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삶의 패턴은 있다고 생각한다. 일종의 규칙, 루틴, 어겨선 안 될 불문율, (이런 조잡한 표현을 사용해도 좋다면) 징크스.
나는 두 말 할 것도 없고, 주변 사람들만 봐도 그렇다. 우리 모두에겐 각자 나름대로 인생을 사는 법칙이 있다. 매일마다 운용하여 벗어나지 않는 틀이, 쳇바퀴의 일부가. 그것은 아주 중요하다. 특정한 무변화와 일상의 반복은 어떤 개인에게 있어서는 의지할 수 있는, 의지할 수밖에 없는 벽이 되기 때문이다. 때때로 필수적인.
한결 같다는 것은 마음의 쉼터가 되므로 아주 중요하다. 그리고 기댈 만한 한결 같은 사람이 없다면- 글쎄, 그럼 적어도 정신적 도피처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건 모든 개개인에게 허락된 일종의 자유이자 권리라는 것이 내 지론이다.
그 머릿속 한 구석의 안락한 쳇바퀴가 어떤 것인진 사람마다 다르리라. 누구는 절대로 하루의 한 끼도 거르지 않는 것이겠고 (우리 엄마), 적어도 하루에 한 시간 정도는 악기 연습을 하는 것일 수도 있고 (아빠의 경우) 무조건, 무슨 일이 있던 매일매일 운동을 빠뜨리지 않고 해야 안심이 된다던가 (내 동생이 이렇다). 일종의 미신이라고도 하겠지만, 우리가 그것을 믿고 따르면 그건 미신이 아닌 우리의 일부가 된다.
특히 나. 변화에 잘 버티지 못하는 나란 사람에겐 반복으로 인해 유지되는 질서가 아주 커다란 의미를 가진다.
가령, 약속 장소에 항상 먼저 오는 것. 지각에 아주 치를 떠는 나는 어떤 약속이던 상관없이 최소한 10분은 먼저 와야 직성이 풀리고 안심이 된다. 언제나. 혹여 무슨 일이 생겨서 다른 사람을 기다리게 했다면 죄책감에 몸서리를 친다. 아무리 상대가 괜찮다고 해도, 내가 괜찮지 않으니까.
이유는 잘 모르겠다. 시간이 금이라던가 하는 그런 고사적인 이유뿐만이 아닌, 다른 복합적인 까닭도 있는 것 같지만 그걸 분석해내기가 쉽지 않아, 혹시 묻거나 하는 사람에겐 ‘그냥 늦는 게 싫다’고 답하곤 하지만. 실제로 난 학교에서도 수업 시작 15분 전에 먼저 와서 기다리거나 - 심지어는 - 아예 한 시간쯤 전부터 미리 찾아와서는 강의실 앞에서 도시락을 까먹거나 책을 읽으며 기다리곤 했으니까. 절대 늦을 일은 없다는 것, 여태까지 흠 없이 진행되어온 하루의 일정이 망쳐지지 않았다는 안도감에 사로잡힌다.
그러니까 결국, 이렇게 철저하게 자신의 법칙에 집착하는 이유는 발단적으로도, 궁극적으로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이다. 부정의 여지가 없다. 당연한 일이다.
법칙이라기엔 좀 뭣하지만, 내겐 또 다른 불문율(?)이 있다. 징크스라는 표현이 더 옳을 법한데, 숫자 2에 관련되기만 하면 운수가 지독히도 없어지는 게 그것이다. 정말이다. 2와 얽혀서 좋은 꼴을 본 적이 거의 없었다. 내가 두 번째로 뽑힌 스포츠 팀마다 지는 것에서부터, 매달 두 번째 주의 첫날마다 소소한 고통들을 겪게 되는 등. 하도 자잘해서 일일이 늘어놓을 순 없지만, 하나같이 세세하고도 쓸데없이 섬세해서 작아도 꽤 심적으로 괴로운 불행들만 잔뜩이었다. 지금도 그렇다. 숫자 2만 나오면 그래서 나는 등골이 오싹해진다. 아니라며 부정해보려 해도 또 2와 관련되어서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아, 또, 하고 탄식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상황의 흐름에 따른 변화는 물론 피할 수 없고 그것 또한 생존을 위해선 당연한 것이지만, 난 그래도 가급적이면 우리 자신은 변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관심사, 나라는 자아를 형성하는 그것까지 크게 뜯어고칠 필요는 어느 때도 없다. 아무리 바뀌더라도 핵심 속의 핵심만은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언젠가는 그것들이 우리를 구원해주리라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