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곤한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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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

피곤한 고양이

0 개 1,708 박건호
영화학과 출신이라는 것은 좋은 일이다. 대학시절, 학과 공부는 잘 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영화와 관련된 종합예술에 있어서만큼은 -조금 편협하긴 해도- 나름대로 공부를 했었다. 때문에 영화든 음악이든 문학이든 장르에 관계없이 그와 관련된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은 큰 장점이 아닐까 싶다. 특히 외국에 나와서는 첫 만남에 대화거리를 찾기가 쉽지 않은데, 다행히 그런 면에 있어서는 학과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양한 이미지 면에 있어서 말이다.

스스로의 면면을 다양하게 만드는 것은 내게 있어서 처세술과도 같은 것이다. 주로 60%의 헛소리와 39%의 의성어 혹은 의태어, 감탄사가 대화의 전부인 나로선, 1%의 면면에서 수십가지 모습을 보여줘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슬프고 피곤한 버릇이 있다. 달변가가 아닌 나로선 툭툭 내던지는 이상한 한 문장의 말로 나의 진심을 표현할 수밖에 없는데, 나와의 대화를 즐기고 있던 사람은 그런 진심을 이해하지만 그리 흥미가 없던 사람은 나의 그런 내뱉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면 나와의 대화를 “즐기던” 사람들과만 공통분모가 이루어지고, 이어 점점 자연스럽게 그룹이 형성된다. 자연스런 처세술이자 정치의 일종인 이런 대화습관이 진저리나도록 싫지만, 이제는 체화되어서 버리기도 쉽지 않다. 그러려니, 하고 살 수 밖에 없다.
 
인간이 아니라 고양이같다라는 말은 한국에서 참 많이 들었는데, 여기서도 그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왜 그런고 하고 물으니 변덕이 죽 끓듯 하며 가끔 보여주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과 제스처, 그리고 “뭔가 그냥 고양이” 같단다. 나를 집에다 놓고 키우고 싶다는 10대 키위들의 재잘거림에 20대인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고양이는 확실히 내가 좋아하는 동물이긴 하지만, 고양이와 살아본 적은 없기에 잘은 알지 못한다. 하지만 고양이는 기본적으로 이미지 과잉을 -의도하든 의도하지 아니하든- 거부하는 기질이 있는 동물이라고 생각한다. 말을 잘 하지 않으니 우리는 그 의도를 알 수 없지만, 주인이 손을 뻗어 잡을라치면 휙 하고 도망가버리고, 그러다가도 스스로 꼬리를 흔들며 찾아와 쓰다듬어주기를 요구할 때도 있다. 이는 인간으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어떤 현상이기에, 굳이 이런 행동에 단어를 붙이자면 “변덕”인 것이다. 이러한 “일관적인 변덕”은 고양이니까 가능한 일이고, 이것이 결국 호기심 많은 인간에게 있어서 “고양이의 신비로움”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그리고 이 일관적이고 직선적인, 때로는 일방적인 변덕의 성격을 가진 나란 사람이, 다행히 주변 사람들은 그리 싫지 않은가보다. 다만 고양이와 나의 차이점은 나는 이러한 “일관적인 변덕”을 가끔씩은 조절한다는 것이다.
 
“일관적인 사람들”은 모르긴 몰라도 내게 있어 재미없는 사람들이다. 특히 “말이 많고” “일관적인” 사람들은 특히 그러하다. 늘 자신을 과시하지 못해 안달난 사람처럼 말은 많은데, 이 말들이 사실 모두 알고 있는 사실들이다. 침묵을 두려워해서 말은 쏟아내는데 누가 봐도 “나랑 대화하고 싶은 것”이 아닌 “스스로가 알 수 없는 조바심에 쫓겨서” 말을 하는 느낌이다. 이런 식의 “일관된 일관”은 시간이 흐를수록 상대방의 리액션을 이끌어 내지 못하며 질리게끔 만든다. 이미 너무 많은 이미지를 상대방에게 이미 내보인 후이기에 아무도 그에게 흥미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대화할 수 있는 소재의 양은 1%인데 이미 그 1%를 100%처럼 말해버린 그는 더 이상의 이미지를 상대방에게 보여줄 수 없다.

앞서 말했다시피 하는 말의 60%가 헛소리, 39%가 의성어인 나는 고양이처럼 아주 조금씩, 조금씩 상대방에게 1%를 0.001% 정도씩 쪼개서 보여줄 수밖에 없다. 나와의 대화를 즐기고 있는 상대방이 그 0.001%가 내가 말할 수 있는 전부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금씩 조금씩 아주 짧은 손톱으로 귤껍질을 까주듯 그렇게 천천히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동안 상대방의 새로운 이미지를 내게 흡수해서 또다른 나의 이미지로 변환하여 바쁘게 채워 넣어야 한다.

마침내 1%의 귤껍질이 다 까지면 나는 고양이처럼 그 자리와 상대방의 곁을 곧바로 떠나야 한다. 한 번 드러난 이미지는 상대방에게 가치가 없다고 믿기에, 그것은 나에 대한 배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결국 또다른 1%의 이미지를 어딘가에서 얻기 위해 떠나야만 한다.
그것이 고양이가 늘 피곤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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