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연화 (花樣年華)

연재칼럼 지난칼럼
오소영
정동희
한일수
김준
오클랜드 문학회
박명윤
수선재
이현숙
박기태
성태용
명사칼럼
멜리사 리
수필기행
조기조
김지향
송하연
김성국
채수연
템플스테이
이주연
Richard Matson
Mira Kim
EduExperts
김도형
Timothy Cho
김수동
최성길
크리스티나 리
박종배
새움터
동진
이동온
피터 황
이현숙
변상호경관
마리리
마이클 킴
조병철
정윤성
김영나
여실지
Jessica Phuang
정상화
휴람
송영림
월드비전
독자기고
이신

화양연화 (花樣年華)

3 3,315 코리아포스트
나는 내 목적지가 어딘지 모른다. 나는 무시로 떠나고 싶었다. 그런 마음은 수년 전부터 더욱 심해졌다. 세상의 부대낌과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일상이 견디기 어려웠다. 모든 생활의 군때와 시름, 탐욕을 벗어 던지고 나는 방랑하고 싶었다. 무념의 상태로 여기저기 떠돌다 보면 내 심상이 청정해지지 않을까.

나는 홍콩으로 떠났다. 홍콩에 가면 정말 별들이 그렇게 많을까? 별들이 소곤대는 홍콩의 밤 거리를 걷다 보면 꽃 파는 아가씨가 불쑥 뛰쳐나올까?

홍콩으로 가는 C항공사는 좌석마다 LCD스크린이 장착되어 있었다. 장난감처럼 작은 리모콘도 스크린 아래 꽂혀 있다. 잡아 뽑으면 줄과 함께 나오는 리모콘은 다시 꽂을 때는 줄과 함께 스르륵 빨려 들어갔다. 나는 감탄이 절로 나와 몇 번이나 리모콘을 넣었다 꺼내 보곤 했다.

신형 비행기의 서비스 중에 봉준호 감독의 '마더'가 마련되어 있었다. 김혜자가 들판에서 의식(儀式)처럼 추는 춤은 공옥진의 병신춤과 다름없다. 에미란 한(恨) 조차도 춤추면서 삭여야 하는 법. 한숨이 턱에 닿는 고통 속에서도 무연히 밥을 짓고 국을 끓이고 넘기기 어려운 밥을 자식 앞에서 꾸역꾸역 맛있게 먹는 것, 처참하게 찢겨져도 자식 앞에서는 찬란해 보여야 하는 것. 김혜자의 허위허위 떠도는 춤사위를 내 몸도 이미 알고 있는 터, 나도 눈을 감고 그 의식에 동참하고 있었다.

박 건용 감독의 '킹콩을 들다'도 저릿한 감동을 주었다. 부모도 없고 가난하고 오갈 데 없는 아이들에게 희망과 사랑을 몽땅 쏟아 붓고 죽어간 거룩한 스승의 얘기다. 고 정인영 선생의 실화가 바탕이 되었다. 그 이름을 나는 기억하고 싶다. 시간 떼우라고 틀어 놓는 영화가 아니라, 잘 만들어진 영화를 선별 해주고 잘 보았다니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 홍콩의 소녀 그룹이 전통악기로 연주한 곡들을 감상하다가 다시 주성치의 홍콩 영화를 보았다. 아내가 여덟 명이나 있는 주성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행했는데, 정말 사랑하는 여인 공리를 만나게 된다. 때 마침 비행기는 홍콩에 도착했다. 유쾌하고 기발한 주성치 영화의 나머지는 돌아오는 길에 볼 수 있게 되기를---.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예약해 둔 호텔로 가는 밤 길은 온통 빛 뿐이었다. 별의 짝퉁 불빛들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어두운 광야, 불빛들이 다리 아래로, 바다 위로, 길 옆으로 치열하게 반짝였다. 하늘의 별빛은 땅의 불빛에 질려 우주의 어둠 속으로 제 몸을 숨겨 버렸다.

