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남자 친구

연재칼럼 지난칼럼
오소영
한일수
오클랜드 문학회
박명윤
수선재
천미란
성태용
명사칼럼
조기조
김성국
템플스테이
최성길
김도형
강승민
크리스틴 강
정동희
마이클 킴
에이다
골프&인생
이경자
Kevin Kim
정윤성
웬트워스
조성현
전정훈
Mystery
새움터
멜리사 리
휴람
김준
박기태
Timothy Cho
독자기고

옛날 남자 친구

2 4,291 NZ코리아포스트
나의 20대는 박스 안에 갇혀 있었다. 짐 정리를 하다가 나는 곰팡내 나는 눅눅한 박스 안에 들어 있던 나를 끄집어냈다. 뭐라고 되지도 않는 말들을 씨부려 놓은 원고 뭉치, 졸업 앨범, 나의 졸고가 실려 있는 교지 등이 어둠에서 빛으로 나오는 순간, 나는 당혹스러웠다. 군살도 없고 반질한 피부에 그늘 없는 웃음의 저 여자가 나란 말인가? 더벅머리 남자친구들하고 살갑게 어깨 동무를 했군. 저런저런! 밤을 새며 원고지 칸칸마다 만년필로 한자한자 써넣었던 그 일도 내가 했다고? 교지 맨 뒷장 후기에는 ‘Crazy days of fall’이라면서 5백년도 더 된 명륜당의 노란 은행잎이 나를 더 미치게 만든다고 썼다. 졸업반 때 나는 사회에 내던져지는 불안감이 무척 컸었다. 누가 추억은 아련하다고 했던가. 옛날은 눈 앞에 잡힐 듯 생생했다.

녀석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때 모이기만 하면 깍두기 안주에 막걸리를 마셔댔는데, 지금 만나면 그때처럼 막걸리 한 잔 하고 서로 어깨를 걸고 고래고래 노래 부를 수 있을까. 한국에 막걸리 붐이 불고 있다는데---. 그 시절과 친구들이 가슴에 사무쳤다.

하루, 이틀 마음을 다잡았다. 나는 박스를 열지 말았어야 했다. 이집트 왕조의 무덤을 파헤친 이들이 하나, 둘 죽어간 미스터리가 깨달아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투탕카멘 왕이 뱀의 소굴을 지나서 불의 동굴을 뚫고 생명의 감로수가 흐르는 강에 도달해서 그 물을 마시려는 순간, 무덤이 열리고 한 줄기 빛이 왕의 눈에 화살처럼 꽂혔다. 왕은 물 그릇을 떨어뜨렸다.

“오! 나의 영생을 방해하고 비밀을 파헤치는 자 누구냐. 천벌을 내리리라.”

하지만 나의 손길은 박스를 자주 열었다. 리더십이 뛰어났던 K, 의리파 J, 위트와 재치가 넘치는 유쾌한 H 등의 사진을 보면 나는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중국집 골방에 모여 이념 서적을 몰래 읽고 토론하던 일, 입대하는 친구를 위해 함께 밤을 지새며 입영 전야를 불러주던 날들, 터덜거리는 시골 버스 바닥에 앉아서도 즐거웠고 춘천가는 기차를 타고 MT를 떠나기도 했는데---.

그렇게 매일 모여 지내다가 우리는 졸업을 했고 갑자기 헤어졌다. 녀석들은 입대 하거나 대학원엘 가고 나는 직장 생활을 하다가 결혼을 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결혼 축하 카드를 보내온 K. 나이를 먹어간다는 증거는 가정법이 늘어간다는 것이다. 만약 내가 K랑 결혼했더라면---?

“옛 남친을 만나면 얘기도 잘 통하고 좋을 수도 있는데, 그 아내가 싫어할 걸?”

H언니가 말했다. 나이 먹어간다는 증거 또 하나는 우리에게 제약이 많아진다는 것.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나는 내가 사랑해마지 않았던 영화가 참혹하게 일그러져 버렸던 사실을 깨달았다.

