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식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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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의 식탁

2 2,813 뉴질랜드 코리아타임스
여행의 백미는 그 지역의 별미 음식을 맛보는 것이 아닐까? 나는 여행의 추억이 혀에 남아 있다가 주체할 수 없는 감흥으로 가끔 되살아 난다. 북경 천안문 광장 앞쪽 어딘가에서 먹었던 '북경 오리구이 밀쌈'은 세계 3대 요리에 등극한 맛답게 참으로 정갈하고 담백했다. 흰 화선지에 그려진 수묵화 혹은, 인적 드문 산골에 차곡차곡 내려 쌓이는 눈발처럼 자극적이지도 요란하지도 않지만 오래도록 유혹적이다. 날씨가 더워지면 북경 맥주 한 잔과 오리구이 밀쌈의 궁합이 생각난다. 시카고의 '알래스카 왕게 요리'는 나이아가라 폭포에 대한 실망감을 보상해주기에 충분했다. 게가 얼마나 크고 살이 폭폭하게 들어차 있는지 다섯 손가락으로 푹푹 뜯어내어 먹을 정도였다. 짭쪼름한 바다 내음과 게의 향긋함, 곁들여진 감자구이--- 아, 침이 넘어간다.

뉴질랜드를 여행할 때 가장 큰 문제는 먹거리다. 이를테면, 항구 도시 러셀에서 피자를 먹고 90마일 비치를 달려 가다가 BBQ를 먹고, 또 타우랑가 어디에선가 KFC를 먹었다. 그 밥에 그 나물, 아니 그 고기에 그 피시&칩이 아닐 수 없다.

사정이 이러하니 뉴질랜드를 여행할 때는 차라리 모텔에서 밥을 해먹는 경우가 많다. 여행을 떠나기 전 김치와 밑반찬을 준비하고 고기도 잰다. 여행지에 도착해서 모텔에 짐을 풀자마자 나는 식사 준비를 한다. 밥이 끓는 동안 상추를 씻고, 고기도 볶고, 김치도 썰고 이것저것 밑반찬거리도 꺼내 식탁을 차린다. 식사를 마친 후, 차를 마시고 과일도 깎아 먹고---. 이튿날 눈 뜨자 마자 다시 밥을 짓고---, 차 안에서 먹기 위해 고구마를 찌고 커피도 끓여 보온통에 담는다.

두 해 전에는 한국에서 엄마와 동생이 와서 함께 여행을 떠났는데, 그 때는 더 바리바리 꾸려 가야 했다. 당뇨가 있는 엄마 때문에 식단을 더 신경 써야 했고, 또 여행 중에 새해를 맞이하니 떡국이라도 끓여 먹을 요량으로 떡국떡을 준비하고 갈비를 쟀다. 엄마에게 영양죽 해 드린다고 호박, 호두, 잣 챙기고 ---. 그리고도 여행지에 도착해서는 엄마가 뉴질랜드 홍합이 맛있다고 하셔서 홍합을 사러 현지 슈퍼를 헤매고 다녔다. 여행 떠나기 전부터 진을 뺀 나는 그로기 상태가 된다. 그러나 홍합살을 초고추장에 찍어 맛있게 드시는 엄마와, 파를 송송 썰어 넣은 뽀얀 홍합탕에 소주가 땡긴다며 거나하게 취한 남편을 보니 뭐 또 '내 고생쯤이야, 가족이 행복하다면---'

집에 돌아와서는 어떤가. 모텔에 통조림 따개(자동이다)를 두고 와서 며칠 동안, 생각날 때마다 속상했다.