별들은 말한다. 땅의 일들이 하늘의 일들을 덮치는 경우는 없다고. 그래서 별들은 몸을 숨겼노라고. 그 오만한 야심은 이튿날 백주 대낮에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침사추이의 한 호텔에 묵었다. 홍콩의 중심지이면서 구룡반도와 홍콩 섬을 잇는 항구 쪽 호텔을 택한 이유는 사방팔방 다니기 좋다는 지리적 이점 때문이었다. 침사추이 지역은 호텔들이 모여 있고 명품 매장들이 즐비하게 자리잡고 있다. 쇼핑 천국이라는 홍콩답게 없는 게 없었다. 저 명품들을 누가 다 살까? 홍콩의 중심지를 몽땅 차지한 명품 샵도 모자라서 건물들이 새로 올라가고 오래된 건물들은 재단장해서 새로운 명품 매장으로 변신시키려는 공사로 바빴다. 도대체 하늘의 별보다 더 귀한 명품이 있는가?

서울 거리와 흡사한 홍콩은 사람도 많고, 매연을 내뿜으며 달리는 차들도 많고, 발 아래는 공사중이어서 조심해야 하고 허공은 어지러운 간판들이 한참씩 뻗어 나와 공중에 매달려 있어서 아슬아슬했다. 정신 없이 인파에 떠밀려 가고 있는데,누군가가 '언니!' 하고 부르는 것이 아닌가. 홍콩에서 누가 나를 아는 체 하는 것인지? 게다가 남자였다.

"언니, 짝퉁 있어. 가방, 시계---가짜, 가짜."

쫓아오면서 호객 행위를 하는 남자는 현지인은 아니었다. 이태원에서 근무하던 이가 출장을 온 것일까. 여자에게는 언니, 남자들에게는 아저씨라고 했다.

"진짜랑 똑같애, 언니---!"

유창한 한국말에 나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홍콩 시내에 삼삼오오 모여 있는 거무스레한 남자들은 여지없는 호객꾼이었다. 으슥한 상가 모퉁이로 나를 끌고 갈 심사였다. 나는 외지인 티를 안 내려고 애썼는데 귀신같이 알아보고 호객 행위는 계속 되었다. 에휴, 창피! 여행지에서 이렇게 낯 뜨거운 일은 처음이다. 대한민국이 '졸부의 나라'로 손가락질 받는 일을 종식시키려면 품위와 도덕성, 예의를 돈 버는 일보다 더 중시해야 한다. 이제는 먹고 살만하지 않은가.

97년 6월 30일, 영국의 임차 기간이 끝나고 중국에 귀속된 홍콩은 아시아의 허브로 위상을 드높이고 있는데, 뭐니뭐니 해도 식도락의 천국이다. 몽콕 야시장의 허름한 집, 죽 조차도 어찌나 맛 있는지 그냥 홍콩에 눌러 앉고 싶을 정도. 다양성과 맛으로 예술의 경지까지 오른 딤섬은 홍콩의 대표 음식. 나는 아침마다 '화양연화'의 장만옥이 국수를 사러 양철통을 들고 나가 듯 딤섬을 사러 나갔다. 난탄 로드의 딤섬 집에서 딤섬을 다섯 가지 정도 샀는데, 고작 N$7,8불 안팎. 나는 딤섬을 사 들고 골목길을 돌아 호텔방에 와서 홍차와 함께 먹었다. 영국 사람들이 마약을 팔아 차를 사 먹었을 정도로 홍콩의 차는 특별하다. 향과 맛이 진하고 그윽하다. 딤섬은 커피보다 홍차와 썩 잘 어울린다. 그 둘의 궁합을 맛보면서 나는 별나게 '화양연화'라는 말을 떠올렸다. 왕가위 감독, 양조위와 장만옥 주연의 영화 제목이기도 했던 '화양연화'는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라는 뜻. 내가 그 때 그런 시간 속에 있었다.

ⓒ 뉴질랜드 코리아포스트(http://www.koreapost.co.nz),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yooye841
안녕하세요? 님의 글을 애독하고 있습니다. 저도 몇달전에 홍콩을 처음으로 방문했었고 침사쵸이에 묵었는데, 어쩌면 저랑 정반대의 경험을 하셨군요. 저희 식구는 홍콩이 냄새나고 지저분한 곳으로 생ㄱ가하게 되었습니다.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질 수는 있지만 정반다라니... 아무튼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셨다니 다행입니다. 좋은 글 항상 감사드립니다.
김영나
되도록이면 매 순간들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간들이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져봅니다.