이태리 영화 ‘시네마 천국(Cinema Paradiso)’은 나의 베스트 영화다. 인생의 꿈과 사랑, 희망을 다정하고 친밀하게 이야기 하면서 그것의 무상함도 조곤조곤 보여준 우리네 얘기다. 배경은 이탈리아 시칠리아 작은 섬, 2차 대전 직후다. 어린 토토의 아버지는 전쟁에 나갔고 토토의 엄마는 아이들을 돌보며 가난하게 살고 있다. 토토는 돈 몇 푼을 들고 아기 우유를 사러 가다가 항상 옆으로 새는데, 그곳이 낡은 극장 ‘Cinema Paradiso’다. 그곳에서 영사기를 돌리는 늙은 기사 알프레도는 토토가 귀찮기도 하지만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나이 차이를 넘어 두 사람은 우정을 쌓아가는데--- .

토토는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엘레나라는 청순하고 이지적인 소녀를 사랑하게 된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뉘 집 처마 밑에 서서 불 켜진 엘레나의 2층 창문을 바라보는 토토. 그러나 창문은 한 번도 열리지 않고 ---. 엘레나의 아버지는 토토를 못마땅하게 생각해서 엘레나를 데리고 마을을 떠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키스 & 키스의 파노라마다. 인간이 만들어 낸 최고의 언어이자 몸짓은 키스가 아닐까. 말이 뭐 필요한가. 그 옛날 신부님이 종을 울리면 잘라내야 했던 남녀상열지사-키스신만을 모아둔 필름이 알프레도가 토토에게 남긴 마지막 선물. 행복해지고 싶으면 You Tube에서 엔리오 모리코네가 작곡한 ‘시네마 천국’ OST를 들어보라. 웃으면서 눈물 흘리는 토토처럼 나도 그렇게 울면서 웃게 된다.

나는 영화관에서 ‘시네마 천국’을 두 번 보았다. ‘시네마 천국’이 상영되고 한 두해가 지나서였던가. ‘뉴 시네마 천국’이 들어왔다. 영화사에서는 엘레나와 토토가 재회한다고 대대적으로 광고를 했다. 나는 토토를 만나러 가는 엘레나의 심정으로 허둥거리며 영화관엘 갔다. 알프레도의 장례식 때 고향을 찾은 토토가 엘레나와 재회했다. 고작 15분 정도. 이십여년 만에 만나는 토토와 엘레나는 완전 중년이었다. 두 사람은 차 안에서 반갑게 포옹도 하고 키스도 나눈다. 아, 나는 기겁했다. 쿵쾅거리던 가슴이 폭삭 무너졌다. 이제 토토와 엘레나의 번개처럼 부딪치던 애틋하고 뜨거운 눈빛을 어디서 찾는단 말인가! 봉인된 세월은 봉인 안에서만 생명력을 누릴 수 있는 것이련가. 사족(蛇足)은 작품을 망친다.

ⓒ 뉴질랜드 코리아포스트(http://www.koreapost.co.nz),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쌔엠
지난 건 다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youngluv
네... 저도 그래서... 옛날 사람들을 만나는게 망설여지더군요...
작가님의 투탕가멘왕의 비유와 시네마 천국의 예는 매우 적절한 이해를 돕는다고 느끼며 글을 읽었습니다. ^^

심전도(心電圖) 검사

댓글 0 | 조회 178 | 13시간전
최근 어느 모임에서 만난 지인이 부정맥(不整脈)이 있어 심전도(心電圖) 검사를 받았다고 말했다. 고령사회로 접어들면서 심혈관 질환이 증가하고 있으므로 고령자는 정… 더보기

가족 및 자원 봉사 간병인을 위한 정부 실행 계획

댓글 0 | 조회 563 | 8일전
Consultation on Action Plan to Support Carers 사회개발부(Ministry of Social Development, MSD)는 … 더보기

