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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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

소리

0 개 1,446 박건호
바람결에 흔들리는 투우사의 망토와도 같은, 서걱거리는 심장이 있었다. 영혼의 텍스트들이 두터운 긴장감으로 다다다다닥 머릿속을 훑어내고, 가느다란 담배연기가 시간 위에 퍼져나가고 있었다. 너는 조금만 움직여도 소리가 발생하는 거대한 은회색 강당에 빨간 사과를 쥔 채 서 있었다. 너는 손을 들어 은색 기둥을 매만지고, 빨간 사과는 은색 기둥에 유난히 눈에 띄게 반사되어 마치 빨간 사과만이 이 강당 안에 홀로 부유하고 있는 듯했다. 너는 사과를 내려 놓았다. 거대한 소리가 강당 전체에 울려 퍼졌다. 사과는, 조금씩 바닥 위를 구른다. 나는 2층의 유리난간에 기대어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채워져 버린 외로움 같은 것들이 하늘 위에서 조금씩 흩날리고 있었다.

넌 내게 그 때 우리가 없어져 버리면 좋겠다고 말했다. 두 손을 꼭 잡고 끌어안고, 햇살로 가득 찬 옥상 위에서 넌 내게 우리가 이대로 없어져 버렸으면 하고 바랬다. 나는 너를 조금 더 끌어안는 것으로 동의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건물 위에서 건물 아래의 너를 보고 있다. 사실 그 때, 우린 알고 있었다. 본질은 결코 남들이 채워줄 수 없다는 것을. 아무도 서로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을. 결국 이야기를 듣는 모든 사람들은, 남에게 비춰진 자신을 보고, 자신과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을. 우린 서로 그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서로에게 진심으로 다가가려 애썼었다. 보기만 해도 예쁜 빗소리가 날 것 같은 조그만 손 편지에서부터 재미있던 비트들이 방 안 가득 찼던 섹스까지. 다가가는 방법은 무궁무진했다. 하지만 어떤 길이 맞는지는 알 수 없었다.

건물을 지탱하고 있는 은색 기둥들. 너는 손 끝으로 가만가만 은색 기둥을 매만졌다. 손 끝에 살짝 잠긴 은색 기둥이 내는 조그만 울림들에 나는 이명을 느낀다. 새들이 날개를 퍼덕이고, 기타의 코드를 바꾸는 손과, 열쇠구멍 속으로 들어가는 열쇠. 조그만 마당 위에 불던 바람.

침대 위에서 자고 있는 너를 찍기 위해 카메라를 찾아냈다. 흑백필름을 두 번이나 갈아 끼우고, 찍은 것 중 다섯 장 정도는 괜찮았을 거라 생각한 나는 카메라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이제 자고 있는 너를 깨워야 할 시간이었다. 나는 냉장고에서 빨간 딸기를 꺼내어 자고 있는 너의 입 속에 넣어주었다. 자고 있던 너는 천연덕스럽게도 딸기를 꼭꼭 씹으며 일어났다. 나는 그 모습이 참 우스워서 급히 카메라를 들고 한 장을 더 찍었다. 내 손 안에서 필름이 돌아 가는 소리가 났다.

필름이 돌아가는 소리가 건물 전체에 울려퍼졌다. 필름이 계속해서 돌아가고 있었다. 높다란 허무의 궁륭에서 거꾸로 무엇인가 쏟아져 내리는 소리. 중력을 잊은 기억의 분수 같은 소리. 의식의 궤양을 앓고 있는 도시가 내는 외침소리. 푸르른 횡경막의 네온사인이 낭창낭창 흔들리는 소리. 박살나는 아침의 소리 같은 소리. 그냥 눈물이 난다고 말하는 너의 목소리.