홍콩은 역동적이고 매력적인 도시입니다.맛 있는 요리가 많아서요.ㅋㅋㅋ

애독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제주
내 인생의 화양연화는 언제였나?

친정엄마가 그러시더군요. 여자가 아이 둘 낳고 나면

지나가는 중 도 돌아본다고...



저는 개인적으로 내 인생에서 가장 봄날은

이십대 중후반이였군요. 연애하고 결혼하고 첫아이낳고

직장복귀하고...이십년이 넘은 지금은 추풍낙엽이 따로없어유ㅠㅠㅠ

나의 지음(知音)은 어디에?

댓글 2 | 조회 2,907 | 2012.10.24
내가 좋아하는 친구들은 가만히 있어도 서로의 마음을 읽어내는 재주들이 있다. 몇 마디 나누지 않아도, 표정만 봐도 이심전심이 가능하다.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는 … 더보기

침묵의 봄

댓글 0 | 조회 1,899 | 2012.10.09
봄날 밤, 벚꽃놀이를 했었다. 동행자는 기억나지 않지만, 눈웃음치며 내게 왈칵 달려들던 정숙한 듯 요부 같던 벚꽃의 뜨거운 기운은 아직도 새록새록하다. 바람이라도… 더보기

좋은 일, 나쁜 일, 이상한 일

댓글 0 | 조회 2,316 | 2012.09.25
수십 년 영화를 만들었고, 거장이라 불렸지만 영화가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고백했던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김기덕 감독도 ‘아리랑’에서 &lsq… 더보기

강북스타일

댓글 3 | 조회 3,134 | 2012.09.11
이민 생활의 방향, 성패는 뉴질랜드에 도착해 누구를 만났는지, 최초 며칠에 따라 결정된다는 속설이 있다. 제법 신빙성이 크다. 내가 하버브리지 남쪽에서 13년째 … 더보기

죽기(훨씬) 전에 꼭 해야 할 일

댓글 2 | 조회 3,952 | 2012.08.29
옛날에는 사형수가 교수형을 당할 때 물통, 그러니까 bucket 위에 올라서면 목에 오랏줄을 걸었다고 합니다. 물통을 발로 차기만 하면 사형이 집행되는 것이지요.… 더보기

세상은 넓고 음식은 많다

댓글 5 | 조회 4,658 | 2012.08.14
지난 일요일, 3백여 개의 식탁이 차려진 곳에 초대받았습니다. 오클랜드 Food Show가 열리는 Greenlane ASB Showgrounds였지요. Food … 더보기

눈물 많은 남자

댓글 4 | 조회 2,219 | 2012.07.24
동시대에, 지구에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 뿌듯한 이가 있다. 2년 전 퇴임한 브라질의 전 대통령‘룰라 다 실바’다. 그는 너무 … 더보기

화살보다는 손수건을---

댓글 5 | 조회 2,230 | 2012.07.11
모름지기 좋은 정치란 국민들이 ‘정치에 대해 모르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노자(老子)가 요(堯) 임금의 ‘무위(無爲)의 다스림&… 더보기

그 저녁이 참 그리웠다

댓글 5 | 조회 3,711 | 2012.06.26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요즘, 뒤통수부터 등 허리까지 으스스하다. 이런 날은 순두부나 된장찌개 보글보글 끓여 먹는 게 최곤데---. 만약 신김치가 있다면 기름을… 더보기

당신을 희망의 메신저로 임명합니다

댓글 3 | 조회 2,371 | 2012.06.12
---- 코리아 포스트 창간 20주년에 부쳐 지구 밖 6천Km 상공에서 찍은 우주 사진을 본 적이 있습니다. 지구는 진애(塵埃)에 불과했지요. 마치 햇살 좋은 날… 더보기

항아리 속 女子

댓글 4 | 조회 3,019 | 2012.05.22
#1. 한국의 전통 장(醬)들은 오래 묵으면 약이 된다. 위장병엔 묵은 간장이, 외상이나 화상에는 된장이, 감기나 어혈 푸는 데는 고추장이 특효라고 한다. 어느 … 더보기

지지고 볶고 끓여주세요!