타마키 마카우라우 경찰 소수민족 서비스팀 수상 안전 실시

댓글 0 | 조회 300 | 9일전
지난 11월 22일, 타마키 마카우라우 경찰 소수민족 서비스팀은 피하의 바넷 홀에서 소수민족 공동체 지도자들과 함께 수상 안전 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번 세미나에서… 더보기

위험한 감정의 계절: 도박과 멘탈헬스 이야기

댓글 0 | 조회 189 | 10일전
12월은 흔히 ‘축제의 달’로 불린다. 거리의 불빛은 화려하고, 사람들은 마치 잠시 현실을 잊은 듯 들뜬 기운을 뿜어낸다. 그러나 그 화려한 분위기 뒤에는 또 다… 더보기

에델바이스(Edelweiss)의 추억

댓글 0 | 조회 200 | 10일전
음악은 개인적, 사회적 차원에서 감정 표현, 미적 즐거움, 소통, 그리고 심리적 및 신체적 치유 등 다양한 기능을 발휘한다. 또한 집단 정체성 확립, 사회통합, … 더보기

18. 루아페후의 고독한 지혜

댓글 0 | 조회 139 | 10일전
# 산 속의 침묵루아페후 산은 뉴질랜드 북섬에서 가장 높은 화산이다. 높고 험하며 사계절 내내 눈이 덮인 이 산은 항상 침묵 속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모… 더보기

뉴질랜드 학생들이 국내 대학과 해외 대학 중 어느 곳에서 공부하는 것이 더 비용 …

댓글 0 | 조회 530 | 10일전
비용 효율성과 미래 발전에 대한 종합적인 비교 - 2지난호에 이어서 계속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3. 영국 및 미국 대학 유학하버드 대학교미국과 영국은 뉴질랜드 유… 더보기

그 해 여름은

댓글 0 | 조회 139 | 2025.12.10
터키의 국기처럼 큰 별 하나를 옆에 둔 상현달이 초저녁 하늘에 떠 있고, 검푸른 하늘엔 뱃전에 부딪혀 흩어지는 하얀 포말처럼 은하수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 그… 더보기

어둠은 자세히 봐도 역시 어둡다

댓글 0 | 조회 134 | 2025.12.10
시인 오 규원1어둠이 내 코 앞, 내 귀 앞, 내 눈 앞에 있다어둠은 역시 자세히 봐도 어둡다 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말장난이라고 나를 욕한다그러나 어둠은 자세히 … 더보기

아주 오래된 공동체

댓글 0 | 조회 173 | 2025.12.10
처서가 지나면 물에 들어가지 말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올해는 처서가 지났는데도 더위는 꺾이지 않고 도심과 해안을 중심으로 열대야 현상이 계속되었다. ‘습식 사우… 더보기

이삿짐을 싸며

댓글 0 | 조회 568 | 2025.12.09
갈보리십자가교회 김성국하루에 조금씩만이삿짐을 꾸렸습니다그래야 헤어짐이늦게 올 것 같았습니다차곡차곡 넣고구석구석 채웠습니다그래야 천천히 올 것 같았습니다짐 드러낸 … 더보기

뉴질랜드 학생에게 독서가 특별히 중요한 이유

댓글 0 | 조회 532 | 2025.12.09
우리는 뉴질랜드라는 다문화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아이들은 영어로 배우고 말하고 평가받지만, 단순한 영어 실력만으로는 뉴질랜드 교육에서 깊이 있는 성취를 보… 더보기

깔끔하게 요약해 본 파트너쉽 비자

댓글 0 | 조회 337 | 2025.12.09
뉴질랜드에서 배우자 또는 파트너로 체류하는 방법은 크게 2가지가 있습니다. 사실혼(파트너쉽) 관계를 바탕으로 하여 신청할 수 있는 영주권 비자와 비영주권 비자가 … 더보기

