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과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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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

적과 빛

0 개 1,256 박건호
그 일은 2011년 3월 중순 너무도 갑작스레 일어났다. 일종의 컨설팅 회사가 내가 다니던 대학교를 한 번 다녀갔고, 이틀 뒤 한 강사 분이 우리에게 소식을 전해주었다. 학과 폐지, 라는 것이었다. 그날 밤 갑작스럽게 모인 우리 4학년들은 밤새도록 대책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나는 적이 없는 이 시대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햇빛이 들지 않을수록 낭만은 짙은 법이라 생각했었다. 조금은 모순된 얘기다. 하지만 그 때 나는, 껍질이라도 예술가가 되고 싶었던 일종의 열병을 앓고 있었던 듯하다. 고흐는 압셍트를 마시며 귀를 잘랐다, 시드는 사랑과 표현을 위해 자해를 한다, 나혜석은 그녀의 정상적인 고뇌를 둘러싼 비정상의 초점 위에 위태롭게 부서졌다 운운. 당시 나는 가이드라인을 억지로라도 따라가기 위해 남들은 상상도 못하는 고뇌의 명분과 자극의 촉매가 필요했었던 것이다. 그러한 껍질의 기록과 다짐들 속에서 허우적대며 적이 없던 시대를 불평하던, 나라는 사람이 있었다. 지독히도 부자연스럽고 지긋지긋하게 건강하던, 나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동경 받기 위해 동경들을 따라가, 예술의 온도들과 억지로 투쟁하려던 내 앞에, 드디어 적이 나타났던 것이다.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부적절한 컨설팅회사에 대응하여 계획을 짜기 시작했고 나는 컨설팅이라는 “거대 기득권” 세력에 맞서기 위해 그날 첫 회의 이례로 자료 위원장을 맡았다. 총장, 재단 이사장 등 “더러운 권력자”들에게 보낼 자료를 모두 정리하여 보내는 일이었다. 밤을 새워 자료를 정리하고, 4일이 지나 80페이지 남짓한 자료가 완성이 되었고, 그 자료를 배포하기 시작하면서 한 달에 걸쳐서- 서명운동, 학생본부 앞에서의 침묵시위에 들어갔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컨설팅 회사의 요지는 “취업률이 일정 기준치에 미치지 못하는 연극영화학과는 대학교 내의 학과로서 기능을 하지 못하므로 폐지 혹은 수정하여 다른 방안을 찾는 것이 옳다”라는 것이었다. 우리의 요지는 “감독조차 정규직으로 인정을 해주지 않는 사회에, 영화현장 스텝들이 어떻게 취업률로 측정이 될 수 있겠는가” “예술학부를 98년도에 신설하고 10년도 안 되어 없앤다는 것은 컨설팅과 대학 간부들의 예술에 대한 이해수준의 저급함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결국 우리의 투쟁은 학과 계획 일부수정 방안으로 일단락 되었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저격할 것이 생겼을 때, 맞설 적을 찾던 나는 활기에 넘쳤는가. 그렇지 않았다. 내가 본 것은 총장, 교수들의 이권 다툼, 또 학생들끼리의 정치싸움 등 온통 슬픈 광경뿐이었다. 도서관내 강당에서 컨설팅 회사와의 합의를 겸한 프리젠테이션이 있을 무렵이었다. “공부하고 싶습니다!” “당신들의 자녀는 우리가 만든 영화를 봅니다!” 등등의 구호를, 굳게 닫힌 강당 문 앞에서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외쳤었다. 곧이어 합의를 마친 그들은 강당의 문을 열고 나왔다. 우리를 무시하는 당당한 태도들과, 외면해 버리는 비겁한 뒷모습들에게서- 나는 어떤 무력함을 느꼈다. 도서관 진입 자체를 통제하고, 들어가려 버둥거리던 내 동기들과 선후배들의 손들과 수없이 쏟아지던 음성들. 타협과 충돌. 의리와 실리. 이율배반과 참여에의 강요. 투쟁의 그림자를 유지하고 목표를 향해 전진하기엔 세상은 너무 복잡 해졌고, 우리는 너무나 다양했고 약했다. 결과적으로- 우선 적어도 후배들을 위해서는 잘 해결되긴 했었다. 그러나 그 앙금은 도저한 무게로 나를 한동안 짓누르고 있었다.

기득권을 향한 불만도, 투쟁도 모두 좋다. 소통의 방법 중 분명 가치를 가진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공통의 목표를 사심없이 이행하기 위해선 정말 축적된 어둠이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깊이 스며들어 있어야 한다는 것. 하지만 그것을 순수한 목적으로의 실행을 유지하려면 수많은 아픔과 상실이 불가피하다는 것. 어떻게 한다해도, 결국 지금의 인류는 자기 자신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라는 것. 어찌되었든, 투쟁의 상대가 타인이 된다는 것은 가장 슬프고 아픈 일의 시발점이라는 것.

다행히도 그로부터 1년 정도가 지나, 결국 한 네덜란드 화가가 나의 무게를 조금은 덜어주었다. 무표정하게 서있는 사람들의 그림 아래에 작게 적어 놓은 문구는, 나를 어디에 있게 해줄지 결정해주었다.

- 모두가 같은 빛을 받으며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려 애쓰고 있다 -

나는 남과의 투쟁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다. 그러기엔 나는 아직 너무 약하고, 아직도 강한 척하려 한다. 투쟁을 위해 단련할 순 있지만, 투쟁을 위해 이미 미래에 놓여있는 기억을 끊임없이 수정하는 사람이 될 순 없다. 투쟁이란 것은 결국 자기 자신과 할 때 가장 힘들고도 즐겁다는 것. 그 자기 자신과의 밝은 투쟁이 결국 커다란 힘 중 하나가 되어 또다른 투쟁이 될 수 있다는 것. 즉 내가 서있는 접경 위의, 일종의 접경 위의 이 집시들도 모이면 99%가 될 수 있다는 것.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며 애쓰든 말든, 결국 우리는 같은 빛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을 인정을 하는 순간- 그것은 서로에 대한 대립에서의 급진적 힘이 아닌, 서로의 빛을 볼 수 있다는 깨달음의 안정적 힘을 함유하게 된다. 그리고 그 함유의 밀도가 세상의 방향을 지정하는 시대를, 지금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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