너는 건물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리고 나는 2층의 난간 위에서, 따뜻하고 몰인정한 사람이 되어갔다. 무관심의 모호한 경계가 자라나는, 이상한 사람이 되어갔다. 건물 안으로는 노을빛이 쌓여가고 있었다. 우울이 부러지는 소리가 나며 하늘 아래로 내려가는 태양을 나는 바라보고 있었다. 자꾸만 건물이 녹을 것 같다는 생각에, 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자꾸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필름이 돌아가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건물 바닥에 놓여진 사과가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었다.

모자이크(Ⅱ)

댓글 0 | 조회 1,240 | 2013.11.27
호텔 앞의 해변 아침에 일어나 담배 연기같은 차가운 태양이 빛나는 바다를 보았다. 빨간 투명함이 내리쬐는 백사장엔 무덤 하나가 있었고 그 위의 크림빛 소녀는 고개… 더보기

적과 빛

댓글 0 | 조회 1,256 | 2013.02.27
그 일은 2011년 3월 중순 너무도 갑작스레 일어났다. 일종의 컨설팅 회사가 내가 다니던 대학교를 한 번 다녀갔고, 이틀 뒤 한 강사 분이 우리에게 소식을 전해… 더보기

모자이크(Ⅰ)

댓글 0 | 조회 1,264 | 2013.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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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

댓글 0 | 조회 1,288 | 2014.09.10
정보로만 존재하는 행성에 대한 시놉시스를 쓴 적이 있다. 그 곳에서는, 실체는 없고 모두 정보로만 존재한다. 아무 소통도 접촉도 없이 정보들이 둥둥 떠다니는 셈인… 더보기

탄생의 버릇

댓글 0 | 조회 1,356 | 2012.12.12
사실 오늘은 저의 생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의 전화와, 제 생일을 알고 있는 한국 친구들 몇 명과 메세지 몇 통을 주고 받… 더보기

한뼘

댓글 0 | 조회 1,363 | 2014.12.24
카페에 도착했다. 도착한 시각 오후 6시. 조금씩 지면을 향해 낙하하는 노을들이 수면 위의 카페를 빛내고 있었다. 폐선을 개조해서 만든 건지. 디자인 컨셉을 그렇… 더보기

얼굴

댓글 0 | 조회 1,366 | 2013.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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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꺼기 혹은 빛나는

댓글 0 | 조회 1,367 | 2012.11.14
그는 J로부터 한 통의 문자를 받는다. 한국에서 다니던 영화 관련 직장을 때려 치우고 외국으로 가야겠다는 것이다. 뒤이어 그는 한 통의 문자를 받는다. 워크비자 … 더보기

크라이스트처치 기행 메모

댓글 0 | 조회 1,399 | 2013.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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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기(Ⅳ) 기다림의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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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과정을 모르고 기다리는 기다림이 그러하다. 마치 누군가가 미래의 로또번호를 가르쳐주긴 했는데 몇 회 차인지 가르쳐주지 않…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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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자와 소비자의 시의성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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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나 있는, 어디에도 없는

댓글 0 | 조회 1,501 | 2013.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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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6월,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은 빌 클린턴 앞에서 진정한 하의실종을 보여줬다. 당시 르윈스키와의 스캔들을 노골적으로 풍자했었던, 이 가학적이면서도 키치…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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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의 아니게 대학원에 입학하려는 사람의 자기소개서를 도와주게 되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대학원이 뭐하는 곳이었는지 헷갈릴 정도로 충격적인 초고를 이메일로 …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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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부터 “왜 그렇게 사람이 빡빡해요?”라는 말을 종종 들어왔다. 팍팍하다는 말은 다양한 의미의 관용구로 해석될 수 있으나, 나의 경우에는 …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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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 | 조회 1,577 | 2014.06.11
뜻하지 않은 일로 계획이 틀어져버렸다. 뭐랄까, 먹는 것보다 싸는 게 더 힘든 느낌이 든다. 오늘. 예정대로라면, 나는 발매계약을 했어야 했지만, 뮤직비디오 편집…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