2026 의대 진학을 위한 연말 전략: 지금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댓글 0 | 조회 226 | 2025.12.09
▲ 이미지 출처: Google Gemini안녕하세요? 뉴질랜드, 호주 의치약대 입시 및 고등학교 내신관리 전문 컨설턴트 크리스틴입니다. 2026년 뉴질랜드 및 호… 더보기

시큰둥 심드렁

댓글 0 | 조회 108 | 2025.12.09
어떤 사람이 SNS에 적은 글에 뜨끔한 적이 있었다. “눈팅만 말고 ‘좋아요’ 좀 누르면 안 되나요?” 마치 눈팅만 했던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발이 저려서… 더보기

언론가처분, 신상 정보 공개 금지 및 국민들의 알 권리

댓글 0 | 조회 224 | 2025.12.09
지난 9월 8월, 본인의 자녀들을 수년간 납치해서 숨어 살았던 톰 필립스 (Tom Phillips)가 경찰에 발견되었고 결국 총격전 끝에 사망했습니다. 그 소식 … 더보기

고대 수메르 문명은 왜 사라졌는가

댓글 0 | 조회 146 | 2025.12.09
메소포타미아 사막 위로 붉은 해가 떠오를 때면, 거친 바람은 먼지를 일으키며 과거의 귓속말을 실어 나른다. 그 속삭임은 무너진 벽돌과 부서진 신전 기둥 사이를 스… 더보기

스코어카드와 인생의 기록 – 결과보다 중요한 것은 과정

댓글 0 | 조회 113 | 2025.12.09
골프를 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스코어카드를 손에 쥐고 라운드를 시작한다. 한 홀 한 홀마다 몇 타에 공을 넣었는지를 적어 내려가며, 18홀을 돌고 나면 총합이 자… 더보기

나도 의대 들어갈 수 있을까 : 의대 경쟁률 10:1 그 진실은?

댓글 0 | 조회 315 | 2025.12.07
출처: https://www.istockphoto.com/kr/%EC%9D%BC%EB%9F%AC%EC%8A%A4%ED%8A% B8/%EC%9D%98%EA%B3%B… 더보기

‘인공 방광’이란

댓글 0 | 조회 287 | 2025.12.06
국민보험공단이 발표한 ‘2024 지역별 의료 이용 통계 연보’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병원에서 진료받은 6대 주요 암 환자 중 유방암 환자가 인구 10만명당 52… 더보기

수공하는 법

댓글 0 | 조회 165 | 2025.12.06
수공(收功)은 기운을 거두어들이는 동작으로서, 명상을 하면서 자신의 주변에 형성된 기운을 거두어 단전으로 끌어내리는 것이다.명상 중 급한 용무로 명상을 멈추어야 … 더보기

AI 시대의 독서: 넘쳐나는 정보 속에서 독서가 필요한 이유

댓글 0 | 조회 623 | 2025.12.01
공자는 논어 첫 문장에서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고 했다. 배움 자체가 인생의 의미가 되던 시대의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더보기

AI 시대의 새로운 교육 방향: AI와 함께 생각하는 힘

댓글 0 | 조회 559 | 2025.11.28
기술의 발전은 언제나 교육의 변화를 이끌어 왔다. 그러나 인공지능(AI)의 등장은 그 속도와 영향력에서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전환점을 만들어 내고 있… 더보기

무료 유방암 검진 연령 확대

댓글 0 | 조회 333 | 2025.11.26
무료 유방암 검진 연령이 74세까지 전면 확대된다.

에이전시 (대리인) 관련 법

댓글 0 | 조회 228 | 2025.11.26
우리는 어려서부터 누군가를 ‘대신’ 해주는 걸 자연스럽게 배우면서 자랍니다. 친구가 멀리 던진 공으로부터 내가 더 가까우면 친구 대신 공을 주워서 던져주기도 하는…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