각하고, 죽기를 결심하고... 우주선 유리창의 균열은 내 머릿속에서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인간은 누구나 고독하다. 고독은 영화에서의 롱테이크처럼 지루할 듯 지루하지 않을 듯한 인생처럼 끊임없이 순환된다. 반짝이는 별들이 무섭다. 그런 아름다운 것들이 고독을 비출 때, 그것은 가까운 미래의 비참한 외로움을 예견하는 빛이 되어버린다. 아름다운 것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다. 어떻게든 살아가고자 하는 인간들 틈 속의 나를 견딜 수 없다. 내게는 그런 중력의 영화였다.
 
3. 혼자 있을 때의 나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싶어 안달이고,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의 나는 어떻게든 숨고 싶어 안달이다. 이 두 가지의 모순 속에 내가 우두커니 서 있다고 느껴질 때, 나는 사라져 버려야 한다. 숨는 것이 아니라 나조차도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를 정도로 사라져 버려야만 한다. 곧은 마음과 비틀어진 마음들 그 자체를 멍하게 쳐다보고 앉아있어야 한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나와 세상 모두를 사라지게 만들어야 한다. 이것은 나의 숙명처럼,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나를 감싸 쥐고 있었다.
 
4. 낯선 곳이 두렵지 않다. 난 어디를 가도 내 공간이라고 정확하고 명백하게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더더욱, 집을 내 공간으로 만들려고 애쓴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내게는 낯설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디를 가든 낯선 곳이라고 느끼는 버릇이 생긴 이유는, 항상 죽음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거리를 걸을 때마다, 뭔가 행동을 할 때도 아, 이렇게 살다가도 갑자기 차가 날 치인다거나, 내가 넘어졌는데 머리부터 넘어진다거나, 해서 굉장히 허무하고 우스꽝스럽게 죽을 수도 있겠구나, 라고 생각한다. 지구는 다음 일을 알 수 없는 허무한 찰나들로 가득한 곳이다. 그래서 그 허무가 내겐 낯설다. 즐겁게 웃다가 죽는다면 죽는 순간에도 행복할거라고 생각하는 것도 실은 우습다.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공포와 허무에 대한 방어는 모든 것을 낯설게 만드는 것이다. 계속해서 낯설어져야만 살아갈 수 있는 부류의 사람들은 확실히 있다. 고로 나는 낯선 시간 그 자체가 되고 싶다.
 
5. 지느러미의 날이 곧게 서 있는 생선 한 토막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물고기들을 실고 가던 트럭의 틈에서 떨어진 듯, 한 낮의 검은 아스팔트 위에 청명한 비늘을 드리우고 동그란 눈으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간헐적으로 팔락이는 지느러미의 의미를, 나는 눈으로 열심히 좇고 있었다. 그 생선은 바다로 돌아가고 싶었던 걸까, 트럭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걸까. 혹은 그저 생존을 목적으로 목적지 없는 지느러미를 그렇게도 까딱였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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