나는 바보인가? 타우랑가 어디쯤의 모텔에서였다. 내가 밥을 하는 동안 가족들은 모텔 안에 있는 수영장엘 갔다. 나는 예의 한 시간 넘게 식사 준비를 했다. 식탁에 밥상을 차려 놓고, 푸닥거리하다가 지친 무당처럼 얼굴이 벌개져서 수영장으로 가족들을 데리러 나가는데, 마오리 여자가 옆방에서 호젓하고 한가로이 책을 읽고 있다가 나를 보고 눈인사를 했다. 그녀는 묻지도 않았는데, 생일을 맞아 혼자 모텔에 머물면서 휴가를 즐기고 있다고 했다. '엄마는 뿔났다'의 그 엄만가? 엄마가, 주부가 혼자 있는 풍경은 모든 여자들의 꿈이기도 하지만 낯설지 않은가. 4,50대 여자들에게 휴가가 주어진다면 무엇을 하겠는가, 라는 질문에,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떤다, 드라이브를 한다 등이 아니다. 하루종일 아무일도 안하고 뒹굴 거리면서 자다가 먹다가 하는 것이란다. 그럼 마음이 편할까? 누가 먹을 것을 해다가 내 앞에 바칠까? 언젠가 아파서 며칠 누워 있는데, 병 때문이 아니라 굶어서 죽을 번 했다.

'칼의 노래'로 잘 알려진 소설가 김훈은 '밥벌이의 지겨움'이라는 책에서 '죽는 날 까지 반드시 먹어야 하는' '진저리나는 밥'에 대해, 그리고 그 '밥을 벌어먹기 위해 낚싯대에 아가미가 꿰어져서 일터로 향하는 삶의 비애, 밥의 슬픔'을 노래하고 있다.

"---밥벌이도 힘들지만, 벌어놓은 밥을 넘기기도 그에 못지 않게 힘들다. 술이 덜 깬 아침에, 골은 깨어지고 속은 뒤집히는데, 다시 거리로 나아가기 위해 김 나는 밥을 마주하고 있으면 밥의 슬픔은 절정을 이룬다."

한 가지 더 추가 하자면(그가 남자라서 간과하고 넘어간) '밥하기의 지겨움'이다.

여행지에서 조차---하지만 대책이 없지 않은가? 그냥 껴안고 가는 수 밖에---. 오늘 아침만 해도 나는 불려 놓은 팥을 삶고 찹쌀가루를 반죽해 팥죽과 부꾸미를 만들고, 파스타도 만들었다. 부꾸미는 아침용, 파스타는 아들의 점심용으로 토마토, 파프리카, 피망, 버섯 등이 듬뿍 들어가 있다. 그렇게 먹어야 아들이 밤새워 작품을 창작해 내지 않겠는가. 낚시를 떠나는 남편을 위해선 샌드위치, 커피, 김치, 초고추장 등을 마련했다.

밥하고 김치만 있으면 되지 뭘 그리 하냐고 친구는 타박하지만, 영양과 색의 조화를 중시하는 나의 강박관념이 곧 내 식탁의 주요 양념이다. 내가 아는 분명한 사실은 죽을 때까지 내가 놓을 수 없는 일이 장금이처럼 '맛을 그리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 행위가 '세상과 단절되지 않고, 가족들을 한 울타리로 불러 모으는' 사랑의 행위이므로.

ⓒ 뉴질랜드 코리아타임스(http://www.koreatimes.co.nz),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제주
김훈 책이 읽고싶어 검색하다 님의 지난글을 읽었습니다.

너무너무 공감가는 내용이네요.



저는 뉴질에 살면서 돈벌이 하는 일보다

아이들 교육보다 더 힘든일이 바로 밥, 밥, 밥해먹는 일입니다.

밥하면서 한숨쉬는것도 모자라

요즘은 맨정신으로 밥하기 힘들어 와인을 홀짝거려 가면서 밥을 할

지경이랍니다.

밥벌이하는 일도 지겹겠지만 밥순이 역활도 너무 지겹군요.

그럼 외식이라도 하라구요? 외식하고오면 더 짜증납니다.

맛은 없고 입에도 안맞고 비싸기만하고..



잘 읽었습니다.
김영나
제 칼럼이 몇회째인지 세어보려고 페이지를 넘겼다가 제주님의 글을 보았네요.

ㅎㅎㅎ 와인을 마셔가면서 밥을 한다니---저도 그 방법을 써봐야 겠네요.

저는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밥을 하죠. 제주가 고향이신가요?옥돔이 참 맛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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