댓글 1 | 조회 2,586 | 2012.05.09
그보다 더 시끄러울 수는 없었다. 한국에 머무는 두어 달 동안 나는 왁자지껄한 소음의 소용돌이 속에 내던져졌다. 3월, 핵안보 정상회의가 서울에서 열렸다. 몇날 … 더보기

Angry Birds

댓글 4 | 조회 2,512 | 2012.04.24
시인 타고르는 한국을 ‘동방의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고 칭송하였다. 한국이 정적으로 묘사돼 못마땅해 하는 이도 있지만, 떠오르는 해처럼 동방… 더보기

존 키의 선물

댓글 1 | 조회 2,585 | 2012.04.11
거대한 버섯 모양의 구름을 형성하며 폭발하는 핵폭탄의 위용은 실로 상상을 넘어선다. 사방 수십 킬로 면적이 수십 년에서 수만 년 죽음의 땅으로 변하는 것은 물론,… 더보기

살얼음판 위의 여자들

댓글 3 | 조회 2,729 | 2012.03.27
인간의 삶과 기후는 뗄래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래서일까? 빙하가 녹아내리고 북극곰들은 익사하고, 우리네 삶도 살얼음판을 걷는 듯 아슬아슬하다. 얼… 더보기

세종대왕과 사무라이

댓글 3 | 조회 4,654 | 2012.03.13
2년 전쯤 한국에 갔을 때, 가수 ‘비’ 주연의 ‘닌자 어쌔신’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닌자는 원래 암살이나 독살을 담당… 더보기

아파트

댓글 5 | 조회 2,898 | 2012.02.29
뉴질랜드는 서민들을 위한 주택이 부족하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턱없이 부족할 뿐 아니라 주거 환경이 열악하고, 렌트비는 고공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집… 더보기

채식주의자는 행복해!

댓글 3 | 조회 2,843 | 2012.02.15
내 아들이 채식주의자가 된 것은 5년 전 일이다. 완전 채식은 아니고 치즈와 달걀은 섭취하는 Lacto-ovo-vegetarian인데 그나마 치즈와 달걀도 줄여가… 더보기

Summer time

댓글 4 | 조회 3,132 | 2012.01.31
엊그제, 안개 비가 보슬보슬 내리던 날, 공원에서 누가 부르는 듯 했다. 손을 허공에 내밀어보았다. 내리는 둥 마는 둥 간질간질하다. 나는 목에 스카프를 둘렀다.… 더보기

댁의 마음은 어디 계십니까?

댓글 2 | 조회 2,869 | 2012.01.17
내 영역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한정되어 있어요. 동네 슈퍼마켓에서 먹거리를 사고, 집 앞 공원을 산책하고, 가끔 산을 찾고, 한글을 가르치러 이웃 동네로 넘어… 더보기

화다닥씨의 편지-맛있게 잡수세요!

댓글 6 | 조회 3,695 | 2011.12.23
세월이여, 나는 당신을 ‘화다닥 씨’라고 부르겠어요. 화다닥화다닥 뛰어다니면서 홍안에는 구불구불한 고랑을, 칠흑 같은 머리에는 하얀 서리를,… 더보기

12월엔 퀸 스트리트에 가야 한다

댓글 5 | 조회 5,573 | 2011.12.13
산타와의 슬픈 추억 한 토막을 얘기하겠다. 해마다 12월이면 퀸 스트리트 W 건물 벽에 산타가 나타났다. 산타는 윙크도 하고 손가락도 까딱거리면서, 오가는 사람들… 더보기

개와 늑대의 시간

댓글 4 | 조회 3,238 | 2011.11.22
하루에 두 번, 하늘에는 더블 캐스팅 된 배우처럼 해와 달이 떠오른다. 달이 퇴장하는 새벽과 해가 퇴장하는 일몰의 시간은 하루 중 가장 위험하고 불길하다. 어슴푸… 더보기

소통해야 성공한다

댓글 2 | 조회 2,686 | 2011.11.09
10월 21일 발표된 ‘세계은행(IBRD)기업 환경 평가’에서 뉴질랜드가 3위(183개국 중)를 차지했다. 창업 소요기간, 인허가 관련 행정… 더보기

내 친구 Kitty와 Cyril

댓글 4 | 조회 3,205 | 2011.10.26
나는 가끔, 120살쯤 되는 Kitty와 Cyril을 만나러 간다. 티티랑기를 거쳐 후이아로 15분 정도 달리면 Karamatura Valley가 나온다. 그 곳…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